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54화 (154/201)

154화 – 366일.

* * *

“Dni가 Days, 대표님이 말한 것처럼 366일이라는 뜻이 맞습니다. 아니, 우리 정우 대표님이 폴란드어는 또 언제 공부하셨데?”

남한으로 탈출하기 전 산전, 수전, 공중전은 물론이고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한 단풍 삼촌은 단순히 머리만 좋을 뿐만 아니라 외국어에도 능통한 인재다.

‘366 Dni’를 대뜸 해석한 내 말에 단풍 삼촌이 맞장구를 쳤음에도 권미현 본부장과 지연이는 연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다. 이들은 366일이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만든 소설인지 모르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요. 무진 본부장님도 아니고, 대표님도 외국어에 재능이 있으신 줄은 몰랐네요? 그보다 폴란드에 가서라도 계약을 해야 하는 작가님이라니? 유명하신 분이세요? 필명 검색해도 따로 나오는 건 없던데요?”

권미현이 말과 동시에 웹검색을 진행했다.

하지만 딸칵거리는 마우스 소리와 맹렬한 키보드 타자 소리가 무색하게도, 작가의 정보에 관해 나오는 정보는 없었다.

‘당연히 아무런 정보도 없겠지. ‘366일’로 단숨에 에로틱 소설의 거장이 된 ‘한나 코왈스키’는 자신의 소설이 뜨기 전까지만 해도 최면 치료를 전문으로 하는 심리 상담가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사실을 내가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설 ‘366일’ 그리고 한나 코왈스키 작가가 유명해진 건 현재가 아닌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그렇기에 우선은 둘러대면서 말을 시작해야 할 테다. 내가 아무리 대표직에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설명 없이 무턱대고 작가 계약, 그것도 해외 작가를 계약하라고 권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만 같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사실 저도 아마추어 연재 게시판에 올라온 작품 중에 어떤 게 인기가 있나 하고 모니터링 하고 있었거든요. 그중에 하나가 366 Dni였고요. 구글 번역기 하나하나 돌려서 읽어보긴 했는데,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몰입감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음, 그런가요? 저는 우선 지표만 확인해서 내용은 아직 못 봤어요. 번역팀 매니저님이 번역 완료하시면 한번 살펴봐야겠네요.”

물론 상당한 고수위라는 게 문제다.

366일의 내용은 호텔 관리직으로 일을 하던 여자 주인공이 서른 살 생일을 맞아 남자친구와 함께 이탈리아의 섬으로 여행을 갔다가 마피아 가문의 수장과 사랑에 빠지는 기묘한 이야기.

‘함께 여행을 떠났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면서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되지.’

평범한 로맨스 소설과는 달리 파격적이고 폭력적인데다 자극적이기까지해 19금을 넘어선 29금 소설이라고 불린 역대급 성인 소설. 특히 여자 주인공의 욕망을 생생하고 조밀하게 표현한 것으로 극찬을 받았었다.

따지고 보면 단지 극찬을 받았다는 말로도 부족할 테다. 366일이라는 소설 하나로 메가 히트 작가가 된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작품은 넷플렉스에 영화 시리즈로도 제작이 되었으니까.

‘원래 역사의 흐름대로라면 366일을 출판사에 직접 투고했었을 텐데. 이 대작이 에르미스에 올라올 줄이야!’

강추강 작가의 나 혼자만 상하차가 한반도를 들끓게 만들고 웹툰으로 제작된 후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366일은 그 성과를 아득히 뛰어넘는다.

웹툰이 터지고 나서야 세계적인 인기를 받은 나혼상과 달리 366일은 소설 자체만으로도 전세계적인 뜨거운 열기를 얻었으니까!

“오? 그 정도입니까? 번역팀 매니저님 시킬 게 아니라 다 모인 김에 제가 바로 읽어 드리죠. 제가 폴란드어도 좀 하는 편이니까요.”

밀려드는 흐뭇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데, 단풍 삼촌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건넸다.

“아니, 다들 바쁘실 텐데…….”

“대표님께서 지금 바로 컨택하라고 하는 거면 지금 다 모여있을 때 내용 확인하는 게 좋겠죠. 지금 바로 화면 켜드릴게요.”

“그아하하. 그럼 화면 켜 주시죠. 지금 바로 읽어보겠습니다. 어디 보자아.”

잠깐, 그걸 지금 여기서?

그리고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권미현 본부장이 366일 화면을 켰고 단풍 삼촌은 빠르고 정확한 어조로 화면을 죽죽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음, 전개나 서술을 상당히 매끄러운데요? 웹소설하고는 결이 좀 다르지만 주연, 조연 캐릭터도 모두 입체적이고 좋네요.”

“그아하하, 좋습니다. 계속 읽어보도록 하죠. 크흠, 흠. 내가 납치한 건 맞아. 하지만 널 강제로 가질 생각은 추호도 없어. 그러니 나와 사랑에 빠질 충분한 시간을…….”

놀라울 정도로 매끄러운 번역 솜씨임에도,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읊는 단풍 삼촌의 목소리는 쉬이 몰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더 큰 문제는 이제 곧 366일의 명대사인 ‘아기 고양이, 길을 잃었니?’와 함께 파격적인 정사씬이 시작될 거기 때문이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한나 코왈스키 작가를 컨택하라는 내 말을 진행하기 위해 권미현 본부장이 366일의 내용을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단풍 삼촌과 권미현 본부장 그리고 지연이는 전혀 모르고 있다. 366일이 왜 19금 도서가 아니라 29금 도서라고 불리는지를.

“……밧줄로 묶고 촛농을……… 크흠, 흠.”

파격적인 정사씬을 읊어나가던 단풍 삼촌은 점점 당황으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일도 일이지만 일단 삼촌을 구제해 줘야 할 것 같다.

“거기까지만 읽어주셔도 될 것 같네요.”

“예에. 대, 대략적인 건 여기까지만 확인해도 좋을 것 같군요. 나머지 부분은 번역팀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것 같습네다.”

“흐음, 괘, 괜찮네요.”

“하하…… 수위가 조금 세긴 해도 좋은 작품이네요.”

“…….”

당황스러운 나머지 단풍 삼촌의 입에선 고향 방언까지 세어 나왔다.

366일은 한나 코왈스키 작가가 연인과의 이별을 계기로 집필하게 된 자전적인 소설. 한나 코왈스키 작가는 연인에게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이 글을 쓰기 시작했기에 여성적인 성적 환상을 더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었다.

나와 단풍 삼촌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또한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366일은 처음 접한 독자가 충분히 당황할 수 있을 법한 파격적인 내용이었으니까.

“상당히 고수위이긴 하지만 대표님께서 왜 컨택하라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가네요.”

모두가 어색한 침묵 짓는 사이 권미현이 홀로 눈빛을 빛내며 정적을 깼다. 그녀 또한 볼터치를 한 것처럼 볼이 발그스름해졌지만 우리 셋처럼 많이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는 모양이다.

확실히 출판 본부를 맡는 본부장이어서일까, 적나라한 19금 소설도 많이 접한 탓인지 우리보다는 더 면역력이 높은 프로다운 자세였다.

“흐흠. 예, 그렇죠. 이정도로 흡입력 있는 소설이면 폴란드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을 게 분명할 겁니다.”

그리고 권미현의 프로다운 자세에 나도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미현 본부장님은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한테 최대한 빨리 컨택해주시고 최대한 작가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에 맞춰주세요. 선인세든 계약금이든 작가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가능한 모두 지급해드리고요.”

“네, 대표님. 하지만 컨택하기 전에 모든 내용을 빠르게 다 확인해 봤으면 좋겠는데요, 실수가 없도록요. 무진 본부장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예? 저요? 제가 무슨 도움을……?”

갑작스러운 권미현의 소환에 이제 막 정신을 차린 단풍 삼촌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권미현은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호랑이처럼 눈을 매섭게 빛냈다.

“지금 해주신 것처럼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이 올려주신 나머지 글 부분도 읽어주실 수 있으신가 해서요. 번역팀은 지금 맡은 업무가 있어서 당장 도움을 받기가 어렵기도 하고, 대략적인 내용만 빠르게 확인하려는 거여서 무진 본부장님이 바로 번역해서 말해주시는 게 가장 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아하하…… 제가 통번역을 조금 하긴 하지만 전문가는 아닌지라…….”

“어머? 무슨 소리세요 본부장님? 언어 천재시면서. 오늘 이것보다 바쁜 일정 있으세요? 대표님이 급하다고 하시는 업무인데?”

“예? 그건 아니지만…….”

당황의 기색으로 물든 단풍 삼촌이 나를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 눈빛은 권미현의 강렬하면서도 따끔거리도록 뜨거운 시선에 의해 가로막혔다.

“대표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무진 본부장님 급한 일 없으시면 제가 도움 좀 받았으면 좋겠는데요.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계약을 위해서요.”

“어 그건…….”

본부장님들 일정 맞춰서 알아서 하시면 될 일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시선을 나를 향해 돌린 권미현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가득 담긴 무언의 압박을 보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네, 무진 본부장님께서 시간 괜찮으시다면, 아니, 가능하면 미현 본부장님을 도와주시죠. 한나 코왈스키 작가님 계약은 가급적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니까요.”

“어머, 잘 됐네요. 무진 본부장님, 그럼 저희는 먼저 일어나도록 하죠. 컨택 보내고 바로 답변 드릴게요.”

“으어…… 어? 대, 대표님?”

‘……미안해 단풍 삼촌. 구해주지 못해서.’

비록 미현 본부장의 흑심이 가득 낀 게 사실이긴 하나, 한나 코왈스키 작가를 놓치면 안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현재 웹월드를 뜨겁게 달구기 시작한 강추강 작가의 나 혼자만 상하차의 웹툰이 나오면 마른 장작을 가득 쑤셔 넣고 기다리고 있는 에르미스가 활활 타오를 터.

하지만 거기에 한나 코왈스키 작가의 366일까지 더해진다면 장작불 정도가 아닌 폭발 수준일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권미현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질질 끌려가는 단풍 삼촌을 질끈 감은 눈으로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후훗, 무진 본부장님은 아직 미현 씨 마음을 모르나 보네?”

어느덧 우리 둘만 회의실 안에 남게 되자 지연이는 눈가를 초승달처럼 휘며 귀엽게 미소 지었다. 업무 시간이 순식간에 달콤함이란 마법으로 뒤덮이는 순간이다.

“지연 본부장님, 업무 시간에는 집중해주시죠.”

“아…… 죄송해요, 대표님.”

짓궂은 농담에 지연이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오자 슬쩍 옆으로 다가가 회의실 책상 아래로 지연이의 손을 슬쩍 감쌌다.

“장난이야.”

“피이, 뭐야아.”

권미현이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지연이와 내가 만나게 된 사랑의 오작교 업무를 수행한 사람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권미현의 업무 효율을 위해 이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냐는 생각이 들긴 한다. 필요하다면 폴란드 출장도 둘이 같이 보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데 대표님.”

“응?”

여전히 손을 조물거리는 내게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지연이가 업무적으로 따로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다.

“366 Dni가 계약 되면 웹툰화도 그럼 바로 진행해야 하나? 나 혼자만 상하차와 같이 런칭하는 건 힘들어도 지금 당장 시작하면 올해 안에 런칭은 시작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어……? 웹툰화?”

어른들의 동화 366일.

원작인 소설 그리고 영화로도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그 작품은 웹툰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응, 19금이라 연재 가능 플랫폼 수는 적겠지만 현대 배경이라 반응이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왜? 별로야?”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366일은 전생에도 웹툰 혹은 만화로 제작된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연이의 말처럼 만들지 못할 이유는 없다. 미래는 내가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바뀔 수 있을 테니.

“꺄악, 왜 그래에! 누가 보면 어쩌려구!”

“우리 지연이가 정말 복덩이네. 계약 되면 진행해보자. 웹툰화.”

기습적으로 건넨 볼뽀뽀에 지연이의 귓볼이 새빨개졌다. 외모도, 마음도 그리고 업무적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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