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에르미스 베타 서비스 오픈.
* * *
“슬라맛 다땅 케 브루나이 다루살람.”
“젬비라 베르줌파 라기!”
“사야 아칸 줌파 아왘 덴간 카라 이니.”
“하하, 떼리마 카시히 아타스 라야난.”
“미스터 리! 그레잇 투 시 유 어게인!”
“라이크와이스, 미스터 완! 잇이즈 언 어너 투 인트러듀스…….”
조팟놈과 황건일 매니저의 연봉 협상이 끝나고 한 주가 더 흘렀다. 그리고 2월 22일 월요일인 오늘, 드디어 ‘에르미스’의 베타 서비스 오픈을 하게 되었다.
“와아…… 무진 본부장님, 외국어 하시는 모습 보면 정말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무슨 말인지는 전혀 모르겠는데 완전 멋져요!”
“하하, 정말 제가 봐도 그러네요.”
브루나이의 수도 반다르스리브가완.
단풍 삼촌과 권미현 본부장은 오늘 00시에 아무 탈 없이 무사히 오픈한 에르미스 베타 서비스의 축하연 참석을 위해 그곳에 가 있다.
국가 사업이니 만큼 한국 정부 관계자와 브루나이 정부 관계자 그리고 우리 엘가에서는 단풍 삼촌과 권미현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인터넷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외국어로 쏼라쏼라 거리는 단풍 삼촌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분위기 상 브루나이 정부 관계자가 브루나이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 같고, 단풍 삼촌은 함께 동행한 권미현 본부장을 소개하는 모습이다.
브루나이와 한국의 시차는 1시간.
에르미스의 런칭 축하연이 열리는 브루나이의 시간은 오후 5시 그리고 지금 LGA컴퍼니 3층 회의실에서 이 광경을 인터넷 생중계로 지켜보는 한국은 고작 오후 6시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일깨워 진 것처럼 신경이 바짝 곤두서있다. 회의실에는 나 뿐만이 아니라 이지연도 함께 있었으니까.
“방송으로 보는 거지만 진짜 멋져요! 브루나이 국왕이 돈이 그렇게 많다면서요? 새해에 국왕에게 인사를 하러 가면 세뱃돈을 준다고 하던데요?”
원래라면 대외적으로 LGA컴퍼니의 대표인 이지연 본부장 또한 함께 동행하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지연 본부장은 나 혼자만 상하차의 웹툰 제작 그리고 정명진 디렉터 관리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회의실에서 나와 함께 영상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하…… 네. 그렇죠. 의료비, 주거비도 형식적인 소정의 금액만 내면 되는 이세계 같은 나라이니까요. 학생들도 원하면 해외 유학을 얼마든지 시켜준다고 하고요.”
“풍경도 건물도 다 어~엄청 아름답다고 하는데, 술, 담배를 파는 곳이 없어서 미현 본부장님이 엄청 고생이시래요, 후훗. 어? 근데 대표님 땀을 왜 이렇게 흘리세요? 어디 아프시기라도―”
“아하하! 아, 아니에요. 난방이 좀 센가? 저 물 한잔 만 마시고 올게요.”
“여기 음료수 있는데요?”
“아, 화장실! 화장실 가서 세수 좀 하고 오면 될 것 같아요, 하하하.”
나는 되도 않는 변명을 하며 회의실을 황급히 빠져나와 칫솔을 챙겨 화장실로 도망쳤다.
치키치키차카차카!
얼마 전 권미현이 했던 괜한 말 때문인지 그 후로부터 이지연이 계속 신경이 쓰인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특히 지금처럼 단둘만 있는 순간엔 숨조차 함부로 내쉴 수 없었다. 내가 내뱉은 숨결이 그녀를 더럽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밀려드는 상념을 지우기 위해 밝게 빛나는 애꿎은 치아를 계속해서 닦고 또 닦고 찬물로 얼굴을 적셨다.
“미치겠네…….”
그럼에도 내 얼굴을 더위를 먹은 사람처럼 화끈거렸다. 브루나이 정부는 술도 안 마시면서 무슨 행사를 하필이면 저녁에 하는지 애꿎은 브루나이 정부 탓을 하며 나는 다시 회의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표님! 얼른 오세요! 지금 무진 본부장님하고 미현 본부장님 상패 수여식 중이에요!”
“아, 그래요? 어디 무진 본부우…… 어어?! 지연 본부장님!”
회의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빔프로젝트 화면에 송출되는 영상을 향해 시선을 옮기기 전, 나는 이지연의 손 앞에 놓인 병을 보고 경악했다.
“뭐, 뭐하시는 거예요? 술은 어디서 났어요?”
“헤헤, 탕비실 냉장고에서 꺼내왔죠. 미현 본부장님이 브루나이에서는 술 못 마시니까 자기 대신 꼭 마셔달라고 했거든요. 그리고 이제 업무 시간도 지났잖아요? 지금 야근하는 건데 설마 술 마시면 안 된다, 그런 말 하시는 건 아니죠?”
내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면서 열을 식히던 시간이 그렇게 길었던 건가? 장난스럽게 새초롬한 표정을 짓는 이지연의 볼이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다. 그녀의 손에는 버니니 스파클링 와인이 이미 반병 가량 비워져 있었고.
‘미현 씨……. 이런 거였습니까?’
얼마 전 강남 재즈 바, 플랫나인에서 권미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잘 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었다.
다는 그런 사람이 없다며 한사코 거절했었는데, 권미현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었지.
‘그게 이지연에게 술을 먹이는 것일 줄이야.’
당했다는 생각이 가득 밀려들지만 이미 돌이킬 수는 없다. 당장이라도 위세척을 시키는 게 아닌 이상 터무니 없는 극소량의 알콜로도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이지연을 막을 방법은 없을 테니까.
“짜안~ 대표님 거도 가져왔어요. 마셔요, 얼른!”
“저는…….”
“뭐예요? 미현 본부장님 말이 사실이었네.”
“예? 그게 무슨……?”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민 이지연이 볼멘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에르미스는 우리 LGA컴퍼니의 숙원 사업이었잖아요! 이 날은 무조건 축하해야 하는 건데, 설마 오늘 같은 날에 대표님이 축하 안 해주는 거면 진짜 너무한 거라고요! 대표님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너어무 해요! 너어무 해!”
“…….”
이지연이 술을 못 마시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버니니 반병에 이렇게 취해버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짠 하죠.”
“짜안~! 에르미스를 위하여어!”
“……위하여.”
모든 일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지연의 말처럼 에르미스는 우리 엘가의 숙원 사업. 몇 년 내로 거대한 공룡처럼 모든 걸 독식하고 집어 삼킬 거대 플랫폼들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이지연이 아무리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해도, 그녀의 말처럼 오늘만은 축배를 드는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도 좀 드시면서 드세요. 그래야 빨리 깨요.”
“푸후훗, 술을 누가 깨려고 마시나요? 취하려고 마시지? 안 그래요?”
“알겠으니까 물 좀 마셔요.”
“피이, 물은 맛 없는데에.”
권미현의 권모술수에 걸려 이런 상황이 되었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물은 엎질러 졌고 내가 해야할 건 그녀의 정신을 온전히 차리게 하는 거니까.
“후훗, 행사가 이제 다 끝났네요. 아 재미있었다.”
“……그러게요.”
원래는 1, 2시간 정도면 끝날 거라고 했었는데, 3시간이나 지속될 줄이야.
하지만 각 정부기관의 사람들이 한번 연설을 시작할 때마다 시간이 쭉쭉 늘어나더니 결국 한국 시간으로 오후 9시가 다 되어서야 모든 행사가 마무리 됐다.
그나마 다행인 건 버니니 한 병을 다 마시고 헤롱거리던 이지연의 취기가 거의 사그라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녀의 볼은 여전히 불그스레했지만.
“고생하셨어요 지연 본부장님, 뒷정리는 제가 마무리 하고 갈 테니까 먼저 들어가세요.”
“두세요. 내일 제가 정리하면 되니까요.”
“아니에요. 먼저 들어가세요. 저는 집도 바로 옆……. 아, 죄송합니다.”
미친놈인가.
내 스스로에게 욕설이 내뱉어진다.
회의실 빔프로젝터 선과 술병과 음료 등을 치우다 서로의 손이 살짝 부딪힌 상황.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으면 됐을 것을, 굳이 바보 같은 말을 꺼내 분위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든 이 상황을 자책하게 된다.
“대표…… 아니 정우 씨. 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요.”
“……?”
사과의 말과 함께 슬쩍 내빼던 손 위로 이지연의 작고 하얀 손이 포개졌다. 다시 숨이 멈춰졌다.
이지연의 작고 연약한 손.
뿌리치려면 당장이라도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죄송해요.”
“……예? 그게 무슨……?”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나를 보며 이어진 그녀의 말에 내 손은 책상에 달라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내 몸 또한 찌르르한 전류에 휩싸인 듯 옴짝달싹 하지 않았고.
“대표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을 텐데…… 죄송해요. 회사에서 사적인 감정이 들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그런데…….”
이지연의 말이 흐려지며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뒷말을 듣지 못했음에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나도 알고 있다.
이지연은 모르고 있을 테다.
이번 생에도 그리고 이전의 삶에서도 억지로 꾸역꾸역 누르고 숨겼겨왔던 내 마음이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아직은…… 아직은 아니야.’
본격적인 정상 궤도에 진입한 궤도와 달리 BS북은 앞으로도 바뀌어 나가야 할 게 수없이 많다. 플랫폼 사업 역시 고작 오늘 베타 서비스를 오픈했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그녀를 만나기 위한 최적의 상황이 아님은 나도 그리고 그녀 또한 분명히 알 테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더는 기다릴 수가 없다.
“좋아합니다.”
“……?”
지금 내 순간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내가 마음에 품은 사람의 용기를 더는 모른 척하기 싫었으니까.
“저, 정우 씨…….”
질끈 물었던 이지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그녀의 입가 주위로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더 빨리 눈치채지 못해 미안했다, 나도 사실 당신을 좋아했다같은 부연 설명은 하지 않았다.
단지 내 손등 위에서 옅게 떨리는 그녀의 손바닥을 향해 내 손을 뒤집어 돌려 그녀의 손을 잡을 뿐이다.
“좋아해요, 지연 씨.”
그녀를 향한 마음을 내비치는 말과 함께.
“…….”
“…….”
이지연도 그리고 나도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둘에겐 더 이상의 말이 필요하진 않았다. 내 말이 이어짐과 동시에 내 손안에 포개진 그녀의 작은 손이 살며시 감싸 안았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내 곁으로 다가왔다.
살포시 감은 눈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