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58화 (158/201)

158화 ― 특히 로판의 경우엔요.

* * *

주말 동안 폴란드에서의 짧고 굵은 미팅이 끝났다. 그리고 어김없이 BS북에서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이 되었다.

“흐어어엄…….”

“팀장님, 주말에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점심시간에도 계속 엎드려서 주무시던데요?”

회사 의자에 등허리를 깊게 넣으며 기지개를 펴는데 황건일 매니저가 피로회복제 하나를 쓱 건네며 말했다.

“어우, 그냥 잠을 좀 못 자서요. 그보다 잘 마실게요.”

“하하, 탕비실에 있는 거 그냥 가져와서 드렸을 뿐인걸요.”

그래, 나도 잘 알지.

내게 건넨 미지근한 박카스가 회사 탕비실에서 가져온 거란 걸.

하지만 이런 별거 아닌 싹싹한 행동이 인간관계에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된다. 조팟같이 매사 불평, 불만, 시기, 질투가 점철되어있는 똥덩어리들의 경우 온갖 생색을 다 내니까. 지금도 봐라, 박카스를 하나 건네는 황건일 매니저의 모습을 보곤 눈꼴사납다는 듯이 또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지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척하는 놈들이 제일 멍청한 놈들이지.’

바로 조팟같은 놈들이 그런 놈들이다.

얼마 전까지 내가 지적하기 전만 해도 조팟놈은 이런 일에 대해 비꼬기 일색이었다. 황건일 매니저처럼 다른 누군가에게 음료수를 하나 챙겨준다거나, 하물며 깜빡하고 집에서 두고 온 충전기를 빌려주는 선의마저도.

황건일 매니저에게 조상님 중에 보부상 있던 거 아니냐는 선 넘는 패드립에 조팟놈은 즉시 내게 소회의실로 끌려가 정신 교육을 다시 당했다. 그 후로는 주둥이로 헛소리를 내뱉는 일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자, 다들 준비 됐으면 주간 회의 일찍 시작해볼까요? 저는 5시에 엘가 쪽에 미팅이 있어서요.”

“넵, 알겠습니다!”

“네.”

마치 물에 가득 젖은 운동화를 신고 걷는 질퍽거림처럼, 기운마저 축 처지게 만드는 조팟놈의 목젖을 엘보로 찍은 후 낭심을 향해 올려차기 10콤보를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는 표면상 팀장이다.

황건일과 조팟놈을 향해 빙긋 미소 지은 뒤, 우리 판무 1팀의 용사들을 데리고 소회의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주는 웬만하면 안 까려고 했는데 말이야. 그건 아마 어렵겠지?’

실수의 화수분인 조팟놈은 내가 굳지 찾지 않더라도 실수를 만들어낼 테다. 그리고 이게 조팟류의 인간들이 멍청하다는 뜻이다.

작은 실수든 큰 실수든 인간이라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한 틈 오차 없이 만들어진 기계조차 예기치 못한 변수로 오류가 나는 일이 허다하다.

그렇기에 다시 나사를 조이고 기름칠을 하는 거지. 하지만 조팟같은 인간들은 기계처럼 제 할 일만 잘하고 회사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 시키지 않으면 된다는 착각의 늪에 빠져있다.

조팟같이 인간미를 없애고 회사를 완벽히 업무적인 기계화된 공간이 되길 바라는 사람들은 타인의 티끝같은 실수에는 옹졸하고 지랄맞으며 자신의 큰 실수에는 더없이 관대하다.

‘조팟만 보더라도 자신의 실수에는 즉각 흐린 눈으로 반응하는 걸 볼 수 있지.’

그러면서 황건일 매니저처럼 타인에게 잘 대해주는 꼴만 보면 눈을 희번득거리고, 배알이 꼴려 뒤집어지려한다.

“자, 그럼 금주 주간 회의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조팟님 담당 작가부터 얘기하자면…….”

그렇기에 우리 조팟이 좋아하는 규칙대로 철두철미하게 정의의 철퇴를 내려줘야겠다. 주간 회의는 별 문제 없이 고요하게 시작 되었다.

하지만 주간 회의를 진행하는 내내 내가 웃기만 하자 조팟놈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간 조팟놈에게 밝은 미소를 건넨 뒤에는 채찍질을 선사했기에, 파블로프의 개가 조건 반사를 보이는 듯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조팟놈의 촉은 기가 막히게 떨어졌다.

“……이렇게 하도록 하고. 그럼 금주 주간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네, 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조팟님은 잠시 남아주세요. 아직 고생 더 하셔야 할 것 같으니까. 아, 건일 매니저님은 먼저 나가주세요. 문만 꼭 닫아 주시고.”

“아…… 넵, 알겠습니다.”

황건일 매니저는 마치 광대 인생 10년차처럼 재빠르게 소회의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탁—

그리고 소회의실 문이 완벽하게 닫혀버리자 내 표정은 더욱 밝게 빛났다. 이번 한 주도 기운차게 시작할 수 있겠다.

* * *

“다녀왔습니다! 다들 좋은 오후 보내고 계십니까!”

“좀 피곤하긴 한데, 그럭저럭? 대표님은 무슨 좋은 일 있었음?”

스웨디시 사우나보다 개운한 조팟 딕톡스로 인해 개운해진 몸으로 엘가 임원 전용 층의 회의실로 들어가자 단풍 삼촌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그 조팟놈 탈곡기에 넣고 탈탈 털고 왔지. 그보다 왜 삼촌밖에 없어? 지연이랑 미현 본부장님은?”

“본부장님들은 지금 올리오실거다. 그런데 너…… 지연 본부장님이랑 부쩍 친해진 것 같다?”

“어?”

“최근 들어서 종종 그러는 것 같아. 미현 본부장한테는 안 그러면서 지연 본부장은 이름으로 편하게—”

“어 저기 본부장님들 오시네.”

지연이와의 관계가 지속되면서 점점 회사 내에서 사용하는 호칭에 오류가 생기고 있다. 단풍 삼촌이 뭔가 눈치를 챈 모습이기도 했지만 때마친 지연이와 권미현이 회의실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여 주위를 분산시킬 수 있었다.

“먼저 와 계셨네요?”

“늦었네요.”

“그아하하, 대표님도 이제 막 오셨습니다.”

“다들 월요일이라 바쁘실테니 자리에 앉으시면 바로 회의 진행하도록 할게요.”

엘가의 임직원들이 모두 회의실 의자에 앉았고 나는 본격적으로 오늘 회의 안건을 올렸다.

“지난 폴란드 출장에서 새로 나온 안건이죠. 에르미스에 종이책을 출간 할 수 있는 온라인 스토어 제작 관련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이무진 경영 본부장님께서 정리한 부분이 있다고 하니 먼저 들어볼까요?”

대화의 포문을 알리는 내 말과 함께 에르미스 온라인 스토어 개발에 관련한 회의가 시작됐다.

“네, 좋습니다. 우선 식목일인 내일을 앞두고 우리 에르미스가 이렇게 온라인 스토어를 제작하는 상황이 와버렸군요. 그나마 다행이란 점은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과 미팅을 하면서 처음 떠올렸던 생각처럼, 단순히 종이책의 제작과 판매를 하는 것만 진행하진 않을거란 뜻입니다.”

단풍 삼촌은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빔프로젝터 화면을 넘겼다. 단풍 삼촌이 리모콘 버튼을 몇차례 나오자 PPT화면으로 정리된 온라인 스토어 예시 화면이 나왔다.

“일단 급하게 어떤 느낌으로 진행하는 게 좋을지 예시로 만들어 봤습니다. 인터페이스의 디자인적 요소는 지연 본부장님께 부탁드릴 예정이니 우선은 기능적인 부분부터 함께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칼자국과 흉터가 가득한 거대한 손으로 마우스를 딸칵거리며 단풍 삼촌의 설명이 이어졌다.

“온라인 스토어의 명칭은 우선 ‘에르미스 샵’으로 불릴 예정입니다. 에르미스 샵은 크라우드 펀딩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합니다.”

미현 본부장의 말에 단풍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아직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월요일.

어제 한국에 도착하고 오늘 아침부터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지금까지 단풍 삼촌은 계속 회의 자료를 준비했었다.

그러니 나 말고 다른 임원진들은 내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다들 이제 처음 듣는 내용일 테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권미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는지 단풍 삼촌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크라우드 펀딩이란 SNS나 인터넷을 활용해 일반 개인들에게 투자 자금을 모아 제작하는 방식입니다. 쉐이크벅 같은 곳이 대표적인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죠. 그리고 해외에서 유명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로는…….”

단풍 삼촌은 쉐이크벅 그리고 해외 사례 등을 전달하며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의 개념에 관해 설명했다.

“……즉, 처음부터 저희가 제작을 진행하는 게 아니라 독자들의 간택을 많이 받은 작품들을 종이책을 제작하는 제작 비용을 만드는 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흐음…… 좋은데요? 필요한 금액에다가 추가로 후원 기능까지 넣는다면…… 확실히 종이책으로 사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큰 메리트가 될 거예요.”

단풍 삼촌의 설명에 출판 본부장 권미현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단풍 삼촌과 내 머리 안에 펼쳐진 모습처럼 그녀의 머리 속에도 에르미스 샵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가 훤히 드리워진 모습이다.

“자잘한 옵션은 작품에 따라 다르겠지만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에르미스 샵에서 자체 제작하는 책들엔 3가지 옵션은 기본적으로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첫째, 가성비 좋은 일반 커버. 둘째, 양장본 하드 커버. 셋째, 물에 젖지 않는 재질로 만들어진 종이 이렇게요.”

“물에 젖지 않는 종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어진 내 설명에 단풍 삼촌이 내 말을 메모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수형 종이가 따로 있어요. 웹소설을 종이책으로 만든 독자들의 경우 일단 최소 1번 이상은 다 직접 읽은 분들이에요. 그리고 그분들 중에선 소장용으로 구입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다시 한 문장, 한 문장 그 맛을 음미하면서 곱씹어 보고 싶어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목욕을 할 때 가볍게 책을 읽을 때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오호, 괜찮겠네. 온전한 휴식 시간에 애정하는 작품을 읽는다라. 크라우드 펀딩이니 가격대가 높아도 상관 없겠네요. 그 부분도 한번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메인 회의자인 단풍 삼촌에게 다시 주도권은 넘어갔다. 그리고 단풍 삼촌의 주관하에 경영 본부, 출판 본부, 디자인 본부 등 각 본부 별로 어떤 식으로 활용하면 좋을지 등에 관한 회의가 계속 되었다.

5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어느새 퇴근 시간인 6시가 훌쩍 넘긴 시간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이런 걸 눈치 없이 막을 수 있는 건 바로 나여야 한다.

“어,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죄송합니다. 다들 에르미스 샵 개발과 관련해서 이견은 없으신 것 같으니 오늘 회의 내용을 토대로 진행하도록 하죠.”

“어휴, 대표님! 시간 좀 늦으면 어때요. 평사원도 아니고 임원이면 대우받는 만큼 책임이 뒤따르는 건 당연한 거죠. 야근 수당도 지문만 찍고 퇴근하면 알아서 나오는데요.”

모두의 퇴근을 일찍 도우려 한 말이었지만 권미현은 손사래를 치며 내 말을 가로막았다.

“하하, 네. 그럼 더 하실 말씀 없으면 여기서 마무리하도록 하죠. 혹시 추가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그럼 제가 하나만 더 여쭤볼게요.”

번쩍 손을 들어서까지 말할 기회를 얻으려는 권미현을 보니 우리가 새로 제작할 온라인 쇼핑몰 에르미스 샵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권미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크라우드 펀딩 기능을 이용하면 저희 번역 외주 비용 등도 상당히 절감될 것 같아서요.”

“번역 비용을 크라우드 펀딩으로 돌리자고요?”

“네, 예를 들자면 작년에 런칭한 ‘잠이 안 오는 황녀님’ 같은 로판 인기작들의 경우 누가 불법으로 번역한 게 한번 퍼진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해외 독자분들이 정식 번역본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시는 메일도 보냈고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때가 떠오른다는 듯이 단풍 삼촌과 지연이도 권미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의미로 말하시는지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번역 부분은 상당히 신중해야 할 것 같아요. 특히 로판의 경우엔요.”

하지만 나는 이 제안은 수긍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로판의 경우 해외에선 통하지 않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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