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 그러려고 번 돈이니까.
* * *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의 중심이라는 강남.
그리고 그 강남에어 메인 지역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9호선 언주역 부근은 신축 건물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강남차병원과 작고 큰 규모의 병원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 주변 환경과는 다소 이질적인 킵비트 라는 거대한 간판이 쓰여진 11층짜리 신축 빌딩의 외벽이 포근한 겨울 햇빛에 빛나 반짝였다.
똑똑똑—
“대표님, BS북에서 방문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 반짝이는 건물의 가장 높은 층이자 킵비트의 대표실이 있는 11층. 킵비트의 대주주이자 대표인 이무진이 자신처럼 건장한 사내의 인사를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시죠. 대표님은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잠시 후, 거대한 덩치의 비서의 손짓에 남녀 다섯이 그 안으로 들어서자 이무진 대표는 그들을 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칼자국으로 도배된 얼굴로 건네는 이무진의 미소를 보면서 움찔거리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이무진 본부…… 아니, 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이고! 정병헌 본부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랑과평화 작가님이랑 코즈일 작가님 작품 이관 미팅 이후로 처음 뵙는 거니까, 보자아…… 거진 반년만에 뵙습니다! 그아하하하!”
“끄윽, 하…… 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BS북의 운영 본부장 정병헌은 자신의 손을 으스러뜨리려는 듯이 꽉 움켜쥐는 이무진의 악수에 웃음 섞인 인상을 지으며 황급히 손을 빼내며 일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BS북에 오성민 대표님과 이상철 본부장님, 강경진 본부장님, 그리고 이쪽은 잘 알고 계시는 오진아 팀장님이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성민입니다.”
“출판 본부장 이상철입니다.”
“웹툰 총괄 강경진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표님.”
웃음 뒤에 살기를 감춘 BS북 사람들의 미소를 마주하며 이무진은 빙긋 미소 지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들 바쁘신 분들이시니 바로 이야기 나누시죠. 이쪽으로.”
이무진이 가볍게 취한 손짓에 따라 BS북 사람들이 대표실 중앙에 자리한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까드득—
송곳니가 드러나게 사나운 미소를 지어보인 이무진이, 자리 앞에 놓인 유리병 주스를 따 게걸스럽게 들이키곤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그리곤 정병헌 본부장을 향해 사나운 시선을 옮겼다.
“제가 제안을 했던 건 오진아 팀장님이었는데 정병헌 본부장님께 답변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드렸던 제안에서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시다고요?”
“우선 제안해주신 부분은 감사하지만, 아시다시피 웹소설 출판 업계에서 우리 BS북은—”
“10억 더 얹어 드리죠. 110억 어떻습니까?”
“?!”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툭 꺼낸 이무진 대표의 말에 BS북 사람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아니, 이무진 대표님. 단순히 금액적인 부분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부족합니까? 10억 더 얹어 드리죠.”
“…….”
어느 협상이라도 서로 상대의 패를 간파하며 조율하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지금 이무진 대표는 그 모든 과정을 깡그리 무시해가고 있는 거였다.
상대의 패를 듣기도 전에 심야 택시비 따따블을 외치듯 10억씩 얹어 주는 상황에 오성민 대표와 본부장들의 표정은 다채롭게 일그러졌다.
오성민 대표와 운영 본부장 정병헌, 출판 본부장 이상철의 입가는 희열로 꿈틀거렸다. 반면, 강경진 본부장과 오진아 팀장은 감정의 동요를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다만 힘이 꽉 들어간 강경진 본부장의 손엔 평소와 달리 핏줄이 잔뜩 불거져 있었다.
“왜 아무 말이 없으십니까? 120억 원이 적은 금액은 아닐 텐데요? 아니면 원하시는 다른 조건이라도 있는 겁니까? 있으면 편히 말씀해 보시죠.”
이무진 대표는 자신의 자리에서 다리를 쫙 편 채 두툼한 팔을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를 꼬거나 목을 우두둑 소리가 나게 꺾는 행동 따윈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험악한 인상 때문인지 BS북 사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편하게 말하라는 이무진 대표의 말에도 서로 머리를 굴리기에만 바쁘던 그때, 오성민 대표가 침묵을 깼다.
“킵비트에서 BS북의 지분 49.98%를 인수하는 금액이야 서로 협의가 가능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오진아 팀장을 대표 자리에 앉히고 남은 지분을 모두 오진아 팀장에게로 돌리는 건 아무래도…….”
“그으흐흐, 설마 오진아 팀장의 경력이 짧아서 우려된다는 말을 하시는 건 아니겠죠? 오성민 대표님?”
“…….”
이무진 대표의 입에서 쇳소리 같은 비릿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이어받은 건 오성민 대표가 아닌 강경진이었다.
“아뇨, 그 말이 맞습니다. 이 대표님께서도 아시는 것처럼 오진아 팀장이 오성민 대표님의 따님인 건 맞습니다. 하지만 현재 BS북에 저희 임원진을 제외하고선,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갑작스럽게 회사의 대표 이사가 오진아 팀장이 된다면 회사 분위기 자체가 상당히 어수선해질 겁니다.”
“오…… 그럼 금액 문제가 아니라 회사 분위기가 걱정이 되는 거라는 말입니까?”
강경진의 말이 흥미롭다는 듯이 듣고 있던 이무진 대표는 팔짱을 꼈다.
“오진아 팀장이 대표가 되면 당연히 회사 내의 분위기는 그리 될 수밖에 없겠죠. 거기다 미숙한 경영이라도 발생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BS북의 작가들이 떠안게 될—”
“그으흐흐흐.”
“……?”
결연한 얼굴로 내뱉는 강경진의 말에도 이무진 대표가 비릿한 미소만 짓자 다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개소리도 작작 하셔야지.”
“뭐, 뭐라고 했습니까, 지금!”
“어이, 물건 팔러 왔으면 값만 흥정하자고. 내가 당신들 말장난이나 듣자고 귀한 시간 낸 줄 알아?”
“뭐요?! 이 사람이 지금 누구 앞에서 망발을!”
“하아, 낙하산이 다른 낙하산 걱정하는 걸 보니 기가 차지 않겠습니까?”
기가 찬다는 듯 옅은 한숨을 내쉬며 뱉은 이무진 대표의 말에 강경진의 몸이 움찔거렸다.
“제가 알아 보니 웹소설 관련 경력은 전혀 없고 순문학 하나 내셨더군요? 팔리지도 않아서 중고책 서점에 가득 쌓여있다고 하던데. 그런데 그보다 더 웃긴 건 강경진 본부장님 또한 오성민 대표의 친척이라고 하시던 것 같던데요? 정확히는 대표님 아내분의 처조카라고 하셨나?”
“지금 뒷조사를—”
강경진 본부장이 뭐라 항변을 하기도 전에, 이무진 대표는 자잘한 자상이 가득한 두툼한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려 그의 말을 멈추게 했다.
“거기다 이상철 출판 본부장님은 오성민 대표님의 대학 후배, 정병헌 운영 본부장님은 오성민 대표님과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 이상철 본부장님, 정병헌 본부장님하고 셋이서 강원랜드 종종 가신다던데, 다음에 저도 한번 가시죠. 저도 포커 좋아합니다, 그아하하하!”
““…….””
이상철 본부장과 정병헌 본부장이 학연과 지연으로 엮여있다는 건 오성민 대표가 그 누구한테도 밝히지 않은 극비리의 내용 중 하나.
자신의 딸인 오진아 팀장도, 처조카인 강경진 본부장도 알지 못한 사실이었기에 오성민 대표는 당혹감을 감추질 못했다.
“아, 조사 좀 했다고 고깝게 생각하진 말아주십쇼. 편의점 가서 담배 한 갑 사오는 것도 아니고 회사를 인수하는 건데 이 정도 조사는 해봐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설마 100억 원을 날로 삼키려고 하신 건 아니죠?”
“이무진 대표님! 말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닙니까!”
“지나치기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회사면서 자꾸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니까 이러는 거 아닙니까?”
이무진 대표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훑으며 말을 이었다.
“이사님들 그리고 오진아 팀장님 외에도 자체 조사를 했습니다. 비록 지금 제 입으로 언급하진 않겠지만, BS북에서 그간 어떤 일을 자행했는지는 명확히 알고 있죠.”
“하, 마치 우리 BS북이 그동안 비리라도 저지른 것처럼 말하시는군요. 그렇게 문제가 많은 회사면 대체 BS북을 왜 인수하려는 겁니까?”
마치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듯한 오성민 대표의 말에, 이무진 대표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릿한 미소를 지을 뿐, 즉답을 내놓진 않았다. 그리고 짧은 정적 후, 이무진 대표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오 대표님 말이 맞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 돈이면 다른 회사를 인수하는 게 훨씬 이득이죠. 그걸 알면서도 제가 BS북의 지분 49.98%를 120억 원에 인수하려는 건 앞에 계신 오진아 팀장님에게서 새로운 가능성을 봤기 때문입니다.”
“……?”
이무진 대표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오진아 팀장을 향해 쏠렸다.
“편집자로서 좋은 작품을 고르는 눈도 눈이지만 오진아 팀장님에겐 그게 있습니다. 바로 좋은 직원을 알아볼 수 있는 힘이!”
이무진 대표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가자, 오진아 팀장에게 잠시 쏠렸던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해 옮겼다.
“지금 오진아 팀장님 한 명을 믿고 일을 맡기려는데 BS북의 남은 지분을 모두 소유하는 대주주가 오진아 팀장이 아니게 된다? 그러면 저도 아쉬울 건 없습니다.”
“아쉬울 게 없다라. 그건 무슨 말로 해석해야 합니까?”
빠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가는 강경진 본부장의 말에 이무진 대표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다시금 사악한 미소로 화답했다.
“쇼핑을 하러 나온 사람은 나고. 내가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건 비단 BS북 뿐만이 아니란 말입니다. ‘All or nothing’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싸늘함으로 점철된 이무진 대표의 맹렬한 시선이 다시 오성민 대표를 향했다.
“다 가지던지 아니면 하나도 갖지 못하던지. 고르란 말입니까?”
“협상 안 되는 부분은 빼고 서로 챙길 거 챙기자는 말입니다.”
—단풍 삼촌! 고개 강경진 쪽으로 조금만 더 틀어봐. 어 그렇지! 딱 좋다!
킵비트의 이무진 대표와 BS북의 임직원들이 날 선 미팅을 하는 그 사이, LGA컴퍼니와 킵비트의 실질적인 대표인 박정우는 이무진 대표의 셔츠 단추에 부착된 몰래카메라로 이 모든 광경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삼촌, 그리고 돈 적당히 쓸 생각 말고 펑펑 써. 그러려고 번 돈이니까.
회귀자 박정우.
그는 자신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던 강경진 본부장의 모습을 카메라 화면으로 지켜보며, 회귀 후 가장 행복한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