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방아쇠를 당길 때.
* * *
“장기적 관점에서는 합병을 하지 않는 게 좋다라…… 저는 BS북과 뉴테라랩스의 합병 목적을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오진아 팀장의 합병 반대 의견에 강경진은 말꼬리를 늘리며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는 듯이 강경진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출판 분야 단 하나에 매몰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시야를 넓히는 게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오진아 팀장님은 어떤 이유로 합병을 반대하는지 도리어 묻고 싶군요.”
“그건 BS북이 출판사이기 때문입니다.”
오진아 팀장은 감정의 변화 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한 문장의 글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 여기 계신 모든 임직원 분들의 명함에도 들어가 있는 문구로 BS북 그리고 BS툰의 경영 철학인 것을 모르시는 분은 없으실 겁니다. 그런데 가상 화폐 투자 회사인 뉴테라랩스. 강 본부장님께서 대표로 계신 그곳은 단순히 돈을 위한 회사가 아니던가요?”
오진아 팀장의 차가운 시선이 강경진을 향해 옮겨졌고,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모든 기업의 첫 번째 존재 이유가 이윤 추구인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사의 경영 철학과 맞지 않는 합병을 하고, 사모펀드 투자를 받으면서까지 회사를 성장시켜야 하느냐는 신중히 고려해봐야 할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하, 경영 철학? 좋은 말이죠. 제가 BS북에 처음 합류하게 된 것도 그 경영 철학 때문이니까요. 그러면 제가 다시 묻겠습니다. 뉴테라랩스가 BS북 그리고 BS툰의 경영 철학도 맞지 않는다고 해서 70억과 저울질이 되는 걸까요?”
“그건—”
“저도 오진아 팀장님이 우려하시는 부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뉴테라랩스와 BS북이 합병을 한다고 해서 BS북은 지금과 달라질 게 전혀 없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강경진은 마치 오진아 팀장을 배려하듯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이는 질문이 아닌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한 장치였을 뿐. 강경진은 오진아 팀장이 답을 내놓기도 전에 곧장 말을 이어 나갔다.
“앞서 설명드렸다시피 뉴테라랩스와 BS북의 합병은 단지 70억 투자를 위한 수단일 뿐이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사모펀드라고 해도 경영 참여형이 아닌—”
“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순수하게 수익만을 추구하는 전문투자형 사모펀드라고 하셨죠. 하지만 강 본부장님께서 생각하시기에도 앞뒤가 안 맞지 않습니까? 수익을 추구하는데 경영은 참여하지는 않는다는 게요?”
조금의 감정 변화도 읽히지 않는 오진아 팀장의 차가운 말들이 강경진을 연거푸 공격했다.
하지만 강경진은 이를 그대로 두고 볼 위인이 결코 아니었다. 난처한 웃음을 지었지만, 강경진의 눈빛엔 짜증 나는 기색이 묻어 나왔다.
“조금 전부터 오진아 팀장님께선 이윤 추구가 마치 기업이 추구해서는 안 될 절대 악처럼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제 말은 그 뜻이 아닙니다. 단지—”
“물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진아 팀장님이 그런 의도로 꺼낸 말은 아니라는 것을요. 출판 업계에 아무런 경력도 없는 진아 팀장님을 이렇게 불타오르게 할 정도로 이 업계는 매력적인 곳이죠.”
푸근한 미소 속에서 강경진은 오진아의 말을 깎아내리고 말뜻을 곡해해나갔다.
웃긴 건 강경진 자기 자신도 무슨 순문학 똥글 하나 출간한 것 외엔 웹소설 업계와 아무런 연관도 없다는 점이다.
“굳이 따지고 보자면 뉴테라랩스가 출판계와 아주 연관이 없다고 할 수는 없죠. 뉴테라랩스가 제작하고 발행할 NFT 기술은 오직 BS북 그리고 BS툰의 지적 재산권을 이용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제가 대표 이사로 이름을 올려놓고 있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상당히 조심스럽긴 하지만…….”
강경진은 시꺼먼 속내 위로 유들유들한 가면을 쓴 채, 오진아 팀장을 향해 빙긋 미소 지었다.
“뉴테라랩스는 국내 그 어느 가상 화폐 회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기술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솔직히 회사 입장에서는 NFT가 아닌 가상화폐 중에서 돈이 되는 다른 분야를 시도하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실제로 뉴테라랩스의 직원들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고요.”
그리고 강경진의 역겨운 자기 포장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회귀 전 그가 내 담당자일 때 흔히 써먹던 익숙한 수법.
뱀 같은 혀를 꿈틀대는 것을 다시 보게 되니, 분노가 혈관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양보하는 척, 위해주는 척하는 가스라이팅.
작가님을 위해서 자기가 이렇게 희생하는 거다.
자기한테 담당 받길 희망하는 작가들이 줄을 서 있지만 내 잠재력을 보고 나만 담당하는 거라는 둥.
자신은 훨씬 더 대단하고, 잘나고, 훌륭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인데 마치 BS북을 위해 자신과 자신의 회사가 희생한다는 뉘양스의 개소리가 메아리처럼 뇌리를 파고든다.
“만약 오진아 팀장님 말씀처럼 제가 정말 돈만 보는 사람이었다면, 저는 굳이 NFT 사업을 제안하지 않았을 겁니다. NFT 사업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저도 더 안정적으로 뉴테라랩스의 경영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럼 강 본부장님의 말씀은 뉴테라랩스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BS북에 기회를 준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 말이 맞습니까?”
오진아 팀장의 차가운 말에 강경진은 푸근한 미소로 화답했다.
“하하, 기회를 준다니요. 저는 그저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는 겁니다. 제가 그런 선택을 하기로 정한 건, 진아 팀장님의 말씀처럼 출판사의 가치를 단지 돈으로만 보지 않기 때문이죠.”
“…….”
“금융업처럼 단순히 돈을 찍어내는 사업보다 새로운 콘텐츠와 트렌드를 창조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 가치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찌나 지랄이 풍년인지 곳간마다 넘쳐흐를 개소리였다.
대회의실 안에 돈 보다 콘텐츠의 가치를 우선순위에 둔다는 강경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바보들은 없었다.
“하지만―”
“계속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것 같은데,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정병헌 운영본부장이 보이지 않는 손을 강경진의 등 뒤에 얹었다.
“저도 정 본부장님 생각과 같습니다. 오진아 팀장도 궁금한 건 다 해결됐을 것 같고, 다들 추가로 할 말도 없는 것 같은데 회의는 이쯤 마무리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정병헌 운영본부장에 이어 이상철 출판본부장 마저 70억이란 숫자에 눈이 먼 모양이었다.
이상철 출판본부장은 자신의 말에 맞장구를 쳐달라는 듯이 오성민 대표를 향해 시선을 옮겼고 눈빛을 접수한 오성민 대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세한 사안은 본부장님들 따로 모여서 회의 진행하도록 하고, 다른 의견은 없는 것 같으니 후년도 사업 계획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이견 있습니다, 대표님.”
“박정우 파트장, 지금 이야기 다 끝난 거 안 보이나? 판무 1팀 의견은 오진아 팀장이 이미 충분히 전달한 것 같은데?”
여기서 끝내면 안 되지.
오진아 팀장이 제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오체분시가 됐는데?
부하 직원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진아 팀장님께서 핵심을 잘 전달해 주셨지만, 저도 추가로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강경진 본부장님께서 팀장님 외에도 이견이 있으면 자유롭게 말해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괜찮겠습니까? 본부장님?”
“물론입니다. 우리 BS북의 강점이 수평적인 구조 아니겠습니까? 이번 70억 사모펀드 투자 건에 관해 궁금한 점이 추가로 있다면 기탄없이 물어봐 주시죠.”
강경진은 내 말에 선교사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질문을 허락했다.
체면을 중시하는 강경진이 모두의 앞에서 대놓고 묻는 내 제안을 거절할 순 없었을 테지.
“저는 BS북과 뉴테라랩스의 합병을 떠나, NFT 사업 자체가 완전히 실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확신합니다.”
그리고 강경진은 그 체면 때문에 자신의 계획이 박살 난다는 걸 모를 것이다.
강경진 이 쓰레기 새끼가 BS북을 말아먹기 위해 그간 얼마나 힘겹게 공든 탑을 쌓아 올렸든 나는 강경진의 손모가지부터 부숴버릴 생각이니까.
“NFT가 완전히 실패할 거라니……. 박정우 파트장,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자세히 말해주셔야 되겠습니다.”
거침없이 쏘아진 내 말에 강경진의 평온한 가면에 금이 갔고 대회의실 모두가 튀어나올 듯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는 강경진이 늘 그랬던 것처럼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NFT를 컨텐츠 분야, 특히 웹소설 원작의 웹툰과 연결시킨다는 강 본부장님의 생각은 상당히 혁신적입니다. 하지만 시대를 앞선 혁신적인 발상이 꼭 기업 매출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죠. 우선, 제가 생각하는 몇 가지 문제점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강경진 그리고 다른 이들이 말을 내뱉기도 전에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비트코인, 이더리움 등의 가상 화폐에 저도 관심이 무척 많습니다. 강 본부장님께서 설명해주시기 전에 NFT에 관련된 내용 또한 잘 알고 있었죠. 그리고 그 문제점에 대해서도 이 자리에 계신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가상 화폐에 관해 잘 안다는 것은 사실이다.
물론 회귀 전에 내가 코인을 사거나 NFT에 투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웹소설계에 코인 열풍을 몰고온 ‘코인개망’ 작가의 ‘한강 물은 여름에도 차다’에서 이야기한, 비트코인의 태동기부터 사실 기반의 자세하고 지엽적인 내용을 나는 하나도 빠트림 없이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코인개망 작가님, 이번 생에는 루나 사지 말고 평안하시길…….’
들리지 않을 짧은 기도를 코인개망 작가에게 건넨 후 나는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70억을 투자받은 뉴테라랩스가 NFT 기술 개발을 빠르게 성공한다고 해도 NFT 자체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문제는 플랫폼이죠.”
“…….”
대회의실의 다른 이들과 달리 강경진의 표정은 조금의 미동도 없다.
대가리 기름칠이 누구보도 잘 되어있는 강경진이 이런 문제점을 모르진 않았겠지.
“이미지를 블록체인 안에 기록했던 세계 최초의 NFT인 퀀텀뿐만이 아니라 퀀텀에서 영감을 받아 현재 제작 진행중인 전세계의 NFT도 각각의 플랫폼 내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어찌보면 웹소설보다도 못하죠.”
“웹소설만도 못하다니 그게 무슨……?”
“무슨 소리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 본부장들의 말에 나는 솟구치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며 말을 계속이어 갔다.
“웹소설만 해도 완결 되거나, 유통조건을 만족한 작품은 타 플랫폼에 유통이 됩니다. 쉽게 말해 소설피아에서 처음 연재를 시작한 글이라도 선독점 기간인 100화 분량이 넘어가면 테일랜드에서도, 웹월드에도 유통이 되죠. 하지만 NFT는 어떻습니까? 단 하나의 플랫폼에서만 거래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작고 경직된 시장.
이어진 설명에 사람들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여기서 놀라기엔 이르지.
“그런데 지금 뉴테라랩스의 경우 NFT기술 개발만 하신다는 거지, 아직 플랫폼 제작은 착수하지 않을 거로 알고 있습니다. 플랫폼 제작에 관한 인건비, 사무실 임대료 등 추가적으로 수많은 비용이 들 건데 70억이 과연 얼마나 남겠습니까?”
본부장들 그리고 오성민 대표마저 이 부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고 강경진의 입가는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경진아, 아직 놀라긴 이르지? 아직 내 말 다 끝나지도 않았다, 인마.’
오진아 팀장과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밑바닥에서 차근차근 올라가 강경진을 끌어내릴 생각이었지.
하지만 더는 강경진의 헛짓거리를 두 눈 뜨고 볼 수만은 없다.
BS북에서 거진 2년이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참을 만큼 참았다.
그 사이에 총알도 낭낭히 준비됐고.
이제 방아쇠를 당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