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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45화 (145/201)

145화 ―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

* * *

“무슨 문제에요? 누가 사고라도 쳤어요?”

BS북도 아닌 LGA컴퍼니에서 업무적으로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예상 밖의 말에 놀랍다는 표정을 짓자 권미현 본부장은 피식 웃었다.

“그게 업무적으로 사고가 난 거는 아니고요. 웹툰 본부쪽 정명진 디렉터, 오늘 입사 첫날이잖아요.”

“정명진 디렉터랑 연관된 일이에요?”

“네, 지연 본부장님 말처럼 정말 열혈맨이긴 하시더라고요.”

“대체 무슨 일이었길래 그래요? 야근 이슈도 아닐 텐데?”

정명진 디렉터가 LGA컴퍼니에 출근한 건 오늘이 처음이다. 첫날부터 야근하겠다는 것만 아니면 아무리 열혈맨 정명진이라도 별 이슈는 발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오후 2시도 안 됐는데 벌써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경우의 수가 없었기에 의문이 가득 들 수밖에 없었다.

“야근 관련 문제인 것 같긴 해요.”

“야근 문제라고요?”

“네, 지연 본부장님이 정명진 디렉터 입사 전에도, 그리고 오늘 출근한 후에도 얘기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도 점심시간에 밥도 거르고 계속 일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자기는 일이 너무 재미있다고 하면서요.”

“아, 그건 참…….”

직장인들의 유일한 휴식 시간인 점심시간.

설마하니 그 시간까지 업무 시간으로 쓸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제가 옆에서 지켜봤는데, 지연 본부장님도 상당히 당황하는 기색이시더라고요. 그래도 첫날이니 같이 식사 한 끼 하자고 했는데도, 야근을 할 수 없어서 점심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고 하시던데…… 그냥 보여주기 식이 아니라 눈이 이글거리더라고요.”

“…….”

BS북의 전 대표인 오성민이나 다른 중소기업의 대표가 정명진 디렉터 같은 사람을 봤다면, 어디서 이런 귀한 노예가 들어왔냐며 기꺼워했을 테다.

하지만 나에겐 전혀 달가운 소식이 아니다.

적당한 열기의 불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될 수도 있고, 고기를 먹음직스럽게 익힐 수도 있다.

“이건 초장에 확실히 잡아야겠네요. 정면진 디렉터가 업무에 열정을 보이는 건 좋지만 과한 건 부족한 것보다 못하니까요. 강추강 작가님 런칭 일정 및 프로모션 정리한 자료 메일로 공유해주시고 무진 본부장님, 지연 본부장님 위로 올라오라고 해주실래요? 정명진 디렉터 관련해서 전달 사항 있어서요.”

“네, 대표님. 지금 바로 올라오라고 할게요.”

“고마워요.”

하지만 과한 열기는 모든 것을 살라버린다.

특히 근처에만 다가가도 후끈거리는 맹렬한 열기는 결국 주위를 모두 태워버리지.

그렇기에 정명진 디렉터를 이대로 둘 수는 없다.

그의 열기가 더 거칠어져, 다른 사람들에게 번지기 전에 멈춰야만 한다.

* * *

LGA컴퍼니 2층의 대회의실.

정명진 디렉터가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때, 경영 본부장 이무진이 빙긋 웃으며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면접 때 뵙고 처음 뵙네요. 첫날인데 적응은 잘 하고 있습니까?”

“예, 팀원들이 잘 케어해주셔서 편하게 있습니다.”

의자에 앉으며 묻는 경영 본부장 이무진의 말에, 정명진 디렉터는 감정이 조금도 묻어나지 않는 덤덤한 말투로 답했다.

“괜찮다면 다행이네요. 이렇게 부른 건 업무 시간 관련해서 중요한 전달 사항이 있어섭니다.”

“업무 시간이요?”

정명진은 이무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을 되물었다. 그러자 이무진은 사악한 얼굴을 최대한 부드럽게 보이도록 애를 쓰며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우리 LGA컴퍼니의 기본 근무 시간은 나인 투 파이브, 8시간이죠. 물론 입사 첫 달이 지나면 자율 출퇴근이 가능하니 원하는 시간에 출근해서 퇴근하면 되고요.”

“예, 맞습니다…….”

대한민국의 직장인이라면 칼퇴근이 보장되는 8시간 근무라는 말만 들어도 도파민이 치솟아 두근거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무진의 말을 들은 정명진의 표정은 묘하게 일그러졌다.

‘열심히 살자’라는 말을 자신의 신조로 삼고 살아온 그에게는, 다른 회사보다 1시간이나 짧은 LGA컴퍼니의 근무 시간이 잘 차려진 칠첩반상을 맛만 보고 남기는 사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야근은 정당한 사유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걸 입사 전에도 그리고 오늘 첫 출근 날에도 이지연 본부장님께 전달 들으셨을 테니 따로 말씀드릴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한가지 더 분명하게 전달하지 못한 게 있는 모양입니다.”

“……?”

“점심시간에도 업무를 한다고 하시더군요?”

“예, 그게 무슨 잘못이라도…… 설마 점심시간에도 업무를 해서는 안 되는 겁니까?!”

“그아하하, 맞습니다. 아주 정확히 잘 알고 있었네요?”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이무진 본부장이 내뱉는 걸걸한 웃음에 정명진 디렉터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 맴돌았다. 정명진이 LGA컴퍼니의 복지 중 사치라고 여기는 다른 한 가지, 그건 바로 점심시간이었으니까.

“아니…… LGA컴퍼니는 다른 회사와 달리 점심시간이 1시간 반이나 되지 않습니까? 본부장님 말씀은 그 시간 동안 그냥 쉬라는 말입니까? 밥을 먹어도 1시간이나 남는데요?”

“그렇죠. 그 시간 동안 쉬면 되는 겁니다. 우리 LGA컴퍼니와 제휴를 맺은 인근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거나, 음악을 배워도 되고 아니면 회사 수면실에서 부족한 잠을 자도 되죠. 무엇을 해도 자유입니다. 단지 업무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죠.”

“그게 무슨……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학교도 아니고 대체 왜 그렇게까지 과한 복지가 있는 겁니까? 아니, 무엇보다 점심시간을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거라면 업무를 해도 상관없는 게 아닙니까?”

정명진 디렉터에게 회사란 일을 하는 곳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학창 시절부터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별다른 취미 하나 없이 일에만 몰두해온 그였기에, LGA컴퍼니의 복지는 사치스럽다는 생각만 가득 들었다.

당혹감이 가득 깃든 얼굴로 묻는 정명진 디렉터의 말에 이무진 본부장은 웃음기를 쫙 뺀 살벌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흐음…….”

“…….”

이무진 본부장은 단지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을 뿐이지만, 정명진 디렉터는 건달에게 협박이라도 당하는 듯한 압도감을 느꼈다.

“명진 디렉터님 말이 맞습니다. 학교와 학교는 다르죠. 학생들은 적절한 교육을 받고 교우 관계를 통해 올바른 가치관이 형성되며 발전하는 게 학교라면, 직장인들은 그동안 배워온 자신의 가치를 실적으로 증명하는 장소이니까요.”

정명진 디렉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무진 본부장은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세요, 디렉터님. 학창 시절에는 원하지 않아도 점심시간에 밥을 먹이고 운동장에 나가 햇볕을 쬐게 하죠. 물론 그때와 지금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딱 맞는 비교라고 할 순 없겠습니다. 그래도 학창시절에는 학교에서 알아서 건강을 챙기면서 생활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명진 디렉터님을 봐 보시죠.”

“예? 제가…… 제가 무슨 문제라도……?”

“햇볕은 언제 받았는지도 모를 정도로 새하얗고 푸석푸석한 피부에 팔다리에는 근육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죠. 거기다가 점심 식사도 안 챙겨 드시니 북조선 인민들이 떠오를 정도로 마르셨고요.”

“지, 지금 하시는 말은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그런—”

“그런 말을 왜 하느냐? 회사에서 지원을 해드리니 도움을 받으라는 소립니다. LGA컴퍼니 토탈뷰티케어솔루션 지원 안 보셨어요? 피부과 가서 진료 받으시면 진료비 지원해 주고 회사와 연계된 피티샵 가면 개인 트레이너한테 PT도 따로 받을 수 있어요. 식사는 지급된 직원 복지 카드로 2인분이든, 3인분이듯 양껏 드실 수 있는 거 아셨습니까?”

‘면접 때 들었던 것 같기도……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건가?’

정명진 디렉터가 LGA컴퍼니에 온 것은 오직 ‘나 혼자만 상하차’라는 작품의 웹툰화를 위해서였다.

물론 자신의 소속인 BS북 그리고 파견 나온 LGA컴퍼니의 연봉이 괜찮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복지에 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탕비실 따위도 필요 없고, 단지 정수기 위에 믹스커피 하나만 놓여 있어도 쉬지 않고 소처럼 일에만 열중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놈의 회사는 무슨 피부를 챙기고, 건강을 챙기고, 끼니를 챙기라는 말을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명진이 생각하는 회사원이란 계약이란 사슬로 서로 묶여 있는 관계. 돈을 받는 대신 노동력을 제공해주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전 직장에서도 또 그 전 직장에서도, 항상.

“그으흐흐. 보통은 이런 복지가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는데, 명진 디렉터님은 오히려 당황하는 얼굴이군요.”

“그야…….”

그런 복지 딱히 관심도 없다는 말을 가까스로 갈무리하는 그때, 이무진 본부장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우리 LGA컴퍼니의 복지가 좋다 나쁘다는 본인이 느끼기에 따라 다를 겁니다. 회사가 제공하는 복지를 얼마나 누리냐에 따라 얻게 될 만족도가 달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건 이거 하나입니다. 휴식 시간에는 휴식을, 업무 시간에는 업무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아무리 곱씹어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본부장님 말씀처럼, 휴식시간에 제가 하고 싶어서 업무를 하는 것도 금지된다는 말입니까? 누구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요?”

이어진 정명진 디렉터의 말에 이무진 본부장이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런…… 정말 생각하지 못했나 보군요. 정명진 디렉터님은 내규에 의해 보장된 점심시간에도 업무를 하는 게 회사를 위한 일이고 자신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엄연히 LGA컴퍼니에 해를 끼치는 게 맞습니다.”

“예? 제가요?”

정명진 디렉터가 놀라 되묻는 말에 이무진 본부장은 가볍게 웃었다. 물론 그 미소는 정명진 디렉터에게는 사납게 느껴질 법한 그런 미소였다.

“점심시간은 회사 내에서 보장된 유일한 휴식 시간입니다. 오늘이 첫 출근날이라 정명진 디렉터님은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LGA컴퍼니 직원들은 업무 시간에 동종 업계 그 누구보다 집중하는 업무 효율을 보여주고 있죠.”

“그건…… 맞습니다.”

이건 정명진 디렉터 또한 공감하는 말이었다.

정명진 디렉터가 그동안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며 가장 싫어하던 족속들이 바로 월급을 축내는 루팡충들.

업무 시간에 SNS나 구경하고 쇼핑이나 하는 머저리들 때문에 자신 또한 환쟁이라고 싸잡아 욕먹는 게 싫어서 더욱 악착같이 일한 감도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명진 디렉터의 눈에도 LGA컴퍼니에는 그 누구도 회사의 시간을 축내는 양아치들이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신다니 다행이군요. LGA컴퍼니 직원들의 그런 업무 능력은 정당한 복지 그리고 충분한 휴식 시간이 보장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진 디렉터님처럼 휴식 시간에도 계속 업무를 한다면 다른 직원들이 보기에 불편함을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모습이 LGA컴퍼니에 해를 끼친다고 말한 거였고요.”

“그게 무슨……?”

정명진 디렉터는 이무진 본부장의 말이 여전히 무슨 뜻인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이무진 본부장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연꽃은 진흙 속에서 핀다는 말이 있죠. 그리고 사람들은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을 보며 청초한 아름다움에 열광하고요. 하지만 아무리 연꽃이라도 그 한계치는 분명합니다. 실제로 연꽃 역시 정화 한계치를 넘어서면 정화가 되지 않은 오염물들이 뿌리에서부터 축적돼 결과적으로 2차 오염을 발생하는 주원인이 되기도 하죠.”

“……?”

“우리 LGA컴퍼니는 연꽃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단 한 명의 화려한 아름다움보다는 모두가 꽃 피울 수 있는 맑은 환경을 원하는 거죠. 그런 환경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함께 지켜 주십시오. LGA컴퍼니는 명진 디렉터님이 우려하는 것처럼 아직 더럽혀지지 않았으니까요.”

“아…….”

정명진은 이어진 이무진 본부장의 말이 이제야 어렴풋이 이해가 됐다. 그런 정명진의 표정을 보며 이무진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여전히 정면진의 얼굴에는 사악하기 짝이 없게 보였지만.

“처음에는 적응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LGA컴퍼니를 위해서 그리고 다른 직원분들의 온전한 휴식 시간을 위해서 진심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업무는 업무 시간에만 부탁드립니다.”

이무진 본부장의 말을 수차례 곱씹으며 정면진 디렉터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아하하하.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복지 생활 좀 누리시고!”

걸걸한 웃음을 지으며 건넨 이무진 본부장의 우악스러운 손을 맞잡으며 정명진 디렉터 또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 그건 차차 경험해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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