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26화 (126/201)

126화 ―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100억 원.

* * *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오진아 팀장의 말에, 좌중에선 놀람의 탄식과 함께 짧은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건 오성민 대표였다.

“박정우 파트장은 우선 나가 있지. 이 얘기는—”

“아뇨, 정우 파트장님도 같이 들을 자격이 있어요. 그동안 같은 팀원으로서, 그리고 팀장으로서 지켜본 정우 파트장님은 그 누구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

단호함이 가득 담긴 오진아 팀장의 말에 오성민 대표는 잠시 표정을 구기며 나를 흘겼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내 묘한 미소와 함께 자신의 딸을 향해 옮겨갔다.

“네가 아는 걸 그럼 정우 파트장도 모두 안다고 볼 수 있는 거야?”

“네, 아버지. 회사 운영 및 업무에 관련해 제가 아는 걸 정우 파트장님이 모르는 건 없어요. 정우 매니저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기회를 놓치지 않는 사람이라……. 다시 앉지.”

“예, 대표님.”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린 뒤 손짓하는 오성민 대표의 말에, 나는 일으켰던 몸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어때요? 아버지랑 본부장님들은 생각 다 정리되셨나요? 100억 원과 70억 원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계산하는 게 시간이 오래 걸릴 거로 생각되지는 않는데요.”

“어려울 것 없는 질문이긴 하지. 70억 원 보다는 100억 원이 당연히 높으니까.”

“대표님! 아니, 삼촌! 진아가 말하는 건 사실상 회사 경영권을 넘기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종이책 시절부터 가지고 온 BS북을 경쟁 업체에 넘긴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오진아 팀장이 가면을 벗은 것처럼, 강경진 또한 자신의 민낯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지난 삶에선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모습이다.

내심 그렇지 않을까 추측만 하고 있었던 그 광경을, 작가와 회사의 골수를 빨아 먹는 이 양아치의 검은 속내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자 판도라의 상자 안쪽을 훔쳐보는 기분이 든다.

“경진 오빠. 우리끼리만 있는데 이제 좀 솔직해지는 게 어때? BS북을 팔고 그 차액을 남길 생각인데 경쟁 업체에 넘기는 게 무슨 상관이야? 100억 원이 떨어지면 그걸 어떻게 나눌 건지 고민만 하면 되는 거지.”

“오진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뉴테라랩스를 통해 투자금을 받으면—”

오진아가 날선 목소리로 강경진의 말을 끊었다.

“경영참여형 사모펀드가 아니라 전문투자형 사모펀드라고 해서 70억 투자한 회사가 가만히 손만 놓고 있을까? 설마 그런 순진한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가면을 벗어 던진 오진아는 거침없었다.

내가 강경진을 무너뜨리려 생각했던 것처럼 오진아 또한 그것만을 생각해 왔다.

비록 왕좌에 발을 걸쳤던 강경진을 끌어내리는 게 지금이라는 걸 몰랐을 뿐이지, 지금이 그 순간임을 깨닫고 기회를 잡아챈 오진아 팀장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날카로운 말로 강경진의 틈을 파고들었다.

“그게 아니면 아버지랑 본부장님들이 그렇게 믿기를 바라는 건가?”

“지금 무슨—”

“자, 그만. 우리끼리 있어도 아직 회의 중이다. 다들 언성 낮춰.”

“네, 아버지.”

“…….”

오성민 대표의 제지에 강경진과 오진아는 서로 말을 멈췄다.

“100억…… 100억 원이라…….”

그리고 오성민 대표는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이 검지로 책상을 툭툭 두들기기 시작했다.

“진아야. LGA컴퍼니에서 BS북을 인수하는 금액이 100억인 게 확실해?”

“정확히 구분하자면 LGA컴퍼니가 아니라 이무진이 대주주로 있는 킵비트에서 인수하는 거죠. BS북 지분 49.98% 인수에 100억 원은 분명히 이야기를 전달받았어요.”

“그렇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긴 하구나. 헤드헌팅 자리에서 일개 팀장한테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설명을 이어받던 오성민 대표의 눈이 번뜩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할 테다. 아무리 헤드헌팅 자리라고 해도 일개 팀장이 들을 수 있는 제안의 범주를 넘어선 말이었으니까.

강경진의 투자 제안을 막아내느라 급하게 지르다 보니 빈틈이 생긴 모양이다. 비록 오진아 팀장과 본부장급 이상만 있는 자리지만 내가 나서서 수습을 해야 하는 그때, 오진아 팀장의 말이 이어졌다.

“제가 일개 팀장이긴 하죠. 하지만 LGA컴퍼니에서는 직급, 직책과 상관없이 업무 능력 그리고 인성을 본다고 하더라고요.”

“능력과 인성이라…… 그걸 고작 한 번의 미팅에서 간파했다고?”

여전히 의심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는 오성민 대표의 말에 오진아 팀장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BS북과 LGA컴퍼니 모두 계약했던 제 작가님께 작품 담당자인 제가 어떤지를 많이 물어보셨다고 하더라고요. 비록 첫 만남이었지만 이무진 씨는 사람 보는 눈이 있었던 거죠.”

“하하, 보는 눈이 있었다라.”

“네, 오래 지켜봤다고 그 사람을 전부 아는 게 아니니까요. 한우석 팀장 같이 횡령이나 하고 감방에 가는 사람이 있잖아요. 제 학력은 모두 뒤로 제쳐두고라도 출판업계에 입사한 후 저처럼 빠르고 많은 실적을 낸 편집자는 없는 걸로 아는데요. 박정우 파트장님을 제외하면요.”

“그건 맞는 말이지. 네가 내 딸인 걸 밝힌 건 아니고?”

비릿한 미소를 짓던 오성민 대표의 눈빛이 한층 매서워졌다. 하지만 오진아 팀장은 그 눈빛을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음…… 그것도 말하긴 했어요.”

“오진아!”

“씁, 조용.”

강경진이 오진아 팀장의 이름을 부르며 언성을 높였지만 오성민 대표가 바로 그를 제지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이무진 씨는 BS북이 아닌 피스원을 인수해 몸집을 불리겠다는 말을 먼저 하더라고요. 60억에.”

“피스원? 그 규모도 작은 곳을 60억에? 총 직원이 스무 명도 안 되는 곳이잖아?”

다소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오성민의 말에 오진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총 직원이 고작 스무 명도 안 되는 곳이죠. 하지만 소수 정예로 굵직한 대작만 뽑아내는 출판사라는 것도 알고 계시죠?”

“흠…….”

거침없이 쏟아지는 오진아 팀장의 말에 오성민 대표는 옅은 신음을 내뱉었다. 오진아 팀장이 말했듯 피스원미디어는 소수 정예지만 각 플랫폼당 상당한 대작을 한 개씩 지니고 있는 알짜배기 출판사였으니까.

“그래서 그때 제 신분을 밝히면서 말했어요. 비록 일개 팀장일 뿐이지만 피스원에 60억을 줄 바에야, 저희 BS북을 인수하라고 말했죠. 제가 결정권자는 아니지만 조율을 해 볼 수 있다고요.”

“그래서 100억 원이란 말이 나온 거였군.”

“아뇨, 처음엔 90억을 말했지만 제가 BS북같이 업계 탑인 회사를 인수하려면 100억 원은 맞춰줘야 한다고 말했죠. 비록 큰 실적이 없는 구색만 맞춘 꼴이지만 웹툰 부문도 있긴 하고요.”

강경진을 슬쩍 흘기며 뱉어낸 오진아 팀장의 말에, 강경진이 사납게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오진아 팀장의 말은 쉴 틈 없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때 이무진 씨가 말하더라고요. BS북 인수는 가능하다. 하지만 남은 지분의 소유자가 저로 되어 있어야지 인수를 할 수 있을 거라고요.”

“삼촌! 이건 들을 가치도 없는 얘기 아닙니까? 진아가 실적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BS북의 나머지 주식을 진아 이름으로 돌리다뇨? 아무리 경우가 없어도 이런―”

“경진 오빠. 경우가 없긴 무슨 경우가 없어? 내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니라 이무진 씨가 한 제안인데. 정 믿기 힘들면 오빠가 직접 확인해보던가.”

와락 인상을 구긴 강견진이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오진아의 말은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 기관차처럼 멈출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 잘 생각해 보세요. 이 제안이 어떤 형식으로 들어왔든, 100억 원이란 돈은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니까요. 아버지가 항상 꿈꾸던 것도 100억 원에 회사 매각하는 거였잖아요. 그리고 회사 지분 반을 판다고 해도 여전히 제가 대주주로 있는데 걱정할 게 뭐가 있으세요?”

“음…….”

100억 원에 회사를 매각하고 런 하는 것. 그게 오성민 대표의 숙원 사업이자 항상 꿈꾸던 일이었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냉큼 회사를 팔아버리기엔 아까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오성민 대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무진 씨가 BS북을 인수하면 사실상 저를 대표 자리에 앉힌다는 말이기에 저도 부담스러웠던 건 사실이에요. 그래서 저도 따로 말씀을 드리지 않았던 거고요. 하지만 경진 오빠가 말하는 것처럼 미래가 불확실한 투자보다는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100억 원이 더 낫지 않겠어요?”

“…….”

오성민 대표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이미 칼을 빼들은 오진아 팀장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혹시 우려하시는 게 BS북과 LGA컴퍼니의 합병이라면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무진 씨도 BS북을 인수해 작품 종수를 늘리고 다양한 IP확보를 할 생각이니까요.”

“LGA컴퍼니와 BS북을 완전히 독립해서 경영한다는 말이냐?”

“네, 아버지.”

오진아 씨가 아주 앙큼한 짓을 한다.

저런 말은 전혀 나와 협의가 되지 않은 부분이긴 한데, 칼자루를 쥔 김에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진행하려는 게 보인다.

‘뭐, 딱히 상관은 없지. BS북을 인수한다고 해도 애초에 BS북과 엘가를 합칠 생각은 조금도 없었으니까.’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에 읽힌 오진아 팀장의 표정을 보니 살짝 내 표정을 살피는 느낌이 든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요 진아 씨.

시켜달라고 해도 BS북이랑 엘가랑 합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고.

“선택만 하시면 되요 아버지. 확실하고 경영권 또한 제가 확실히 움켜쥘 수 있는 100억 원인지. 아니면 미래가 불분명한 70억 원인지요.”

100억 원은 결코 적은 금액이 아니다.

하지만 BS북이라는 업계 탑의 업체를 인수하는 데 결코 많은 금액도 아니다. 비록 방만한 경영으로 개판 5분 전의 모습이지만, 누가 뭐라해도 BS북은 여전히 업계 탑이니까.

톡…….

톡….

톡.

“좋아. 그럼 이무진하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 보도록 하지.”

“네, 아버지.”

“삼촌!”

그리고 오성민 대표의 결정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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