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모두를 집어삼킬 거대한 바람.
* * *
“스비에츠니에! 스비에츠니에!”
“하하…… 유어 웰컴.”
손짓 발짓 그리고 번역기짓을 함께 총동원해 앞으로의 전개를 설명하자,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입에선 다시금 감탄사가 쏟아져 나왔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나를 향해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감탄사를 내뱉던 한나 코왈스키 작가는,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표정을 싹 굳히고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들을 펜으로 적기 시작했다.
외국어이기도 하고 손글씨라 도통 저 꼬부랑 글씨가 무슨 뜻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진땀을 빼는 그때.
“대표님, 저희 왔어요!”
“얼른 오세요.”
구세주들이 도착했다.
내가 보낸 카톡을 봤는지 가장 앞에 선 지연이 뒤로 단풍 삼촌과 미현 본부장까지 함께 안으로 들어왔다.
“정우야 미안하다, 아무래도 우린 한 번에 들어오는 게 나아 보일 것 같아서…… 고생 많았다.”
지연이와 권미현이 악수를 청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사이 이번 미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단풍 삼촌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괜찮아, 작가님하고는 얘기를 많이 나눴거든.”
“그래? 반응은 좀 어떤데?”
“나쁘진 않은 거 같아. 이제 슬슬 마무리 지으면 될 것 같아. 한나 작가측 변호사는 6시쯤에 오실 것 같다고 했…… 어? 저 분이신가?”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변호사도 양반은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원래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모인 우리들은 본격적인 계약 사항을 다시 점검했다.
정산 비율과 선인세 그리고 계약금 등. 이 부분이 모두 사기가 아닌 것을 다시 한번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변호사를 통해 재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세상에…… 정말 믿기가 어려워요. 제 글이 이런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는지…… 심지어 폴란드도 아닌 한국에 있는 출판사와 계약을 하게 되리라고는…….”
“그아하하, 저희 LGA컴퍼니는 비록 한국에 있지만 한나 작가님의 366일이 연재되는 에르미스는 모태부터 다국적 합작기업입니다.”
“어머, 그렇군요. 저는 처음엔 일본 기업인 줄로만 알았어요. 일본 망가가 많이 올라와 있어서요.”
“그아하하,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었겠네요.”
대화를 함과 동시에 단풍 삼촌은 한나 코왈스키 작가 그리고 그녀의 변호사와 하는 대화를 지속적으로 전달했다.
내가 피땀 흘려 일군 에르미스를 일본 회사로 안다는 말에 단풍 삼촌, 권미현 그리고 지연이의 얼굴에서 서운한 듯한 감정의 표정이 얼핏 읽혔다.
‘다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다고. 웹툰이 세계를 집어삼키는 데 그렇게 오래 안 걸릴 테니까.’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만 해도 웹툰 시장이 일본의 망가 시장을 집어삼키진 못했다. 하지만 인터넷망과 스마트폰의 보급은 웹툰이 만화 시장의 점유율을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거기다 회귀 전과 달리 이번 생엔 우리 에르미스도 플랫폼 전쟁에 참여했으니 대표적인 K―컬쳐 중 하나인 웹툰이 시장을 더 빠르게 장악할 것은 자명했다.
단풍 삼촌이 계속 전달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한나 작가는 웹툰화와 관련해서도 관심을 보이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흔들리던 한나 작가의 마음 위에 못질은 그만하고 이제 용접을 하는 마무리 단계에 진입해야 할 테다.
“지연 본부장님, 부탁드린 자료 준비 되셨을까요?”
“네, 대표님. 여기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도 거의 한숨도 자지 않고 만든 필살 무기가 담긴 휴대용 태블릿을 내게 건넸다.
나는 만국 공통의 바디랭귀지인 빙긋 웃는 미소와 함께 휴대용 태블릿에 지연이가 준비한 자료를 띄워 한나 코왈스키 작가를 향해 보였다.
그리고 단풍 삼촌을 향해 통역을 부탁한다는 눈빛을 슬쩍 보내고는 다시 한나 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기 보이는 그림은 한나 작가님의 366일이 웹툰으로 제작이 되었을 때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러프한 스케치 정도로 제작된 모습입니다.”
“세, 세상에…… 이게 러프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실제로 컬러가 들어간 부분은 상당히 느낌이 다를겁니다. 저희 LGA컴퍼니의 디자인 본부장이신 이지연 본부장님께서 함께 폴란드로 이동하시면서 단 한 컷만 컬러로 작업을 해봤습니다. 대략 이런 느낌이라고 예상해보시면 될 겁니다. 계약서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어느 정도 회차가 쌓이면 웹툰화도 진행을 할 예정이고요.”
“어쩜…… 너무 아름다워요. 이 색감, 실제로 살아있는 것만 같아요! 어머머, 색이 있고 없고 차이가 이렇게 크다니!”
“하하,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컨텐츠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이야기다.
하지만 그 힘이 본격적으로 발휘하기 위해선 언어의 장벽이라는 높디높은 장애물을 극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언어를 몰라도 그림은 모두가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게 웹툰이 가진 가장 강력한 강점 중 하나다.
‘컬러가 들어간 씬이 보통 장면이 아니지. 넷플렉스 영화 썸네일로도 사용했던 장면이니까.’
‘366일’의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서로의 들끓는 욕망을 겨우 참아내며 샤워실에서 몸을 씻겨주는 장면이 바로 지연이가 그린 컷이었다.
그리고 폴란드로 이동하는 13시간 동안 지연이가 열과 성을 쏟아낸 그림이 한나 작가의 마음을 단단히 사로잡은 모양이었다.
한나 작가의 ‘366일’은 이전 세대의 블록버스터 로맨스 시리즈였던 ‘트리플일라잇’이나 ‘스미스의 51가지 그림자’와는 확연히 다른 결의 로맨스 소설이다.
트리플일라잇이나 스미스의 51가지 그림자의 여주인공은, 성 경험이 전무하고 남자 주인공의 행동에 수줍게 대처했었다.
하지만 366일의 여주인공은 수동적이기만 하던 전형적인 로맨스물의 주인공과 달리,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연이가 컬러로 그린 샤워부스 씬이 바로 366일의 여자 주인공이 자신의 내재된 욕망을 거리낌 없이 표출하며, 이 글을 읽는 여성 독자들의 지금까지의 행동이 시대착오적이었다는 것을 일깨워 줄 법한 내용이다.
한나 코왈스키 작가는 도깨비불에 홀린 사람처럼 감탄사를 중얼거리는 것도 멈추고는 컬러로 칠해진 씬을 한동안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더니 한나 코왈스키 작가는 자신의 변호사를 향해 시선을 옮기고선 밝게 웃으며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되, 된 거에요?”
“뭐래요 됐데요?”
한나 작가는 단풍 삼촌이 통역을 마치기도 전에 웃으며 단풍 삼촌에게 손을 내밀어 잡고는 흔들었다.
한나 작가의 모습에 지연이와 권미현이 묻는 말에 단풍 삼촌은 송곳니가 드러나도록 살벌한 웃음을 씨익 지으며 말했다.
“계약 하자고 합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단풍 삼촌의 말에 나 또한 절로 지어지는 밝은 웃음을 뱉으며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한나 코왈스키는 우리 하나하나와 손을 꽉 잡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러고는 단풍 삼촌이 건넨 팬을 받아 계약서에 서명하며 단풍 삼촌에게 무슨 이야기를 건넸고, 단풍 삼촌은 그 말에 자지러지게 웃었다.
“뭐라세요?”
“그으흐흐, 계약서 서명 완료하고 계좌에 돈 입금되면 지금 하는 일 바로 때려칠 거라고 하신답니다.”
우리 LGA컴퍼니에서 한나 작가에게 지급하기로 한 계약금과 선인세를 보고, 그녀는 마치 로또에 당첨된 기분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웃어야 할 사람은 나다.
한나 코왈스키는 366일이 출간됨과 동시에 폴란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폴란드 최고의 작가로 올라설 테니까.
‘즉, 로또를 맞은 건 한나 작가뿐만이 아니라 나도 맞은 거란 소리지.’
이제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원고가 단행본 형식으로 준비되면 교정이 끝난 후 그걸 우리 LGA컴퍼니와 연계된 폴란드 출판사에게 토스해 유통하게 하면 될 일이다.
“대표님, 한나 작가님께서 궁금한 점이 있다고 합니다.”
기분 좋은 상념에 잠시 잠겨 있던 그때, 단풍 삼촌이 내게 말했다.
“예, 뭐가 궁금하신데요?”
“번역 관해서 궁금하다는데?”
“번역은 이미 설명 다 드리지 않았어요? 1권 기준으로 단행본 제작하고 번역 들어가기로요?”
“일단 잠시만…….”
366일의 번역 관련한 얘기는 이미 명확하게 설명 전달이 끝난 상황. 그렇기에 다시금 번역과 관련해 추가 질문이 있다는 게 의아했다.
단풍 삼촌은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 한동안 블라블라 혀 꼬부라지는 소리를 내뱉더니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이건 요청이 아니라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거랍니다. 에르미스에서 종이책 제작 및 출간을 돕는다고 들었는데, 에르미스 내에서 종이책을 자체적으로 판매할 생각은 없냐고 하네.”
“종이책? 우리 그렇게 한다고 말씀드렸잖아. 우리가 위탁한 출판사에서 그렇게 진행을—”
“아니, 그게 아니라 아예 에르미스 사이트 내에서 판매할 계획은 없냐고 물으시는 거야.”
“그야 당연히…… 음?”
이 이야기는 에르미스를 제작하면서 단풍 삼촌과 예전에 이야기를 꺼내 봤던 부분이긴 했다. 왜냐면 서구권은 특히 종이책을 보는 경향이 더욱 컸으니까.
그럼에도 에르미스에 도서 유통 서비스를 추가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단순히 유통 뿐만이 아니라 종이책 제작 등 해야 할 일이 부쩍 늘어나게 되니까.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생각해서 아예 그쪽은 생각도 하지 말기로 했지. 그래서 종이책 출간도 각 국가 출판사에 모든 서비스를 위탁하기로 한 거였고.
“온라인 쇼핑몰 제작은 따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하신 걸 기억하긴 합니다만…… 혹시 대표님 생각이 바뀌셨나 해서요.”
“음…….”
그리고 내 고민이 길어지는 그때 단풍 삼촌이 재차 확인하는 말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든다.
에르미스 베타를 출시하기 전만 해도, 아니, 처음 에르미스를 제작하기로 정했을 때만 해도 366일 같은 대작을 계약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미 미래는 바뀌었지. 그렇다면 나도 바뀐 미래에 따라 맞춰서 행동하면 되는 일이고.’
그렇다면 내가 건넬 답도 정해졌다.
“작가님한테 말씀드려주세요. 언제라고 확답은 드리지 못하지만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우리 홈페이지에서도 판매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요.”
“그으흐, 역시. 알겠습니다.”
단풍 삼촌은 내가 바꾼 계획이 흡족했던지 걸걸한 웃음을 내뱉으며 다시 한나 코왈스키 작가에게 말했다. 에르미스의 비전이자 변해갈 모습에 관해서.
‘추가 인력, 웹사이트 구축 등 많은 일들이 추가로 필요하겠지. 하지만 제대로 자리만 잡으면 돈이 제대로 벌릴 거야.’
머릿속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폭발하듯 떠오른다.
내가 회귀 전에는 텀블벅이라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를 이용해 웹소설의 종이책 제작을 진행했었다.
에르미스에 독자들이 좋아하는 웹소설이나 웹툰을 대상으로 자체 크라우드 펀딩을 제작한다면 어떨까? 화제성은 물론 단단한 콘크리트 팬층과 여러 자본까지 한데 몰리겠지.
확실히 플랫폼을 하나 제작해두니 다양한 형태의 사업으로 진행할 수 있다는 이점이 정말 강력했다.
2016년 3월 말인 지금.
소설피아, 테일랜드, 웹월드 그 어느 플랫폼도 에르미스를 주시하지 않을 테다.
하지만 한국을 뒤흔들 강추강 작가의 판타지 소설, 나아가 전 세계를 뒤흔들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에로틱 소설.
이 둘의 시너지로 에르미스는 거대한 바람을 일으킬 테다. 모두를 집어삼킬 거대한 바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