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32화 (132/201)

132화 ─ 병신년(丙申年)이 왔다.

* * *

“좋은 아침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본부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십쇼.”

“그래, 다들 새해 복 많이 받자고.”

병신년(丙申年)이 왔다.

오늘은 붉은 원숭이의 해인 2016년 1월 4일 월요일.

새해 첫 출근이어서 그런지, BS북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평소보다 다들 5분 정도씩 일찍 출근하는 진풍경을 보였다.

그리고 출근하자마자 자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 판무 2팀 매니저들 사이에서 조팟의 음성을 들은 김동현 팀장이 잠시 고장 난 기계처럼 우두커니 멈춰 섰다.

“아니, 조팟한테 인사 받은 거 입사 후로 거의 처음인 거 같은데? 무슨 좋은 일 있어?”

헛것이라도 보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는 김동현의 말에 조팟은 좁게 말린 어깨를 활짝 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예? 딱히요? 그냥 새해가 되니까. 변화도 그렇고 다 좋네요. 이제 뭔가 새로운 사람이 된 것 같고.”

“오오, 조팟님 진짜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갑자기 사람이 바뀌니 좀 이상한데요?”

“이상하긴요. 내가 원래 이렇지.”

“새해부터 다들 파이팅이 넘치니 좋네. 나는 조금 있다가 대표님이랑 회의가 있어서 대표실 가봐야 하는데, 금주 주간 회의는-”

“제가 준비할게요.”

“음? 조팟이?”

뜬금없는 조팟의 말에 김동현이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제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본부장님 나오시면 바로 회의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둘게요. 나스 폴더 들어가서 내용 수정하고 출력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하하, 조팟. 이거이거, 왜 이러는지 알겠구만?”

김동현은 이제야 조팟이 왜 저런 행동을 보이는지 알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9시 10분에 바로 회의 들어가기로 했으니까 기다리는 소식은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조팟, 아니, 조 팀장.”

“에이, 참. 뭐 안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뭐, 원래도 제가 팀장이나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실질적인 팀 살림은 제가 다 도맡아서 하던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병신년의 시작부터 조팟놈의 지랄이 풍년이다.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으로 읽는 판무 2팀 신입 매니저들과 이창연 매니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지만 김동현은 그들의 표정을 캐치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려는 건지 조팟의 말에 허리를 젖혀 가며 너털 웃음을 지었다.

“으하하, 좋네, 좋아. 그럼 주간 회의록 준비만 좀 부탁할게.”

“네, 맡겨 주세요.”

그리고 나는 바로 전 주까지만 해도 오진아가 쓰던 판무 1팀 팀장 자리에 앉아 조팟과 김동현 팀장의 대화를 들으며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신났구만? 누가 보면 이미 팀장 된 줄 알겠어?’

정시 칼출근하는 평소와 달리 오늘 나는 자리를 옮기고 정리를 하느라 1시간 정도 일찍 회사에 출근했다.

이제 BS북은 더 이상 병신북이 아닌, 내가 보듬고 가꾸어 나가야 할 회사니까 일찍 출근하는 게 조금도 시간이 아깝지 않았기도 했고.

그리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나 다음으로 회사에 가장 일찍 출근한 게 바로 조팟놈이었다는 거다.

‘심지어 인사까지 나한테 먼저 했지.’

병신년의 시작을 조팟놈과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남 인사도 잘 씹어 드시는 조팟놈이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는 것 그 모든 게 하나하나 연결되어 내게 커다란 오한을 안겨 줬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 있지만, 평소 늘 인상을 찌푸리고 자신보다 높은 직급의 사람, 본부장급 미만이면 인사도 받지 않는 조팟놈이 내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아직도 등줄기에 찌르르한 소름이 한 줄기 흘러 내린다.

“자, 그럼 주간 회의록 준비 잘 부탁하고, 난 대표님 뵙고 옵니다.”

“다녀오세요, 본부장님.”

잠시 후, 김동현이 대표실로 이동했고 조팟은 과도하게 허리를 젖히며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아……. 팀장 자리 뒤쪽이 창가라 좀 안 좋을 것 같은데? 춥진 않으려나?”

조팟놈의 팔다리만 보면 영양실조가 떠오를 정도로 말랐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배는 볼록 나온 전형적인 거미형 체형. 그런 이유 때문인지 아니면 그의 인성과 심성에 걸맞게 신체 민감도 또한 지랄 맞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조팟놈은 여름에는 회사가 냉동고가 될 정도로 춥게 에어콘을 틀고, 겨울에도 틈만 나면 히터를 끄는 회사에 한 명씩은 꼭 있다는 에어콘 빌런. 업무 능력이 없는 것뿐만이 아니라 외적으로도 끝도 없이 잔잔바리 단점이 많은 놈이지.

그 누구도 듣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거들먹거리는 말투로 혼자 구시렁거리던 조팟놈은 희번덕해진 눈빛으로 이창윤 매니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하튼 창윤 씨.”

“예? 저요?”

이창윤 매니저의 말에 조팟은 마치 거드름을 피우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을 이었다.

“여기 자리도 나쁘지 않아요. 팀장 자리만큼 양옆에 파티션 다 처져있는 건 아니지만 에어콘도 직빵이고. 채광도 괜찮고. 자리 옮기면 내 모니터 그대로 써요. 이거 브랜드 모니터임.”

“아…… 하하. 네. 그런데 저도 자리를 옮기나요?”

머쓱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묻는 이창윤 매니저의 말에 조팟은 여전히 등받이에 허리를 깊게 기댄 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 진짜. 뭔 소리야? 내가 팀장 되면 파트장 자리는 누가 되겠어? 우리 팀에 팀장 될 실적이나 경력이나 따져봐도 창윤 매니저 말고 없잖아?”

“에이…… 그거야 모르죠. 나름 열심히 한다고 하긴 했는데, 그렇데고 제 실적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라…….”

“뭐 지금 부족한 걸 알고 있으면 된 거지. 그건 내가 팀장으로서 앞으로 찬찬히 이끌어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하하……. 네, 알겠습니다.”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이미 반쯤 미친 듯 보이는 조팟놈과 달리 이창윤 매니저는 자기 객관화가 잘 되어있는 사람이다.

아니 오히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너무 낮게 보는 경향이 있지. 비록 그동안 강경진과 김동현 그리고 조팟 등 폐급 상사들의 폐급 업무 하달을 쳐내며 회사 업무를 진행해 왔기에 지금 같은 실적밖에 내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지난 2년간 내 두 눈으로 바로 옆에서 지켜봐 온 이창윤 매니저는 지금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보다 훨씬 더 좋은 기량을 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물론 잠재력 만으론 빛을 볼 수가 없지. 누군가 진흙 속에 묻힌 그의 진면목을 봐 주는 게 아닌 이상엔.’

끼익—

조팟과 이창윤 매니저의 말을 귀동냥하며 오전 업무를 처리하고 있는 그때 오진아 대표와 회의가 끝났는지 김동현이 회사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층 어두워진 낯빛으로.

“어떻게 회의는 잘 하셨어요, 본부장님?”

“어…… 그래. 조팟 내가 전할 말이 있는데, 잠시 소회의실로 가서 얘기 좀 할까?”

하지만 이미 팀장 뽕에 뇌가 절여진 조팟은 김동현 본부장의 어두워진 낯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이 뭘 회의실 가서 얘기를 해요. 인사이동 관련 얘기죠? 다들 있는 자리에서 듣는 게 중요할 것 같으니까 여기서 말해 주세요.”

“아니…… 아니야, 우리 소회의실 가서 따로—”

“아, 괜찮다니까요? 대표님이 어떻게 하시래요? 지금부터 짐 옮기래요?”

치석이 잔뜩 낀 누런 이빨이 훤히 드러나도록 웃는 조팟의 말에, 김동현 본부장은 곤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아, 거참. 좋아요. 그럼 창윤 매니저부터 말해주세요. 창윤 매니저도 자리 옮기는 거 맞죠?”

“어, 그, 그래. 대표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그런데—”

“뭐 진급을 그렇게 울상으로 하세요, 참나. 자 우리 2팀 여러분 다들 이창윤 매니저님의 파트장 진급을 축하하며 박수 한번 갑시다!”

“진급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축하드립니다, 파트장님!”

조팟의 주도 하에 판무 2팀 자리에선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창윤 매니저는 정말 자신의 진급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감격한 얼굴로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니, 하아…… 미치겠네.”

박수와 함성 소리에 묻혀 아무도 듣지 못했을 터다. 하지만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을 가동한 내 눈엔 두 손을 허리춤에 두고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는 김동현의 입모양이 보였다.

환호와 갈채가 쏟아지는 틈바구니 속에서 홀로 고개를 올렸다 숙였다를 반복하며 한숨을 내쉬던 김동현 팀장은, 그 소란을 멈추기로 결심했는지 곰처럼 두툼한 손을 슬쩍 허공에 올렸다.

“다들 잠시만. 잠시만 다들 조용히 해 봐.”

“에이, 본부장님도 참. 원래 이럴 때는 웃으면서 축하한다 해 주는 게—”

“창윤 매니저 파트장으로 진급하는 게 아니야.”

“예에?”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놀라 숨을 들이켜는 조팟의 말에 김동현 팀장은 잔뜩 좁혀진 미간을 두툼한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는 이 광경을 놓치지 않기 위해 출근하자마자 책상 서랍에서 미리 준비해 둔 과자 봉지를 꺼내 뜯었다.

“파트장 진급이 아니라니…… 인사이동 있다면서요? 창윤 매니저님 진급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 아하하. 아닌가 보네요. 제가 괜히 설레발을…….”

여전히 놀란 듯한 얼굴로 되묻는 조팟놈의 말에 이창윤 매니저는 붉어진 목덜미를 긁으며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내 새로운 자리처럼 판무 1팀이 보이는 명당 자리에서 보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사무실 내에서 순식간에 사라진 키보드 타자음으로 미루어 보아 이제 판무 2팀뿐만이 아니라 사무실 내의 모두가 판무 1팀 쪽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하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창윤 매니저가 금일부로 판무 2팀 팀장으로 진급하게 됐어.”

“에? 아니 예에? 팀장? 창윤 매니저가 팀장이요?”

“대표님 지시 사항이야. 미안해 성훈 파트장.”

“…….”

이창윤 매니저의 팀장 진급 소식에 그 누구도 축하의 말이나 박수갈채를 보내지 않았다. 간혹 아카펠라처럼 사무실 여기저기서 헉헉대는 놀람의 탄성만 흩뿌려질 뿐.

심지어 당사자인 이창윤 매니저 또한 그 사실을 믿기 어려웠는지, 혹은 김동현 본부장의 입에서 이어질 다음 말이 두려웠는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짧은 적막 뒤 조팟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전보다 더 밝게 웃으며 김동현 본부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이, 뭐 미안할 게 뭐 있어요. 저도 굳이 2팀 팀장일 필요는 없어요. 창윤 매니저가 파트장도 안 거치고 팀장이 되는 게 좀 놀랍긴 한데, 그간 창윤 매니저가 보여준 실적 정도면 뭐 팀장 자리 앉을 만 하죠. 그보다 저는 그럼 어디로 가면 되요? 3팀이 생기는 거죠? 그게 아니면…… 제가 다른 팀으로 가는 거에요?”

하, 이 조팟새끼 봐라?

나를 보면서 웃네?

나를 보면 웃는 이유는 오진아의 대표 진급으로 인해 판무 1팀 팀장이 된 내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리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역시 재미있네. 굴리는 맛이 있겠어.”

대체 어떤 행복회로, 아니, 망상을 돌리는지 임원급 회의에서도 단 한번도 언급 되지 않은 제3팀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조팟놈이 대단한 새끼라고 느껴지는 건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을 풀가동해 읽은 조팟의 얼굴에 느껴지는 감정은 200% 진심이라는 뜻. 즉, 조팟놈은 자신이 무조건 팀장을 할 거로 생각을 하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감정의 기류를 김동현 팀장도 읽었는지 더욱 어두워진 얼굴로 조팟의 한 쪽 어깨에 슬쩍 손을 올렸다.

“진짜…… 진짜 미안하게 됐어.”

“아니 뭘 자꾸 미안해 해요. 다른 팀이어도 상관 없다니까요, 하하.”

“……1팀.”

“오? 1팀으로 가는 거에요? 정우 씨랑 또 만나겠네.”

“…….”

김동현 팀장은 도무지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다시금 침묵을 지켰고, 조팟놈은 과자를 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보며 잇몸이 드러나도록 썩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도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자 김동현 팀장이 한숨을 내쉬며 조팟에게 말했다.

“오늘부터 판무 1팀 파트장이야. 정우 팀장님 많이 도와드리고.”

“……예? 정우 팀장님이라니. 그게…… 그게 무슨…….”

말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떨구며 내뱉은 김동현 팀장의 읊조림에 조팟의 눈이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탁해졌다.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과자 한 통을 다 비운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 섰다.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조팟님 다 들으셨으면 바로 자리 옮겨요. 앞으로 제 밑에서 일하실 텐데, 차근차근 배워 봅시다.”

“아…….”

밝게 미소 짓는 나를 보며 조팟은 무너져 내렸다.

순조로운 병신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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