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29화 (129/201)

129화 ―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오늘은 12월 31일 목요일.

2015년 한 해의 마지막이자 종무식이 열리는 날이다.

“……비록 영원히 BS북의 미래를 책임지리라는 큰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BS북은 새로운 대표님께서 책임져 주실 겁니다. 그럼 BS북의 미래를 함께 해주실 오진아 대표의 취임식이 있겠습니다.”

BS북의 임직원들은 오후 3시까지의 업무를 마친 후, 회사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 종무식을 진행 중이다.

작년만 해도 작은 컨퍼런스 홀을 빌려서 진행했던 종무식과 달리 우리 대표님께선 주머니에 가득 담으신 135억 원으로 가슴이 포근해지셨는지 나름 중, 고가의 레스토랑에서 종무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착즙이 무슨 휴롬 수준이네.’

이번 주는 언제 어디서 라운딩을 할 지가 주된 관심사인 오성민 대표는 마치 이산가족 상봉 후 다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사람처럼 옷소매로 촉촉해진 눈가를 훔쳤다.

차마 오진아 팀장의 친 아버지이기에 탈룰라가 될까 마음 속에서 들끓는 쌍욕은 복식호흡을 되뇌며 가까스로 참아내는 그때였다.

“자! 박수! 박수우!”

“와아…….”

오성민 대표와 함께 135억을 양분한 기존 BS북의 주주인 정병헌 운영 본부장, 그리고 이상철 출판 본부장이 소몰이꾼처럼 질러대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분위기는 점점 고조됐다.

‘아니 고조되길 바란 거겠지. 저런다고 분위기가 좋아 질 리는 없겠지만…… 뭐. 지금 상황으로는 어쩔 수 없지.’

오성민 대표와 이상철, 정병헌 본부장과 달리 BS북의 다른 직원들은 전반적으로 단상 위로 올라서는 BS북의 새로운 대표, 내 공모자인 그녀를 보며 마지 못해 박수를 치는 분위기였다.

지난 11일.

킵비트 본사 대표실에서 단풍 삼촌과 BS북의 임원진들은 결국 135억에 합의를 봤다. 하지만 BS북 직원들의 입장에서는 자세한 내막은 모른 채 지금으로부터 대략 보름 전 사내메일 공지로 BS북의 새로운 대표 이사 선임 공지가 올라왔기에 벙 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간 오진아가 아무리 대단한 실적을 냈다고 해도, 이사급을 건너뛰고 대표가 된다는 건 BS북이 좋좋소 대표 주자임을 감안 하더라도 너무 갑작스럽고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사내메일 공지를 보고 나서야 조팟놈 같은 몇몇 눈치 빠른 사람들은 오성민 대표와 오진아 팀장이 혈연 관계가 아니냐며 강경진보다 더한 낙하산이 아니냐며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무식과 함께 오진아의 대표 취임식이 있는 오늘까지 BS북의 분위기는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니 다들 맥아리 없이, 마지못해 박수를 치는 거겠지.

“안녕하세요 BS북의 임직원 여러분. 내년, 그러니 바로 내일부터 BS북의 새로운 대표가 될 오진아입니다. 저는 앞으로…….”

대표 취임식임에도 불구하고 오진아는 여전히 평소의 감정 없는 표정 그대로 덤덤히 자신이 대표로서 이끌어나갈 포부 등을 이어 나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맥주처럼 들이키며 인상을 찌푸리던 사람들도 이어진 오진아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직원의 실적에 비례한 개인별, 팀별, 본부별 인센 지급 그리고 포괄임금제의 폐기.

거기에 허울뿐이던 야근 수당 지급은 물론 고작 월급에 10만원 얹어 주면서 식대라고 자위하던 금액 대신 제대로 된 밥 한 끼를 먹을 수 있게 하는 식대 제공. 심지어 미팅 시 작가가 어떤 메뉴를 고르는지 눈치 보지 않고 계산할 수 있는 법인 카드 지급까지 온갖 사내 복지와 혜택을 늘어놓았다.

그 외에도 우리 엘가에서는 이미 진행하고 있는 기본적인 복지의 반의 반 정도 수준을 도입한다는 말에, 말단 직원들 사이에선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와…… 대박. 이정도 복지면 거의 대기업 수준 아니에요? 연차가 저 정도로 늘어나면 진짜 회사 다닐 만하겠는데요? 연차 안 쓴 것도 돈으로 다 준대잖아요!”

“저는 다른 것보다 청소 업체 부른다는 게 좋아요. 이제 우리가 청소 안 해도 되는 거잖아요!”

BS북은 그동안 출판업계 탑일 뿐만 아니라 좋좋소 업계에서도 탑이라고 손꼽힐 정도로 빌어먹을 짓을 많이 했다. 그중 대표적인 게, 매주 화요일마다 전직원이 각자 담당구역을 번갈아 가면서 청소를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좋소스러웠던 건 조팟놈이나 김동현 팀장같이 장급 중에 연차가 좀 쌓였다 하는 양반들은 연차를 들먹이며 청소 담당 구역에 지들 이름을 아예 빼버렸다는 뜻이었다.

‘조팟새끼, 일하는 능력은 노비 수준이면서 젊꼰짓은 대감 수준이었지.’

물론 조팟놈은 다른 직원들이 서로 귓가에 속삭이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말임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젊꼰이란 원래 그런 놈들이니까.

모두가 동상이몽을 꿈꾸며 히죽이는 그때, 표정의 변화 없이 대표 취임식을 이어 가던 오진아가 잠시 말을 멈추자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녀를 향했다.

“……제가 본격적인 BS북의 대표 자리에 오르기 전, 임직원 여러분이 모두 모이신 이 자리에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지난 주 전사 메일로 제 대표이사 발령 공고 메일이 나온 후 많은 분들께서 의문을 가지셨을 부분에 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저와 오성민 대표님의 관계에 관해서요.”

갑작스러운 오진아의 말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특히 조팟놈은 뱁새 같은 눈을 튀어나올 듯이 부릅떴다.

나도 군중심리에 휩쓸린듯 살짝 입을 벌려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대표 취임식을 하는 오진아의 멘트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나와 다 협의된 부분이었으니까.

“많은 분들이 추측하셨듯 오성민 대표님은 제 아버지가 맞습니다. 그리고 강경진 웹툰 본부장님은 저와 친척 관계에 있고요.”

대부분이 이 사실을 예측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몇몇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와 강경진 본부장님이 낙하산이 아니냐 하는 얘기를 부인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대표 취임식에 굳이 이 말을 꺼내는 건 혈연이든, 지연이든, 학연이든, 제가 BS북의 대표로 있는 한 BS북은 그 어떤 관계도 상관없이 실력 위주로 직원을 채용할 것이란 뜻입니다.”

“그 말은 앞으로 낙하산 인사는 없으리라는 뜻입니까?”

오진아 팀장에 의해 갑작스럽게 자신의 낙하산 인사가 노출된 강경진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물었고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오진아의 입가가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아뇨, 저와 어떤 관계가 있든 없든 간에 유능한 직원이 있다면 무조건 채용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전 이 자리를 빌어 사내 추천 제도 도입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솔직히 실력, 학벌, 경력면으로만 보자면 오진아나 강경진이나 둘다 BS북 같은 좋좋소에 있을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나처럼 객관적인 눈으로 봤을 때나 판단이 가능한 얘기지.

오진아나 강경진의 스펙을 모르고, 자신들의 스펙에 대한 자기객관화가 되지 않은 조팟 같은 직원들이 보기에 그들은 낙하산일 뿐이다. 비록 오진아가 그간 보여준 실적이 낙하산이 아님을 증명했어도 대표의 딸로서 대표이사 자리까지 초고속 로켓 승진을 한 오진아 팀장의 경우 낙하산이란 낙인을 더 떼기 어려울 터.

그렇기에 오진아는 사람들이 뒷말로 웅성거리던 사실을 대놓고 밝히고 그 파훼법으로 사내 추천 제도 도입을 언급했다.

사내 추천 제도란 전국에 수많은 출판사들이 점점 몸집을 불리고 경력직 편집자 빼가기가 자행되는 시점에 소설피아에서 도입한 제도다.

물론, 근미래에 소설피아에서 이 제도를 통해 타 플랫폼 및 출판사로 빠져나가는 인재 유출을 방지할 목적도 있지만 BS북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는 건 낙하산 인사의 논란을 파훼하는 게 주 목적이다.

“여러분의 형제, 자매, 선후배, 그 누구라도 상관없습니다. 사내 추전 제도는 우선 경력직으로만 진행할 예정입니다. 총 이백만 원의 보상 금액으로 진행될 예정이고. 추천 제도를 통한 경력직 입사자가 3개월 수습 기간이 종료 되었을 때 1차 지급 금액 백만 원, 해당 입사자의 근속 1년 시점에 2차 지급 금액 백만 원씩 바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와아씨! 후배들 연락 싹 돌려야겠는데요?”

“미쳤어요? 일단 회사 돌아가는 꼴 봐야지, 저 말을 어떻게 믿어요?”

“뭐가 됐든 입사하고 3개월만 다녀도 백만 원 받는 건데 나쁠 건 없잖아요?”

신임 대표 오진아의 입에서 사내 추천 제도에 관한 얘기가 나오자 여기저기선 설왕설래하는 말이 오갔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오진아가 낙하산이라는 것에선 분산되었다는 점이다.

“BS북 직원 채용 그리고 기존 임직원 분들의 복지 부분은 이전과 확연히 달라질 것을 약속드립니다. 다만, 임직원 여러분들께서도 제게 한 가지를 약속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가는 미소를 짓던 오진아의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간 BS북에서 함께 해주셨던 분들은 이런 의문을 가지셨을 겁니다. BS북이 다른 웹소설 출판사보다 더 오랜 경력을 지니고, 대리점 유통망도 지니고 있는데 왜 기업의 성장폭은 현저히 낮은지에 관해서요.”

지금부터 오진아가 할 말은 대놓고 자신의 아버지인 오성민 대표와 기존의 경영진을 까내리는 말을 할 예정이기에 나 역시 내 앞에 놓인 와인을 후루룩 들이켰다.

집필과 회사 경영을 위해 평소엔 술을 안 마시는 나지만 오늘 같은 날엔 축배를 들지 않을 순 없으니까.

“성장 둔화 요인에 관해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겠지만, 가장 큰 고질병을 뽑자면 저는 단 한가지를 뽑을 수 있겠네요. 바로 인력 감축이죠.”

““…….””

드문드문 웃음 소리가 메아리치던 이탈리안 레스토랑 안이 고요한 적막감으로 가득 휩싸였다.

“많은 분들이 의아했을 겁니다. 대체 ‘저 분’은 회사에서 딱히 하는 일도 없고 실적도 없는데 왜 잘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요. 아, 물론 현재 지금 이 자리에 그런 분이 계시다는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간 BS북에서 해왔듯 능력 없는 직원이라도 스스로 회사를 걸어 나가지 않을 때까지 계속 붙잡고 있는 일은 없으리라는 뜻입니다.”

오진아의 말에 구석 자리에서 딸꾹질 소리가 나왔고 눈길을 줄 필요도 없이 그 소리의 출처는 조팟놈이었다.

“우리 BS북에서 제가 원하는 인재상, 그리고 앞으로 함께 회사를 성장시키면서 함께 할 분들에 대해서는 제가 책임지고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할 생각입니다.”

딸꾹— 딸꾹—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월급루팡을 하고 있다, 다른 곳에 갈 곳이 없는데 BS북에서는 연차가 쌓여서 더 버텨도 되겠다 생각하시는 분들. 물론 그런 분들은 없으시겠지만, 혹시라도 일을 하다 그런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미리 준비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조팟놈 뿐만이 아니라 그간 강경진과 이전 1팀 팀장 한우석의 뒤를 개미핥기처럼 핥던 이형석 팀장, 그리고 몇몇 직원들의 딸꾹질이 아카펠라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조화로운 화음을 들으며 오진아는 지금껏 내가 그녀를 알고 지내던 중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다.

“앞으론 여러분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BS북은 철저히 그 성과와 그간의 실적에 비례한 합당한 대우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퇴사하실 분들은 미리 말해주세요. 실업 급여 받고 나가실 수 있게 해드릴 테니까요. 물론 그런 분은 안 계시겠지만요.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한 해 동안 고생 많으셨고,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잔을 들어 올리는 오진아 대표의 매서운 시선이 허공으로 들어 올려졌다.

내려치기 직전, 가장 높이 솟아오른 단두대의 칼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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