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48화 (148/201)

148화 ― 제가 도와드리겠다고요.

* * *

약속 장소 인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문을 열자마자 송곳 같은 추위가 밀려들었다.

“후우, 후. 아직도 쌀쌀하기는 하네.”

아직은 동장군(冬將軍)이 기승을 부리는 2월 초.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시린 칼바람이 따스했던 손을 순간적으로 얼렸다.

그리고 나는 얼어붙은 추위를 녹이기 위해 손에다 하얀 수증기 꽃을 피워내는 김을 뿜으며 약속 장소로 이동했다.

‘음…… 간판 이름은 맞는 것 같은데…… 재즈 바?’

약속 장소는 강남역 인근의 칵테일 바.

아니, 칵테일 바라는 얘기를 듣고 왔는데 입구 안쪽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끼익—

문을 열고 들어가자 웨이트리스가 가벼운 인사를 건네며 내게 미소 지었다.

“플랫나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예약 하셨을까요?”

“예약자 이름은…… 아, 저기 있네요.”

나를 이곳으로 불러 낸 사람의 이름을 말하기도 전에 그녀가 자리에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록 실내 조명은 어두웠지만 나를 향해 슬쩍 미소를 짓는 그녀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흔드는 팔의 휘적임이 무척 역동적이기도 했고.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어요.”

“차 가지고 오셨어요? 술 안 드시게요?”

“대리 불러서 가면 되죠.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요.”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권미현 본부장, 이지연 본부장 그리고 오진아 대표 모두가 내게 연락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저녁엔 그들 중 유일하게 오늘 꼭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다던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

“강남엔 어쩐 일이에요? 평소 가시는 술집 분위기랑도 조금 다른 것 같은데?”

“왜요? 대표님 스타일 아니에요?”

“아뇨…… 그게 아니라, 아까 연락 처음에 연락 주셨을 때는 이자카야라고 하셨다가 칵테일 바에서 보자고 하시더니, 막상 와 보니 재즈 바여서요.”

“어유, 대표님. 일도 좋긴 한데 문화생활 좀 하고 사세요. 여자 마음도 모르면서 말이야.”

“예? 그게 무슨……?”

자리에 앉으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는 권미현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그 때, 그녀가 메뉴판을 들이 밀었다.

“어휴, 됐고. 뭐 드실래요? 칵테일? 아니면 위스키? 여기 와인도 괜찮아요.”

“술은 잘 몰라서…… 미현 본부장님이 알아서 시켜주세요.”

“그럴게요, 그럼. 저기요! 시그니쳐 칵테일 두 개 주세요. 식사 메뉴는…….”

권미현은 저녁 식사 겸 안주로는 수비드 살치살 스테이크 그리고 페이스트리 피자를 주문했다. 바로 눈앞에서 라라랜드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라이브 재즈 연주를 홀린 듯 감상할 무렵, 종업원이 주문한 칵테일을 먼저 가지고 왔다.

“안주 나오기 전에 한잔 할까요?”

“좋죠.”

슬쩍 건넨 권미현의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칵테일을 음미하며 그녀의 말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권미현의 입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라라랜드 분위기 나는 것 같네요.”

“라…… 그게 뭐예요?”

“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생각해보니 라라랜드는 올해 연말은 되어야 출시하는 영화다. 평소와 사뭇 다른 권미현의 태도에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려 했다가 괜한 말이 나온 것 같다.

“아까 고민 있다고 말했잖아요. 아무래도 대표님한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괜히 홀로 당황스러워 하는 내 표정이 웃겼는지, 권미현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다음 말이 이어지길 종용했다.

“우리 LGA컴퍼니 말이에요…….”

매사에 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말꼬리까지 흐리는 권미현의 말을 들으니 절로 마른침이 삼켜진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기에 이런 낯선 장소에서 회사 이야기를 꺼내는지 가득 긴장한 탓에 나는 참지 못하고 칵테일을 목에 쏟아 넣듯이 들이부었다.

“사내 연애 가능한가요?”

“크흡, 커흡…… 네?”

“사내 연애요. 회사 사람이랑 연애해도 문제없냐고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나는 사례가 걸린 듯 헛기침을 내뿜었다. 하지만 권미현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기에 그녀가 장난삼아 하는 말이 아님이 여실히 느껴졌다. 마이크로 익스프레션도 그녀가 진실된 감정이라는 것을 말해줬고.

“어…… 그런 부분은 고민해 본 적이 없긴 한데.”

“……?”

“으음, 괜찮지 않을까요? 우리 LGA컴퍼니가 아이돌 기획사도 아닌데 직원들끼리 연애하겠다는 걸 막는 건—”

“그래요? 정말이죠?”

“예에? 뭐, 그렇죠?”

내 대답이 그녀에게 무슨 감정의 변화를 주었는지, 권미현은 단숨에 남은 칵테일을 비워내고 평소의 당당한 미소로 씩 미소 지었다.

“대표님, 저 고백하려고요.”

“아니, 미현 본부장님 얘기였어요? 고백이요? 누구한테요?”

그렇게 말하며 칵테일로 입가를 적시는 그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호출.

잔잔한 라이브 재즈가 흘러나오는 분위기 있는 재즈 바.

거기다 고백을 한다는 말까지.

‘이거 설마……?’

소설 외에는 아무리 눈치가 없는 나라도, 그윽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권미현의 눈빛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안 돼. 막아야 한다.’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권미현이 단도직입적으로 내게 고백하겠다는 바이브를 물씬 풍기는 지금, 나는 그녀를 멈춰야만 한다.

입 안으로 흘러 넘긴 칵테일이 식도를 마저 빠져나가기도 전에 황급히 잔을 아래로 내려놓으며 먼저 말을 꺼내려 했다.

“대표님, 저…… 좋아해요.”

하지만 권미현의 말이 한 템포 더 빠르게 이어졌다. 코로 거친 숨을 들이키며 해결책을 강구하려는 그때.

“이무진 본부장님을요.”

“푸훗! 커허엑! 콜록! 케흐윽! 케헥! 컥!”

“대, 대표님? 괜찮으세요?”

“커헥! 컥! 아…… 네, 괜찮아요.”

자다가 뚜드려 맞는 날벼락 같은 소리에 기침을 콜록대자 권미현이 내게 급히 냅킨을 건넸다.

“많이…… 놀라셨어요?”

“예? 아뇨. 아니, 예. 조금 놀랐죠.”

칵테일을 뿜으며 흥건해진 입가를 민망하게 닦는데 권미현이 묘한 표정으로 눈꼬리를 살짝 휘며 나를 훑었다.

“그런데요, 대표님.”

“예?”

“고백을 한 건 전데, 왜 대표님 얼굴이 빨개졌어요? 혹시…… 제가 대표님한테 고백하려는 걸로 착각하신 건 아니죠?”

“예에? 아하하핫! 무, 무슨 소리세요. 그럴 리가요. 우리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가족끼리 사귀고 그런 행동 하는 거 아닙니다.”

마이크로 익스프레션까지는 아니겠지만, 권미현도 나름의 통찰력이 생겼는지 예리한 말로 나를 파고들었다.

괜히 헛된 망상으로 이불킥 10년 치를 예약할 뻔 했던 순간을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나는 놀란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유리컵에 담긴 물을 연거푸 들이켰고, 그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권미현은 칵테일과 함께 나왔던 스낵을 아작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하튼 대표님께서 사내 연애 된다고 하셨으니까. 그러면 상관없겠네요.”

“후우, 진짜 깜짝 놀랐어요. 단풍 삼…… 아니, 무진 본부장님하고는 언제부터 그런 사이가 되신 거예요?”

“네?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데요? 사귀는 것도 아니고요.”

“……?”

눈을 부릅뜨고 놀란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권미현은 피식 웃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꼬셔 보려고요. 무진 본부장님 볼 때마다 귀여운 매력이 있어서요.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대표님 찬스 좀 써 보려고 해요.”

“제가 무슨 도움이 될지…….”

어지러운 말 위에 어지러운 말이 덧씌워지는 힘겨운 고난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사내 연애에 이어 그 대상이 단풍 삼촌이라니.

‘단풍 삼촌이…… 귀여워?’

얼굴에 칼자국뿐만이 아니라 몸에는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흔적마저 가득 남겨진 거대한 단풍 삼촌을 귀엽다고 하는 사람은 인의 보육원의 원장인 내 아버지 말고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어지러운 정신 속에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는 그 때 권미현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도움이 왜 안 되겠어요? 대표님이랑 무진 본부장님이랑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요! 무진 본부장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그런 걸 좀 알려 달라는 말이에요.”

혼란스러운 정신을 가다듬고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을 풀가동해 권미현을 훑었다.

하지만 단풍 삼촌을 좋아한다는 권미현의 말이 거짓으로 보이지 않는다. 충격적이게도.

‘참나…… 회귀 전에도 단풍 삼촌은 썸도 한 번 못 타 본 모쏠 외길 인생이었을 텐데. 이런 일이 다 생기네?’

쌀 한 톨만 한 흑심 없이 출판계의 발전만을 바라며 달려왔는데, 단풍 삼촌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대복(大福)이 펼쳐질 줄이야.

‘뭐, 나쁠 건 없지. 단풍 삼촌이 흑심을 품은 거였으면 뜯어말려야겠지만, 권미현이 좋아한다는 건데. 내가 뭘 어쩌겠어?’

권미현 본부장은 나와 나이가 같다.

비록 임원직에 있지만 아직 22살의 어린 나이지.

하지만 따지고 보면 단풍 삼촌도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다. 칼자국이 가득한 살벌한 얼굴만 보자면 불혹에서 지천명을 오가는 액면가이지만, 실제로는 나와 고작 8살밖에 차이 나지 않는 서른 살이었으니까.

“음…… 제가 그렇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요. 일단 무진 본부장님은 연애 경험이 전무하세요.”

“예? 올해 서른 살인데요? 대표님이 잘 모르시는 게 아니에요? 그 나이가 되어서도 연애를 한 번도 못 한 사람이 있을 수가 있어요?”

단풍 삼촌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자 권미현의 눈빛이 보석을 발견한 까마귀의 눈처럼 반짝거렸다.

“아뇨,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결단코 단풍 삼촌은 연애 경험이 없습니다.”

“흐음……. 좋네요, 아주 좋아.”

“예?”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눈빛을 번뜩인 권미현의 말에 왜인지 모르게 흠칫하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거 말고 무진 본부장님에 관한 걸 말하자면……. 아! 이상형은 연예인 중에…….”

계속해서 눈을 빛내는 권미현을 앞에 두고 어느새 나온 스테이크와 피자 그리고 추가로 몇 차례 더 시킨 칵테일을 마시며 나는 그녀에게 단풍 삼촌에 관한 썰을 되는대로 다 풀었다.

하도 말을 많이 해 턱관절이 뻐근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권미현은 이제 흡족했다는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매우 좋네요. 감사해요, 대표님. 이 정도 정보면 충분히 해 볼 만 하겠어요.”

“네, 미현 본부장님.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응원합니다.”

비록 지금 이 순간 권미현이 단풍 삼촌을 향해 진득한 호감을 풍기고 있는 게 사실이나, 권미현과 단풍 삼촌이 서로 잘 되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8살의 나이 차 이외에도 살아온 환경 그리고 출신과 배경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니까.

‘그래도 뭐…… 미팅 때 악수 말고는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본 단풍 삼촌인데. 데이트 몇 번 하고 차이는 게 평생의 추억이 되겠지.’

내가 이리도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단풍 삼촌뿐만 아니라 나 또한 천연 모태솔로이기 때문이다.

“그럼 제 이야기는 이 정도면 될 것 같고. 이제 대표님 차례네요.”

“예? 제 차례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연거푸 마신 칵테일이 모두 내 취향이 아니어서인지 꽃 향이 나는 맥주, 호가든으로 마무리를 하는 그때, 이번에도 권미현이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 묘한 웃음을 입가에 가득 담은 채로.

“무슨 소리긴요. 대표님 좋아하시는 분 있잖아요? 제가 도와드리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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