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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53화 (153/201)

153화 ― 폴란드에 직접 가는 일이 있더라도.

* * *

“큰일 났다니? 무슨 일이길래 그래?”

지연이와 권미현이 각자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간 것을 확인했음에도 단풍 삼촌은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미현 본부장이 퇴사할 것 같다.”

“……엥? 그게 무슨 소리야? 삼촌 무슨 짓 했어?”

“간나야! 내가 하긴 뭘 하니? 이상한 건 미현 본부장이디!”

“아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뜬금없는 말이었다.

또다시 주위를 살피던 단풍 삼촌은 거대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미현 본부장 말이디, 이번에 브루나이 출장 가기 전부터 행동이 상당히 묘했다. 보통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수상쩍지 않냐?”

“그러니까 뭐얼? 뭘 했는지 말해야 내가 지레짐작이라도 하지.”

단풍 삼촌은 연거푸 짙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나갔다.

“미현 본부장이 사람은 좋은데 인상이 그 뭐랄까…… 좀 차가운 인상이지 않냐? 그런데 출장 한 일주일 전쯤인가? 아! 그래! 그때다! 설 연휴 지나고 나서부터!”

“음?”

“연휴 끝나자마자 미현 본부장이 자꾸 나만 보면 웃더라 이 말이디! 하루 이틀은 그냥 무슨 좋은 일이 있나 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계속 그러더라.”

뜨끔.

설 연휴 지나고 나서부터라.

권미현이 내게 단풍 삼촌을 좋아한다고 이실직고했던 그때부터인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중간에서 뭐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상황이기에 나는 잠자코 단풍 삼촌의 이어질 말을 기다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하…… 뭐, 웃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 어쩌면 삼촌한테—”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브루나이 출장 갈 때까지 계속 그러니까 분명 나한테 불만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보통 싫은 사람 앞에선 내색 안 하려고 더 티를 안 내고 하지 않냐 이 말이디.”

“…….”

단풍 삼촌이 제대로 헛다리를 짚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으로 읽은 단풍 삼촌의 눈빛이 워낙 확고해 잠자코 말을 듣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에르미스 베타 오픈하느라 워낙 할 일도 많고 정신없고 하니까 업무가 너무 과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 여하튼 출장 이틀 전에 먼저 도착했잖아? 그래서 도착 첫날은 시간도 좀 늦었고 해서 푹 쉬라고 했지.”

작게 속삭이던 단풍 삼촌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어진 단풍 삼촌의 말을 종합해보자면 브루나이에 도착한 첫날, 권미현이 단풍 삼촌의 방으로 찾아와 술 한잔을 하자고 했다는 설명이었다.

“어? 브루나이 술 반입되는 거야? 이슬람 국가여서 술 담배 아예 팔지도 않는다며?”

설명을 듣다 의아해 물은 말에 단풍 삼촌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국 내에서는 안 팔지. 나도 몰랐는데 비무슬림 관광객은 병술 2병이나 맥주 12캔까진 가져올 수 있나 보더라. 담배도 한 보루는 세금 따로 내면 가져올 수 있고.”

“아…….”

그걸 미리 알아보고 술을 챙겨간 권미현이 대단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옅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단풍 삼촌은 출국 심사 때 권미현이 작은 케리어 하나를 건네줬다는 말을 했다. 인 당 반입 가능한 주류 수가 있어서 단풍 삼촌에게 건네준 케리어에는 맥주 12캔과 담배 한 보루가 들어있었다는 말과 함께.

“여하튼 오픈 축하 기념으로 간 거기도 했고 첫날에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미현 본부장이 따로 챙겨온 와인 2병이랑 맥주 2캔을 그날 다 깠다.”

“그때 무슨 이야기 나왔어?”

설마 그때 권미현이 단풍 삼촌에게 고백이라도 한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단풍 삼촌이 지금 이렇게 고구마 100개를 먹은 것처럼 답답한 말을 하진 않았을 테다.

“그냥 세상 사는 얘기부터 회사 얘기 등 시시콜콜한 얘기였지.”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데? 미현 본부장님이 잘 웃고 하면 좋겠구만? 별 이상한 말 했다는 것도 아니고.”

“그래, 그래서 이상한 거다. 그날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미현 본부장이 뜬금없이 묻더라고. 담배 피는 여자 어떻냐.”

“그래서?”

“기호식품이니 남자든 여자든 피는 게 딱히 문제가 있겠냐고 했지, 다만 건강을 생각해서는 안 피는 게 좋지 않겠냐고 했고.”

단풍 삼촌이 왜 저렇게 말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인의 보육원에선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서 우리 구광적 원장님께서 삼촌들 모두에게도 절대 금연을 강조하니까.

“그런데…… 그날 이후로 갑자기 담배를 끊었다 이 말이디!”

“어? 미현 본부장님 금연 시작하셨어?”

“그래! 그날 말한 직후 바로! 두 보루나 챙겨온 담배는 모두 주무부처 한국 직원들한테 선물로 건네주고!”

“오……. 장난 아닌데.”

단풍 삼촌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늘 미팅 때도 그렇고 얼마 전부터 권미현 본부장의 몸에서 옅게 풍기던 담배 냄새가 이제 조금도 나지 않는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단 한 번에 담배 끊은 사람은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을 권미현은 단번에 해낸 것이다. 단풍 삼촌에게 잘 보이겠다는 이유 단 하나만으로.

‘참나…… 이 양반은 아예 감도 잡지 못하고 있네.’

다만 권미현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는 단풍 삼촌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은 게 분명하다.

“하아, 삼촌. 괜히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일이나 합시다. 나 먼저 일어날게.”

“가긴 어딜 가니 간나야! 이거 기류가 이상하다 안 하니?”

“미현 본부장님 퇴사할 사람 절대 아니니까 괜한 소리로 시간 뺏지 마. 오늘 화이트 데이니까 선물이나 하나 챙겨드려.”

“화이트 데이? 그아하하, 젊은 애들이나 하는 그런 남사스러운 짓을 뭐 하러—”

“아, 쫌! 하라면 해. 삼촌도 올해 서른밖에 안 됐으면서 뭔 아저씨 행세야.”

“정우야! 야, 인마!”

헛다리를 제대로 짚은 단풍 삼촌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단풍 삼촌이 나를 애타게 불렀다. 정말 이 아저씨를 어찌해야 좋을까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서게 된다.

“삼촌, 만약에 말이야. 회사 내에서 누가 삼촌 좋아한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

“뭐? 그아하하하! 우리 정우 개그가 많이 늘었구나야. 성스러운 직장에서 연애는 무슨? 어디서 핵 터지는 소릴 하고 앉아 있네?”

그러면 그렇지.

단풍 삼촌은 권미현이 진을 좋아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회귀 전에도 내가 알기론 계속 솔로 생활을 이어 나갔다고 했으니까.

“만약 내가 누굴 만난다면 윤선미 작가님이나—”

“어휴, 진짜 싫다. 삼촌, 괜한 소리 말고 미현 본부장님한테 선물이나 잘 챙겨 드려. 화이트 데이라고 눈치 없게 진짜 사탕 같은 거 사주지 말고.”

“아니, 아까부터 먼 화이트 데이 선물 같은 소릴 하는 거야? 그럼 지연 본부장은?”

지연이를 왜 삼촌이 신경 써?

내 여자는 내가 챙겨야지.

“지연 본부장님은 내가 따로 챙길 테니까 걱정 말고. 그리고 선물이니까 법카 말고 삼촌 개인 돈으로 사서 드려. 퇴사할 게 걱정되는 거면 동료애 좀 보이면 좋잖아? 이왕이면 꽃도 좀 같이 사서 건네주고.”

“꽃은 무슨? 아니 평소에는 법카 아무 때나 쓰라면서…… 야! 정우야! 인마!”

지난 생에서도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단풍 삼촌은 아무래도 쏠탈의 각이 보이지 않는다.

‘미현 씨, 고생하세요. 여하튼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 * *

오늘은 3월 22일 화요일.

단풍 삼촌의 헛소리가 있은 뒤로 한 주가 더 지났다. 그리고 오늘은 에르미스 베타의 출시 한 달이 되는 의미 있는 날이다.

“그아하하! 지난 한 달간 에르미스 베타는 별다른 오류 없이 순항 중입니다. 아직 베타 버전이지만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일본 만화의 번역 서비스 그리고 쉬운 결제 방식 등으로 독자 사이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고요.”

그리고 엘가 3층 임원 전용 회의실에서 단풍 삼촌은 기쁜 마음을 너털웃음으로 마음껏 표현했다.

“크흠, 미현 본부장님? 출판 본부 관련도 이어서 설명해주셔야죠?”

“아, 네.”

비롯 웃음일지언정 사악하기 그지없는 단풍 삼촌의 얼굴을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지긋이 바라보던 권미현을 향해 헛기침을 하자 그녀는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빔프로젝터 화면을 넘기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무진 본부장님 말씀처럼 벌써 에르미스 베타 출범 한 달째가 되었네요. 에르미스 베타가 웹툰 기반 플랫폼인 게 강조됐기에 웹소설 부분은 딱히 강조되어 있지 않죠.”

에르미스 베타에서는 만화뿐만이 아니라 일부 소설에서도 유료 서비스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웹소설처럼 회차별 금액이 정해진 게 아니고 단행본처럼 권 별로만 구입이 가능한 시스템으로 적용되어 있다.

‘심지어 대부분 순문학에 가까운 소설들이지. 최신 소설들도 많이 없고.’

다국어로 번역된 일본 만화를 쉽고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게 에르미스의 강점이자 지난 한 달간 홍보팀에서 주력으로 홍보 한 부분이었다. 그렇기에 유료화 서비스가 시작된 소설의 매출은 상당히 저조한 게 현실이다.

“하지만 베타 서비스 한 달째가 된 오늘부터는 웹소설 부분도 정기적으로 소배너를 통해 홍보를 진행하기로 했어요. 아마추어 작가 연재란은 참여 작품 수가 아직은 저조하지만 점점 입소문을 타면서 종수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고요.”

에르미스에선 아마추어 웹툰 작가 게시판이 있는 것처럼 각 언어별로 아마추어 소설 작가 게시판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에르미스에 소설을 읽으러 접속하는 독자들의 수는 적을 수밖에 없지만 예상보다 작가들의 참여률은 높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웹소설 기준으로 최소 1권 분량인 25화 이상을 연재한 아마추어 작가들을 대상으로 종이책 출간을 돕는 서비스를 진행하기로 했으니까.

“해외에서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독자들이 많듯이 작가들도 자기가 쓴 글을 종이책으로 만들기 바라는 분들이 많으시죠. 돈 한 푼 안 들이고 1권 기준으로 종이책 50부 제작 및 출간을 도와주는 서비스를 진행하기로 한 게 예상외로 효과가 큰 것 같습니다.”

“좋네요. 웹툰 본부에서는 프랑서의 니나 작가님 그리고 일본의 치사나 네코 작가님 계약 진행 중이라고 들었는데, 출판 본부에서도 따로 눈여겨 볼만한 작가님들이 계실까요?”

“음…… 아직까지는 없는 것 같아요. 대부분 분량조차 오락가락하는 분들이 많아서 정식 연재를 염두하기에는 시기상조일 것 같아요. 그나마 폴란드 작가님 한 분의 글이 괜찮은 반응을 보이고 계신데…….”

권미현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반응이 있으면 좋은 거 아니에요?”

“네, 그렇긴 한데 하필 이 글이 19금이어서요.”

“성인용이에요? 흠…….”

권미현이 왜 곤란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간다. 에르미스는 궁극적으로 온라인을 통해 웹툰과 웹소설을 보는 걸 대중화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사이트다.

그렇기에 아직 자리가 잡히기도 전에 일명 ‘꾸금’소설이라 불리는 성인용 소설이 인기를 얻는 것은 우려되는 점이었다.

“모니터링 외주 분들한테 수위 확인할 수 있게 주의 부탁드리고요. 그럼 다음 안건으로…… 잠시만, 지금 어디라고요? 폴란드?”

뇌리를 강타하는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설마 하는 생각에 마른침이 꿀꺽 삼켜진다.

“아, 그 작가님 국가요? 네, 폴란드 맞으신데 왜—”

“제목! 제목이 뭐예요?”

“제목이요? 폴란드어로 되어있어서 저도 확인해봐야 해요. 잠시만요.”

빔프로젝터에 연결된 화면으로 권미현이 마우스를 딸칵거리고 휠을 드르륵거리며 폴란드 웹소설 게시판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가장 상단에 있는 제목을 보고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네요. 366 Dni. 이게 무슨 뜻인지는 직원한테 확인해서—”

“Days.”

“네?”

“Days라는 뜻이에요. 미현 본부장님. 저 작가님 바로 잡아야 합니다. 폴란드에 직접 가는 일이 있더라도.”

어른들의 해리포터라 불렸던 전설의 성인 도서.

‘366 Days’가 에르미스에 올라와 있다.

이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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