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55화 (155/201)

155화 ― 정말…… 이대로 말해도 되는 거니?

* * *

오늘은 3월 25일 금요일.

에르미스에서 ‘366일’을 연재 중인 한나 코왈스키 작가를 컨택한 후 3일이 지났다.

늘 그렇듯, 한 주의 마지막인 금요일이 되자 회사원들의 얼굴에 안도와 희열이 섞인 기묘한 표정이 비쳤다. 한 주간 쌓였던 증오, 환멸, 슬픔, 분노 이 모든 것을 모두 시원하게 배설해낼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한 주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시침이 오후 5시에 걸쳐지자마자, 업무를 마친 출판 본부 매니저들부터 하나둘 퇴근하기 시작했다.

오진아가 대표가 되면서 LGA컴퍼니 급은 아니지만 BS북의 많은 부분이 복지의 많은 부분이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직원들에게 가장 많은 호평을 받는 게 바로 자율출퇴근제의 도입이다.

LGA컴퍼니의 경우엔 원하는 시간에 출근만 하면 무조건 8시간만 업무를 하면 되지만, BS북은 아직 그 정도의 자율성을 주진 않았다. 솔직히 말해 그런 복지를 제공하기엔 직원들의 애사심이나 업무 능력 등이 부족했으니까.

대신 오전 8시에 출근하면 오후 5시 퇴근, 9시면 6시, 10시면 7시에 퇴근하는 식으로 지난 1월부터 진행하기 시작했다.

‘엘가보다 근무 시간도 1시간 더 많기는 하지만, 한 번에 모든 혜택을 다 줄 수는 없지. 맛있는 음식이라도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체하기 마련이니까. 또 맛도 모르면서 꾸역꾸역 먹기만 할 수도 있을 테고.’

LGA컴퍼니는 점심시간도 근무 시간에 포함해 사실상 근무 시간이 8시간이지만, BS북의 근무 시간은 9시간이다.

물론 BS북의 직원들이 바뀐 제도에 적응하고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는 성과를 보인다면 언제든지 복지를 더 늘릴 예정이다. 능력 있고 믿을 수 있는 직원이라면 평생 재택근무를 제공할 생각도 있고.

“매니저님 바로 집 가세요? 간만에 통장도 두둑한데 한잔 하고 가실래요?”

“크으, 좋죠. 안 그래도 오늘은 사치를 부리고 싶은 느낌이었어요. 그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플렉스랄까? 합정 근처에 항정살 맛집 생겼다는데 가실래요?”

“항정? 지금 돼지를 먹겠다고요? 연봉도 오른 오늘같은 날에? 소 한 마리 잡으러 가시죠.”

“크흐흐, 그렇네요. 가시죠!”

그리고 5시 퇴근하는 매니저들이 저렇게 들떠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오늘이 지난달에 진행했던 개인별 연봉 협상을 토대로 새롭게 산정된 월급이 처음으로 지급된 날이기 때문이니까.

물론, 모두가 웃는 건 아니었다.

회사라는 울타리 안에서도 홀로 고독한 외딴 섬을 만들어 음울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사람도 존재했기에.

“하아……. 퇴근할 거면 그냥 입 다물고 빨리 가면 안 되나? 더럽게 쫑알거리네, 쯧.”

그리고 칙칙한 오우라를 뿜어내는 이는 당연히 판무 1팀의 이름뿐인 파트장, 조팟놈이었다.

그동안 지속적인 참교육을 받았으면서도 뚝심 있게 싸가지 없이 구는 걸 보니 아직도 조팟놈을 갈굴 일이 넉넉해 보여 마음이 풍족해지는 기분이다.

“조팟님, 한 주 고생하고 퇴근하시는 분들한테 말이 너무 공격적이시네요? 심지어 그렇게 방해될 정도로 크게 말하신 것도 아닌데요?”

만에 하나 지나치게 큰 소리였다면 나도 괜히 조팟놈에게 뭐라 하진 않았을 테다. 내가 조팟놈을 달갑지 않게 보는 건 200% 진실.

하지만 이곳은 회사다.

그리고 회사란 사람을 후려 패는 곳이 아니기에, 마땅한 명분 없이 괜한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실제로 지금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말하던 판무 1팀 매니저들의 속삭임보다 조팟놈이 마치 들으라는 식으로 중얼거린 찡얼거림의 데시벨이 더 높기도 했고.

“예? 아니 그게…… 자기들 먼저 퇴근한다고 남아 있는 직원들 배려는 안 하고 일부러 저렇게 떠드는 건—”

“그건 조팟님의 생각이죠. 그 누구도 일부러 저렇게 떠든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퇴근하니까 기분 좋아서 같은 팀원들끼리 이야기 나누신 거지. 그리고 누가 봐도 조팟님이 투덜거린 소리가 더 컸어요. 아, 혹시 제 목소리가 더 작았는데요? 같은 말 할 거면 꺼내지도 마요. 아예 녹음이라도 해서 들려드릴 테니까.”

“…….”

조팟놈만 들릴 정도로 작고 조곤조곤 건넨 말에 조팟놈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몇 주 전, 황건일 매니저에게 괜한 꼰대짓을 하다가 내게 걸린 후 진행했던 참교육의 효과가 아직 남아있긴 한 모양이다.

“지난 3월 1일이었죠 아마? 그때 조팟님한테 분명히 말씀 드렸을 텐데요.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고.”

“……주의하겠습니다.”

“네, 주의 좀 해주세요, 제발. 제가 늘 지켜보고 있으니까요.”

“……네.”

비록 여전히 버퍼링이 조금 있긴 하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대답도 하고, 정말 조팟놈이 처음 내 팀원으로 왔을 때와 비교하자면 장족의 발전이긴 하다.

‘아이고 우리 조팟님, 입에 경련 일어나려고 하네. 그동안 네가 갈궜던 직원들이 느꼈을 감정, 고스란히 겪어보십쇼.’

매분매초 바쁜 내가 굳이 귀한 시간을 써가며 조팟놈을 일부러 갈구고 싶진 않다. 하지만 조팟은 억센 야생 잡초같은 놈.

밟고 또 밟아도 잠시 한눈을 팔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우뚝 일어서는 굳센 놈이기에 이렇게 주기적으로 밟는 루틴을 업무 시간에 껴둬야만 한다.

‘조팟놈이 왜 저러는지 이해가 가긴 하지. BS북 전직원 중에 연봉 인상이 아예 안 된 놈은 조팟놈이랑 운영팀 이형석 팀장 단 둘밖에 없으니까.’

조팟놈이야 그냥 눈치도 그렇고 전반적인 능력이 함량 미달인 놈이기에 월급 삭감을 하지 않는 게 다행인 상황.

그리고 운영팀의 이형석 팀장은 자타공인 똥꼬핧기 전문가. 구한말에 태어났다면 그 누구보다 앞장서 세 치 혀로 나라를 팔아먹었을 간신배 같은 놈이다.

한우석이 있을 때는 한우석. 강경진이 있을 때는 강경진. 그리고 이제는 출판 본부장이 된 김동현 팀장에게 빌붙기 시작했다.

물론 곰 같은 여우인 김동현 팀장은 자발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수년간 자신을 뒷방 늙은이 취급했던 이형석 팀장의 접근을 철벽 방어했다.

‘사실 둘이서 짝짝꿍 하시면 함께 묶음 상품으로 보내드리려고 했는데…… 집으로. 그게 조금 아쉽달까?’

BS북에 남아있는 관심병사들을 한 명씩 곱씹는 그때, 책상 위 무선 충전기에 올려 둔 폰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진동하기 시작했다.

“네, 본부장님. 전화 받았습니다.”

전화의 발신자는 권미현 본부장.

BS북과 엘가가 사실상 내 소유가 되고 업무 협업을 명목으로 회사 내에서도 자유롭게 전화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된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급한 일이 아니면 메일이나 카톡으로 연락을 하기에, 전화를 받는 순간 나는 즉시 무언가 급한 일이 발생했다는 생각에 곧장 소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표님, 지금 바로 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시간 괜찮으세요?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이랑 무진 본부장님이 통화 중이신데 대표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아! 연락 왔어요? 지금 바로 갈게요!”

권미현과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곧장 자리로 돌아와 컴퓨터 전원을 끄며 나갈 채비를 했다.

“엘가에 업무 보조할 일이 있어서 가요. 거기서 바로 퇴근할 테니까 먼저들 퇴근하세요.”

“고생하셨습니다, 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네, 다들 주말 잘 보내세요.”

우렁찬 목소리의 황건일 그리고 조팟놈을 뒤로한 채 나는 빠르게 엘가를 향해 뛰었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계약 조건이 안 맞는 게 있는 건가?’

출판 본부장인 권미현이 단풍 삼촌의 도움을 받아 한나 코왈스키 작가에게 에르미스 자체의 컨택 쪽지를 보낸 후 3일 만에 답변이 왔다.

권미현이 연락을 하기 전에 이미 한나 코왈스키 작가가 원하는 모든 조건을 맞춰주라고 명확히 말해뒀었다. 계약금을 원하면 계약금을 넉넉한 선인세를 원하면 선인세를.

‘정산비도 기본 8:2로 맞춰드리라고 했는데. 조건이 부족한 게 있었던 건가?’

심지어 전생에서는 한나 코왈스키 작가가 그녀의 소설 ‘366일’로 는 진행한 적이 없었던 웹툰 제작의 진행 또한 요청했었다. 그렇기에 권미현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는 지금 이 상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발을 바쁘게 놀려 엘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후우…… 후…….”

엘가 임직원 사무실이 있는 3층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혹여나 누가 나를 볼까 봐 착용했던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몇 차례의 심호흡으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단풍 삼촌과 권미현이 있는 대회의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선 평소보다 한층 더 사납게 미간을 잔뜩 찌푸린 단풍 삼촌이 외계어 같은 말을 내뱉는 게 보였다.

“프로세! 니에 예스테시미 오슈스탐. 예스테시미 위다니치트웸 펨 코레이!”

무슨 소리인지는 조금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열변을 토하는 단풍 삼촌이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 통화 중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또한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으로 읽은 단풍 삼촌의 표정을 토대로 지금 통화가 순조롭지 않다는 것도.

“대표님! 여기요!”

그리고 내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한 권미현이 입 모양을 뻥긋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에요 대체? 뭐가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은데? 작가님이 전화 주신 거예요?”

나 또한 권미현이 그러듯 입 모양을 뻥긋거리며 속삭이자 권미현은 살짝 입술을 깨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계약 조건이 적힌 컨택 쪽지를 보시더니 작가님께서 이게 사실이면 전화를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메일 확인 후에 바로 전화를 드린 거고요.”

“사실이면 전화를 달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물음에 권미현은 조금 전보다 더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하아, 그게…… 계속 저희가 사기꾼이 아니냐고 하세요.”

“사, 사기꾼?”

“네. 무슨 보이스피싱 같은 게 아니냐고 자꾸 그러시네요. 아직 몇 화 올리지도 않았는데 자기같이 이름도 없는 신인 작가한테 무슨 조건을 그렇게 후하게 주냐면서요.”

“아니 그게 무슨…….”

“저희를 보이스 피싱범으로 오해하는 것 같아요.”

“보이스 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말문이 막혀온다.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이 의심이 조금 많으신 편인 것 같으세요. 거기다 무진 본부장님 발음이 너무 원어민이어서, 한국인이 아니라 폴란드인 아니냐고 계속 그러시네요. 지금도 우리가 사기꾼이 아니라 한국의 출판사라는 걸 연거푸 설명드리는 중이실 거예요.”

“…….”

이게 참.

난감하면서도 슬프기도 하다.

왜냐면 나는 왜 한나 코왈스키 작가가 지금처럼 회의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알 것 같으니까.

지금 이 시기, 한나 코왈스키 작가는 믿었던 남자친구의 외도로 인해 심적으로 상당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터. 그런 그녀의 경험으로 써낸 소설이 ‘366일’이니 복잡하겠지.

‘이거 이래서는 안 되겠는데. 내가 나서야겠어.’

권미현이 컨택 쪽지를 보냈을 때, 이미 한나 코왈스키 작가에게 우리가 제안할 수 있는 조건은 모두 어필한 상황.

그럼에도 우리를 의심하는 거라면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일 테고.

“미현 본부장님 잠시만 나가 주실래요? 제가 작가님하고 따로 이야기 좀 해보려고요.”

“어…… 네, 알겠습니다.”

내가 한나 코왈스키 작가와 이야기를 한다는 건 결국 단풍 삼촌을 통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권미현은 내가 그녀에게 굳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라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을 테다. 나 또한 지금 내가 권미현에게 하는 행동이 충분히 이상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나 코왈스키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건 내가 그녀가 앞으로 쓰고 싶어 하는 내용을 알려주기만 하면 될 뿐이니까.

“단풍 삼촌, 작가님한테 잠시 실례한다고 하고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의 큰 팬인 편집자가 작가님께 말씀 앞으로의 전개 방향에 관해서 어떤 식으로 집필하시면 좋을지 조심스럽게 제안 드리고 싶다고 말씀 드려줘.”

“어, 알았다.”

다만 권미현 앞에서 그 말을 하기엔 너무 낯이 뜨겁다. 사실 권미현이 아닌 그 누구에게라고 입 밖으로도 꺼내기 어려운 말이 될 터.

단풍 삼촌은 번역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 권미현은 회의실 밖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관능 소설 작가에게 관능 소설의 향후 전개에 관해 설명하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교 사상에 찌든 신토불이 한국인인 내게,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야기 하기엔 허들이 너무 높았다.

단풍 삼촌이 한나 코왈스키 작가에게 실례한다는 말을 하고, 폰을 잠시 무음으로 돌렸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단풍 삼촌을 향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삼촌, 작가님께 내가 지금 말하는 그대로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통역해드려. 할 수 있지?”

“그래, 말해라. 작가님 기다리신다.”

“후우…… 알았어. 우선 현재 회차 끝나고 이어질 다음 에피소드부터인데…….”

그리고 단풍 삼촌 또한 북쪽에서 내려왔지만 유교의 사상 아래서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렇기에 내가 앞으로 이어질 전개에 관해 설명을 이어나갈 때마다 삼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특히 채찍, 얼음, 수갑 등의 단어를 들을 때는 더욱 심하게.

“여기까지야 삼촌.”

“…….”

“뭐 해? 잊기 전에 전달 드려.”

“어, 어. 아, 알았다.”

그리고 내 말을 모두 들은 단풍 삼촌이 다시 전화로 한나 코왈스키 작가에게 말을 옮기기 전.

단풍 삼촌은 눈을 꿈벅거리며 다시 나를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우야…… 이건 아닌 것 같은데. 정말…… 이대로 말해도 되는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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