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30화 (130/201)

130화 ― 굴러온 돌만 있는 게 아니니까.

* * *

살기가 가득 묻어나는 BS북의 새로운 대표의 취임식 연설이 끝나 고요한 적막이 장내를 휘감았다.

짝! 짝! 짝! 짝! 짝!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고요했던 침묵이 무색하리만큼 우렁찬 박수와 함께 레스토랑 안은 새로운 대표 오진아를 향한 축하의 말들이 가득 울려 퍼졌다. 물론 스타트를 끊은 박수는 내 손바닥에서 시작된 거였지만.

“허허, 오진아 팀…… 아니, 대표의 취임식 인사는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다들 한 해 동안 고생한 만큼 많이 먹고 마십시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으허허허.”

자신의 딸 오진아의 입에서 나온 말이 BS북을 싹 갈아엎겠다는 선전 포고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오진아가 연단 위에서 내려온 후에도 오성민 대표, 아니, 전 대표는 KFC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웃음을 지을 뿐이다.

‘이야아, 보살님이 다 되셨네? 주머니가 두둑해지니까 아주 좋으시겠어? 더 시키라는 말도 하고?’

재미있는 사실은 킵비트에서 BS북의 지분 49.98% 인수를 끝냈고 오성민 대표와 이상철 본부장 그리고 정병헌 본부장이 가지고 있던 남은 지분은 오진아에게로 넘어간 상황.

오성민 대표는 인자함을 가득 담아 선심 쓰듯 직원들에게 마음껏 먹으라 했지만 그건 이제 자기 주머니에서 빠져나갈 돈이 아니어서인지 직원들 식대도 아까워하던 자린고비 양반의 마음 그릇이 순식간에 선녀로 변모한 진귀한 광경이었다.

“고생하셨어요, 대표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진짜 너무 멋집니다! 정말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연설을 마치고 온 오진아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오자 내 인사에 이어 황건일 매니저가 연예인을 바라보는 팬처럼 반짝이는 눈빛으로 거친 인사를 건넸다.

“두 분 모두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특히 정우 팀장님.”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 킵비트에서 BS북의 지분을 인수한 후 있었던 인사 공고는 오진아 팀장의 대표 승진만이 아니었다.

이제 BS북의 대표가 됨으로써 오진아는 더는 편집자 엄무를 할 수 없었고, 회사 경영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나는 졸지에 BS북 판무 1팀의 팀장 자리에 앉게 됐다.

“저는 임원진들하고 대화 마무리할 게 있어서. 맛있게 드세요, 부족한 거 있으면 더 시키시고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다녀오세요.”

사내 공지로 발표된 공식적인 인사 공고는 오성민 대표의 퇴임과 오진아 대표의 취임뿐이었지만 이건 끝이 아닌 시작.

‘이제 진아 씨가 보여줄 차례지.’

평소 즐기지 않는 드라이한 와인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 맛은 스파클링 와인처럼 달고 감미롭기만 하다. 이제 최고로 맛있는 메인 디쉬가 안주로 나올 차례니까.

* * *

또각— 또각— 또각—

“축하합니다, 오 대표님, 허허. 누굴 닮아서 말솜씨가 좋던데?”

“별말씀을요.”

오성민 대표와 본부장들이 앉은 테이블을 향해 킬힐을 신은 오진아의 발걸음 소리가 다가가자 오성민 대표가 잇몸을 만개하며 그녀를 반겼다.

“대표님께서 자식 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셨습니다! 제 아들 나이가 조금만 더 많았어도.”

“어이구, 정 본부장님 아들은 이제 초등학교 입학했으면서 뭘. 그보다 진아 대표, 우리 큰아들 알지? 어릴 때도 몇 번 보고 했는데. 연말이라 한국 잠깐 들어왔는데 안 그래도 진아 너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었어.”

“그래에?”

“아이구. 그런요, 형님! 제 아들이 저 닮아서 훤칠한 거 아시죠?”

“너 닮기는 제수씨랑 판박이더만.”

“으하핫, 그렇습니까?”

오성민 대표와 정병헌 본부장 그리고 이상철 본부장은 이제 지분을 모두 넘기고 주머니를 두둑이 챙긴 마음에 행복이 벅차오르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이미 공짜 와인을 실컷 들이켜서인지 학연 지연이 묻어나는 호형호제하는 모습을 거리낌 없이 내보였다.

“축하한다 진아야. 앞으로 좋은 모습 기대할게.”

스윽—

모두의 텐션이 지붕을 뚫을 듯이 치솟는 그때.

BS툰의 웹툰 본부장이자 오성민 대표의 친척 오빠인 강경진은 얼마 전 킵비트 이무진 대표와의 미팅 자리에서 보였던 냉랭함 대신 원래 그가 회사에서 보였던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오진아 대표의 의자를 슬쩍 빼냈다.

“고마워요, 본부장님.”

“하하, 우리끼리 있는 자리에서 뭘 그렇게 격식을 따지고 그래. 음식 식겠다. 얼른 먹어.”

“본부장님도요.”

물론 강경진이 아무리 자상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이미 그의 민낯을 목격한 오진아에게 그런 강경진의 행동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방증하듯 시끌벅적한 소란 속에서 오진아는 묵묵히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썰 뿐이었다. 간간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면서.

“우리 진아 대표 끝나고 어디 가기로 했어? 오빠 대리 불러서 갈 건데, 가는 길에 데려다줄까?”

다정함이 묻어나는 강경진의 말에 오진아는 임원진 자리에 앉은 후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 미소는 그녀가 판무 1팀 자리에서 지었던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미소였다.

“아니, 가는 게 아니라 올 거예요, 본부장님.”

“온다니? 누가 올 사람이 있…… 뭐, 뭐야?”

오진아의 말을 잠시 곱씹던 강경진의 말문이 멈춰졌다.

비록 임원진들이 앉은 자리는 레스토랑 입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오는 험상궂고 거대한 얼굴의 사내에게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저 사람이 왜?”

“아니? 진아야 네가 불렀—”

“어머, 벌써 오셨네요. 실례할게요, 새로 소개해 드릴 분들이 오셔서.”

당혹감에 물든 강경진의 음성 뒤로 살짝 놀란 듯한 오성민 대표의 말도 이어졌다. 하지만 오진아는 그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서 레스토랑 안쪽을 두리번거리는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언제 오시나 했네요.”

“그아하하하, 오늘 종무식만 두 개가 겹쳐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대표 취임 축하드려요.”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바로 소개해드리도록 하죠.”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사나운 인상의 사내 그리고 그 거대한 사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여성의 등장에 일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소곤거리는 웅성거림으로 바뀌었다.

이지연과 오진아는 오늘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지만, 서로 입을 맞췄기에 서로 낯가리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고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그들은 충분히 막역해 보였다.

“오우오! 오이씨! 저기 저거 뭐야? 연예인인가? 로드 매니저 같은 사람은 완전 깡패 상인데?”

“와아…… 진짜 미녀와 야수네요.”

그리고 임원진들을 제외하고 이무진과 이지연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팀원들에게 조팟이라 불리는 판무 2팀의 조성훈 파트장 그리고 그의 말에 심드렁히 반응하려다가 눈이 동그랗게 뜨여진 이창윤 매니저였다.

“연예인? 여기 연예인이 올 리가아…… 어어? 저, 저 사람들은?”

공짜 와인과 스테이크를 흡입하던 판무 2팀 김동현 팀장은 기시감 가득 드는 익숙한 모습에 칼질을 멈췄다. 김동현은 BS북 판무 2팀 팀장으로서 LGA컴퍼니의 그들을 익히 본 적이 있었으니까.

“아시는 분이에요, 팀장님? 누군데요? 아, 빨리 알려 줘! 현기증 나니까!”

조성훈 파트장이 닦달하듯 김동현 팀장을 재촉했다.

그리고 더는 BS북에 자신의 자리는 없다고 여긴 김동현 팀장은 갑작스러운 그들의 등장에 으적대던 스테이크를 꿀덕 삼킬 요량으로 와인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미녀와 야수를 대동한 오진아 대표가 연단 위의 마이크를 빼 들고 임원진들이 있는 테이블로 이동했다.

“식사하시는 와중에 실례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소개드릴 분들이 계셔서 모셨습니다.”

판무 2팀 편집자들 그리고 BS북의 임원진들 모두가 놀라 눈을 끔벅거리는 그때 오진아는 연단 위에서 챙겨온 무선 마이크를 빼 들고 거침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앞서 제 취임 연설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BS북과 LGA컴퍼니는 같은 계열사가 되었죠. LGA컴퍼니의 이지연 대표님 그리고 LGA컴퍼니의 경영 본부장이자 킵비트의 대표이신 이무진 본부장님이십니다.”

짝! 짝! 짝! 짝! 짝! 짝

누군가 시작한 박수와 함께 식사가 한창 진행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 안에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우렁찬 박수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오진아 대표가 슬쩍 올린 손짓에 마법처럼 그 소란은 사그라들었고 모두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이미 들으신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이제 내일부로 그간 BS북을 함께 해주셨던 고마운 분들이 떠나실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두 분께서 그 자리를 맡아주실 거기에 이 자리에 모시게 되었죠.”

“……진아야, 분들이라니? 나 말고 또 누가?”

오진아 대표 옆에서 그의 아버지인 BS북의 전 대표 오성민이 읊조리듯 말했지만, 오진아는 그의 말이 조금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레스토랑 안에 가득 찬 BS북 직원들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그동안 BS북 그리고 BS툰의 성장을 위해 힘써주셨던 세 분의 대표님들. 강경진 웹툰 본부장님, 이상철 출판 본부장님, 정병헌 운영 본부장님은 오성민 전 대표님과 함께 금일 부로 BS북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시게 되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그럼 그동안 정말 많은 고생을 해주신 본부장님들께 감사의 박수 부탁드리며, BS북의 운영 본부장을 함께 맡아주실 이무진 이사님 그리고 웹툰 본부장을 맡아주실 이지연 이사님의 인사부터 전달드리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짝! 짝! 짝! 짝! 짝!

“우와아아아! 대박! 웹툰 명가 엘가 대표님이 우리 웹툰 본부장님이야!”

“이사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와아아아아!”

기존 웹툰 본부장 강경진에 이어 정병헌 운영 본부장이 와락 인상을 구기며 뭐라 따지려 했다.

하지만 또다시 어디선가 시작된 박수 그리고 특히 LGA컴퍼니의 대표이자 웹툰계의 절대 강자로 떠오른 이지연이 BS북의 웹툰 본부장이 된다는 말에 BS툰 사원들은 고막이 찢어질 것만 같은 고라니 함성을 내지르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분노가 가득 담긴 강경진과 정병헌 본부장의 음성은 파도 소리에 묻힌 함성처럼 그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고 쏜살같이 이어지는 이지연과 이무진 신임 본부장들의 인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진아야!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삼촌이 왜 퇴사를 해? 사전 협의 없이 이게 무슨 말이야?”

“정병헌 본부장님. 삼촌이라고 하기엔 저와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실 텐데요? 저희 아버지와 지분 넉넉히 나눠 가지셨을 텐데 회사 경영에서는 손 떼시죠.”

“아니…… 이건 손을 떼는 정도가 아니라 그냥 팔다리가 잘리는 게 아니냐? 아니, 아닙니까?”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정병헌 본부장이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흘러나오는 말을 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워낙 당황스러운 상황인지라 생각처럼 조리 있게 말이 나오진 않았다.

“오진아…… 지금 기존 임원들을 다 내치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것 같아? 굴러온 돌로 충신들을 내친다고?”

“하하, 충신? 경진 오빠, 정신 못 차렸네? 대표라고 부르라니까. 아니지…… 앞으로 계속 지금처럼 말해.”

“뭐?”

“이제 BS북에 오빠가 있을 자리는 없으니까.”

“그게 무슨—”

“그리고 오빠. 우리 회사 민심은 딱히 걱정할 것 없어. 굴러온 돌만 있는 게 아니니까.”

순식간에 BS북에서 팔다리가 잘린 강경진이 두 눈을 부릅뜨며 오진아를 노려봤다. 하지만 오진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피식 미소 지으며 자기소개가 끝난 이지연과 이무진에게 다가가 다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분의 소개를 잊을 뻔했네요. 그간 BS북을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해주신 분이시죠. 판무 2팀의 김동현 팀장님께서 이상철 본부장님의 뒤를 이어 출판 본부를 맡아주실 겁니다. 앞쪽으로 나오셔서 인사 부탁드려요. 김동현 출판 본부장님.”

“뭐, 뭐야? 팀장님이 본부장? 왜 말 안 해줬어요?”

“어…… 어어?”

이어진 오진아의 말에 조용히 말을 아끼고 있던 출판 본부장 이상철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리고 잠시 멍한 얼굴로 굳은 돌처럼 앉아 있던 김동현 팀장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연단 위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촉촉해진 눈 그리고 입사 이래 처음으로 생긴 애사심이란 것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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