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 거품이 가득한 철창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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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6일의 작가이자 에로틱 소설의 거장,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 뜨거웠던 첫 전화 미팅이 있은 후 하루가 지났다.
―손님 여러분, 잠시 후 바르샤바 국제 공항에 도착하겠습니다. 좌석벨트를 매주시고, 좌석 등받이와 테이블은 제자리로…….
일반적인 토요일이었다면 지금쯤 글을 쓰고 있거나 밀린 업무를 했을 테다. 하지만 오늘 나를 포함한 LGA컴퍼니의 임원진들은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요청에 따라 그녀를 직접 만나기 위해 폴란드로 이동 중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국제 공항을 향해 꼬박 하루 반나절을 날았지만 그렇게 지루하지는 않았다.
타다닥— 타다다닥— 타닥— 탁—
드륵— 드르륵— 드륵—
슥— 스윽— 슥— 슥슥슥슥슥—
나는 비행 중간중간 집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고 폴란드를 향해 함께 비행 중인 단풍 삼촌과 권미현은 미팅 준비, 그리고 지연이는 내가 준비한 업무를 다들 업무를 진행하느라 바빴으니까.
“삼촌! 단풍 삼촌! 시트 당겨 이제 금방 착륙한다잖아.”
“으음? 아! 그아하하하! 이거이거, 대표님 덕분에 비지니스 클래스를 타서 그런지 몸이 피곤한 느낌도 없네. 이제 막 탑승한 줄 알았는데.”
단풍 삼촌의 너스레에 피식 웃음이 나온다.
LGA컴퍼니 임원들의 항공권은 그동안 무조건 비지니스 클래스로 타라고 했었다.
하지만 단풍 삼촌은 어차피 앉아서 이동만 하는 건데 돈 아깝게 뭣하러 비지니스 클래스를 타냐며 늘 이코노미 클래스로 타고 다녔었다. 하지만 오늘 비지니스 클래스 첫 경험을 하고는 기쁨을 감추질 못하는 모습이다.
“출장이 놀러가는 것도 아닌데, 비지니스 타라고 했잖아. 출장에선 체력이랑 건강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다음부터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비지니스 타.”
“그으흐흐, 일 없다. 비행기 타는 게 뭐 그리 힘들다고.”
“대표 명령이야. 타라면 타.”
“에라이, 이 쌍간나가…… 그으흐흐, 대표님 말씀이면 또 들어야지. 고맙습니다, 대표님.”
“실적이나 제대로 내고 돌아가 보자고.”
일반 항공권에 비해 2배는 높은 금액이지만 우리 엘가의 직원들, 특히 그중에서도 우리 본부장들을 위해선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들이 회사에 벌어다 주는 돈을 제외하고서라도 단풍 삼촌, 권미현 그리고 지연이까지 이들 모두는 업무 외적으로도 이제 내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실례합니다, 손님. 등받이와 테이블 제자리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비지니스 클래스여서 그런지 아니면 기분 탓인지, 내게 다가와 등받이와 테이블의 위치 변경을 요청하는 승무원의 상냥한 안내를 받으며 우리는 곧 바르샤바 국제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시간이 아직 오후 3시도 안 된 게 너무 신기해요!”
“그러니까요. 한국에서 비행기 뜬 시간은 오전 9시 다 되어서였는데 13시간 비행해도 오히려 시간이 거꾸로 돌아간 것 같네요.”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온 지연이와 권미현이 두 눈을 반짝이는 그때 여행용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있는 우리를 향해 단풍 삼촌이 국제 면허로 빌린 은색 밴이 다가와 섰다.
“그으흐흐, 자자 얼른 타십시다. 시간 없으니까 바로 숙소로 이동하겠습니다.”
“네에, 좋아요!”
“넵!”
“오케이.”
폴란드의 자동차 운전석 위치는 한국과 동일했기에 단풍 삼촌은 딱히 운전에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차에 심을 싣고 숙소로 이동하며 나는 임원진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의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모두 알고 계시겠지만 한나 코왈스키는 무조건 계약해야 하는 작가님입니다. 그리고 오늘 미팅 때에는 우선 지연 본부장님이 준비한…….”
지금으로부터 하루 전.
단풍 삼촌을 통해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 전화 미팅을 진행했을 때 그녀가 추가로 원하는 조건이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절대적인 하나가 바로 우리를 대면으로 직접 만나 계약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비록 내가 앞으로의 전개 방향 등 이런저런 작품에 관한 피드백을 주니 우릴 사기꾼으로 생각했던 불신이 대부분 사그라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계약은 무조건 직접 하고 싶다고 했지. 자신이 아는 변호사를 대동하고 싶다고까지 했으니까.’
한나 코왈스키 작가가 왜 저렇게 의심이 많은지는 나 또한 충분히 이해가 간다. 남자친구의 외도로 인한 불신 트라우마와는 별개로, 현재 우리 에르미스에서 웹툰이 아닌 글을 쓰는 작가들 중 제안을 받은 사람은 오직 한나 코왈스키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 선례가 없다면 아무리 좋은 선물이라도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은 의심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한나 코왈스키 작가가 지금 그 상황에 처해있는 것일 테고.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의 미팅을 어떻게 진행할지 어떤 부분을 어필할지 등 각자 맡은 부분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의 약속 장소이자 우리의 숙소로 삼은 ‘인터컨티넨탈 바르샤바’ 호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시간이 빠듯하겠지만 간단히 씻고 5시 30분까지 1층 로비 안쪽에 미팅룸에서 보기로 해요. 다들 늦지 말아주세요.”
““네!””
지연이와 권미현에게 1시간이란 시간은 짐을 풀고 씻기에 턱없이 부족한 시간일 터. 하지만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의 약속 시간은 오후 6시다.
장시간의 비행을 해서 이들이 다들 피곤하리란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아주 여유가 있는 시간은 아니기에 더 시간을 주는 건 불가능 했다.
안내를 전달한 후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이동했고 나는 뜨거운 김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물로 샤워를 하며 긴장감으로 인해 밀려드는 상념을 흘러내렸다.
샤워를 마치고 정장으로 깔끔하게 옷을 갈아 입었지만 아직 시간은 오후 5시가 조금 되기 전의 시간. 일행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준비가 끝났다.
“흠, 먼저 나가볼까 그럼?”
마음 같아선 30분이라도 방 안에서 더 쉬었다가 나가고 싶었다. 아무리 비지니스 클래스를 타고 왔다고 하더라도 13시간의 비행이 그리 편안한 일정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는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이 한가득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넥타이를 한 번 가다듬고 노트북이 담긴 서류 가방을 챙겨 바로 1층으로 이동했다.
“헬로우, 익스큐스 미? 웨얼 이즈 어 미팅룸? 아임 프럼 LGA컴퍼니. 메이드 언 어포인먼트.(실례합니다, 회의실이 어디 있을까요? LGA컴퍼니에서 나왔고 회의실 예약을 했습니다.)”
“플리스 컴 디스 웨이(이쪽으로 오세요).”
“땡큐땡큐.”
초등학생 수준의 영어였지만 단풍 삼촌이 없기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1층 로비 안내 데스크 직원의 도움을 받아 한나 코왈스키를 만나기로 한 회의실로 다가갔다.
“히얼 이즈 더 미팅 룸. 햅 어 그레잇 데이(여기가 회의실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어?! 뭐야. 저기요! 이스큐즈 미! 잠시만! 웨잇!”
“아 벡 유얼 파든?”
안내를 마치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호텔 직원을 급히 쫓아가 불렀다. 왜냐면 혹시 몰라 5시부터 예약한 회의실에 정체불명의 외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텔리어에게 손짓발짓을 해가며 회의실 안에 있는 여성은 생판 남이며 나는 지금 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을 했다.
하지만 인내심을 갖고 내 말을 찬찬히 듣던 호텔리어는 방긋 웃으며 나와 함께 회의실로 이동했다.
끼익—
그리고 회의실 문을 열어 여성에게 폴란드어로 뭐라 블라블라 거리더니 그대로 미소를 남기곤 회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아니 뭐 이런……?’
내가 영어를 잘하는 편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전달이 되었을 터. 그렇기에 호텔 직원이 이런 태도를 보인다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회의실 안에 있는 젊은 여성이 한나 작가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변호사와 함께 온다고 했었고 일이 끝나고 오후 6시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었으니까.
“헬로우, 미스터 박?”
“미스 코왈스키?”
“예스! 잇츠 미!”
내게 다가와 볼뽀뽀를 건네는 여인을 보니 한나 코왈스키 작가 본인이 맞는 모양이다. 이전 생에도 그녀의 소설과 영화를 봤을 뿐이지 원작자인 그녀의 생김새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아니 기사에서 보기는 했지. 하지만 지금 같은 수수한 모습은 아니었다고…….’
얼핏 스치듯 봤던 기억 속의 한나 코왈스키 작가는 화려하면서도 노출이 상당한 옷을 많이 입던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봄이 거의 다 다가오는 지금 계절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꺼운 니트에 머플러 그리고 털모자까지. 언뜻 보기엔 대학생처럼 보이는 차림새였기에 도무지 그녀가 한나 코왈스키 작가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젠장, 다들 나오려면 30분…… 아니, 빨라야 20분은 걸릴 것 같은데.’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인사를 받으며 빠르게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지만 지금 시간은 4시 55분. 빨라도 너무 빨리 나왔다.
일단 최대한 단풍 삼촌과 다른 임직원들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 들었다.
나는 가져온 노트북을 회의실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품에서 명함을 꺼내, 짙은 갈색과 은색이 뒤섞인 머리칼이 인상적인 한나 코왈스키 작가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되도 않는 영어로 떠듬떠듬 말을 이어 나갔다.
“LGA컴퍼니의 박정우 매니저라고합니다.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약속 시간은 6시로 알고 있는데, 혹시 저희가 잘못 안내를 드렸을까요?”
“아,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오늘 빨리 도착하게 되었어요. 전화로 말씀드렸던 변호사님은 6시에 맞춰서 도착하실 것 같고요.”
“예, 그렇군요. 다른 분들은 5시 반까지는 나올 것 같아서 조금만 더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물론이죠.”
한나 코왈스키 작가를 약속 시간 1시간 전에.
그것도 임원진 사이에서 가장 영어를 못하는 나와 단둘이서만 만나게 된 영화 같은 상황이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나는 한나 코왈스키 작가에게 양해를 구하고 임원진 톡방에 카톡을 남기고 차례차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다들 준비하느라 바쁜지 내 연락을 보지는 못했다.
‘젠장. 결국 30분 정도는 내가 캐리해야 하는 건가?’
사실 언어만 통했다면 이렇게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어의 장벽 앞에서는 모든게 가로막혔다.
“하하, 도착하고 바로 준비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리는 것 같습니다.”
“어머, 천천히 하셔도 되세요. 제가 괜히 부담을 드리는 것 같네요.”
“제가 영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해 지금처럼 사전을 보면서 대화를 이어 나가는 걸 양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말씀을요. 저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걸요? 그보다 혹시 지난 통화에서 앞으로의 전개 방향에 관해 이야기 해주셨던 매니저님이 맞으실까요?”
“……네, 맞습니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도,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한나 코왈스키의 말에 괜스레 야동을 보다 걸린 아이처럼 자라처럼 빼낸 목으로 주위를 살피게 된다.
덥석—
그리고 내가 생각을 갈무리하기도 전.
한나 코왈스키 작가는 내 손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듯 당기며 탄성을 내질렀다.
“어머! 미스터 박이 맞네요! 맞을 거라는 생각은 들었는데 혹시나 했어요! 미스터 박은 마치 제 은밀한 욕망을 끌어내는 것만 같아요.”
“아…… 하하…… 은밀한 욕망이라…… 보통 우린 그걸 필력이라 부르기로 했죠.”
당황스러움을 안겨주는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단어 선정에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잡힌 내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녀는 다시 내 손을 자신의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뇨, 은밀한 욕망이 맞아요. 그리고 저는 우리 사이에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하하하…… 그렇군요…….”
에로틱 소설 거장의 눈빛이 묘하게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단풍 삼촌 그리고 본부장들이 오기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기는 그때 한나 코왈스키는 마치 입맛을 다시듯 혀로 입술을 적시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시간이 있는데, 괜찮다면 그 후속편의 전개 방식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지난 통화 때는 간략하게만 이야기를 나눈 게 조금 아쉬웠달까?”
에로틱 소설의 대가답게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표정이 순식간에 요염함 그 자체로 변했다. 그럼 내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어제 말씀드렸던 부분에 이어서 설명을 드리자면 우선 거품이 가득한 철창 안에서…….”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내가 내뱉는 모든 말은 단지 계약을 위해서다. 그리고 한나 코왈스키, 내 앞에 있는 그녀 본인이 실제로 썼던 내용이다. 그러니 끈적한 눈빛은 제발 멈춰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