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18화 (118/201)

118화 ― 단두대.

* * *

오늘은 12월 8일 화요일.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아이리 스즈키 주임과 미팅이 끝나고 한 주가 더 흘렀다.

“작가님…… 지금 몇 시일까요? 네, 지금 4시죠. 그리고 작가님께서 원고 주신다고 했던 시간은 3시였는데, 기억하십니까? 그것도 전날 3시?”

“네네, 2천만 원이요? 네네, 은행 알아보세요 작가님. 저희 출판사지 은행 아니라니까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쪼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던가? BS북 판무 2팀은 오늘도 평소와 같은 모습이다.

1팀으로 넘어온 뒤로 조팟놈이 작가에게 성을 내는 모습을 보아도 이제 내 마음엔 강 같은 평화만 잔잔하게 흐른다.

타닥— 타다닥— 타다다다닥—

물론 평온한 건 내 마음뿐, 내 손가락은 물길을 거스르는 연어처럼 세차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중이다. 바로 내년 사업 계획서 때문에.

‘파트장이 되니까 이런 건 귀찮네.’

지난 8월 18일 파트장으로 진급한 후, 단순히 담당 작가들을 관리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일들이 생겼다.

기본적으론 파트장급 이상에게 시도 때도 없이 보내지는 본부장들과 대표의 이메일, 수시로 발생하는 회의들 그리고 의미 없는 게 분명한 페이퍼 워크들이 그것이다.

그리고 나는 의미 없는 페이퍼 워크 중 절정이라 할 수 있는 내년도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는 중이다.

‘귀찮아도 내가 해야지 어쩌겠어. 2팀 때처럼 사업 계획서를 일반 사원에게 떨굴 수도 없고.’

BS북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사업 계획서 시즌이 찾아온다. 그리고 2팀에 있던 시절 사업 계획서 작성은 아무런 지식이 없는 일반 사원들에게 떠넘겨지기 일쑤였다.

원래 조팟 새끼와 김동현 팀장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떠넘기기라는 직장인이 가장 해선 안 될 짓을 하는 게 2팀에서는 당연시됐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로 늘 대충 넘어가는 바이브의 김동현 팀장은 단지 사업 계획서 작성이 귀찮았을 뿐이고 조팟놈은 단지 아는 것도 없고 자기 일이 귀찮으니 일반 사원들에게 그 일을 떠넘기는 꼴이다.

타다닥— 드륵— 드르륵— 타다다닥—

‘문제는 그 일을 일반 사원들이 할 수 없다는 거지. 파트장도 모르는 걸 어떻게 하겠어.’

출판 본부에서의 사업 계획서 작성이 정말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는 건, 운영 본부 산하의 운영팀에서도 동일한 사업 계획서를 작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걸 서로 비교해가면서 하나로 합치는데 서로 다른 부분을 작성하는 것도 아닌 동일한 플랫폼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거기에 단순한 시간 탈취 개념뿐이다.

‘거기다 가장 최악인 건 어떻게 목표 매출을 잡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이지.’

작년인 2014년.

조팟의 떠넘김으로 인해 처음 사업 계획서를 작성했을 때 뿐만이 아니라 올해도 목표 매출에 대한 기준이 없다.

이 기준은 오직 본부장급 이상에서 정하는데, 본부장들과 대표는 목표 매출을 정확한 계산에 의해서가 아닌 본능적 감각을 통한 매출 측정이라는 게 문제다.

타다닥— 타닥— 타다다닥—

하지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지.

10월부터 시작된 사업 계획서 작성과 수정이 발표 당일인 오늘까지 두 달간이나 진행된 건 대표와 본부장의 본능적 매출 측정액이 주에 한 번, 어쩔 땐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일이 생겼으니까.

“정우 파트장님, 회의 시간 30분 전인데…… 제가 좀 도와줄까요?”

내 분노의 타이핑을 본 오진아 팀장이 슬쩍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지금 거의 다 마무리했어요.”

“그럼 전 회의실 먼저 들어가 있을게요.”

“네, 팀장님. 금방 가겠습니다.”

오진아 팀장이 잠시 후 대회의실 안으로 이동했고, 나는 이상철 출판본부장의 입맛에 따라 수정한 파일을 출력해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대회의실 안엔 로맨스팀의 팀장과 파트장 그리고 판무 2팀의 김동현 팀장과 조팟 또한 함께 들어와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조팟놈은 오늘도 이를 악물고 나를 보지 못한 척하고 있다. 그냥 인사 한번 하면 될 것을 대체 뭘 보고 자랐길래 저 모양 저 꼴의 인간이 회사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 정우 파트장. 사업 계획서 때문에 정신 없지? 고생이 많아.”

“아닙니다, 팀장님. 여기 1팀 사업 계획서 받으시죠.”

“오케이.”

김동현 팀장뿐만이 회의 참석자들의 자리에 서류를 미리 다 깔아 뒀을 때쯤.

“안녕하십니까.”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오늘 회의에 참여하는 파트장급 이상의 임직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저건…… 좀비?’

특히 그중에서도 운영팀 파트장의 얼굴이 가장 초췌했는데, 당장 쓰러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얼굴이었다.

운영팀 이형석 팀장, 그 간잽이 놈이 얼마나 쪼았으면 저리되었을까 싶긴 한데, 내 시선은 운영팀 파트장에게 그리 길게 머물지 않았다.

바로 선교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그 쓰레기 놈 때문에.

“하하, 다들 안녕하십니까?”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오랜만에 보니 좋네요. 한 층만 내려오면 되는데, 각자 바쁘니 그게 쉽지가 않네요, 하하.”

대회의실로 들어온 강경진은 어김없이 느긋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은 무해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다들 미리 와 있었네? 다들 앉자고.”

그리고 강경진이 자리에 앉자 곧이어 출판 본부 이상철 본부장, 운영 본부 정병헌 본부장에 이어 오성민 대표까지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보면 볼수록 닮은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오진아 매니저가 오성민 대표의 친딸이란 것을 처음 깨달았을 때만 하더라도, 오진아 매니저는 외탁 100%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의식할수록 오진아 매니저와 오성민 대표의 얼굴에서 비슷한 점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회의 시간 아직 조금 남긴 했는데, 다 왔으니 바로 회의 시작합시다.”

대회의실 안의 모두가 오성민 대표를 향해 시선을 옮겼고 그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눈빛을 받아내며 말을 시작했다.

“우선 이번 회의 시작에 앞서 2015년 올해 한 해는 정말 다사다난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출판 본부, 웹툰 본부 할 것 없이 말들이 많았지.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다 알 거라고 생각해.”

가시가 가득 박힌 오성민 대표의 말에도 강경진의 얼굴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마치 파브르의 트레이싱과 허접한 그림 실력으로 인한 폭행몬 작가의 ‘아카데미 회귀만 백만 번째’ 웹툰이 런칭하자마자 내려간 것은 결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한 여유 넘치는 표정이다.

“특히 판무 1팀 쪽에서는 유독 사건이 많았지. 그래서 1팀을 새롭게 개편한 거고. 새로운 1팀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데, 어때? 오 팀장이 보기에는 잘 굴러가고 있는 것 같나?”

느긋한 표정을 짓는 강경진을 보며 믿고 있는 구석이 있기라도 한 건가? 라는 생각을 하는 그때 오성민 대표의 날카로운 시선이 오진아 팀장을 향해 쏟아졌다.

“그렇습니다. 기존 1팀의 한우석 팀장과 김영진 파트장의 선인세 횡령과 직원들을 몰아붙이는 미숙한 팀 운영으로 인해 집단 퇴사라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죠.”

마치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오성민 대표의 눈빛에도 오진아 팀장은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 그와 똑 닮은 얼굴로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팀원의 수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고 실적을 늘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저는 함께 일할 사람으로 누구를 뽑아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네. 그럼 어떤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인성과 실력이 겸비된 사람을 뽑는 게 당연하다는 건 모두가 알 겁니다. 하지만 급히 인력 충원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차선책으로 수은 같은 사람을 거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으로 생각합니다.”

“수은 같은 사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오성민 대표의 말에 오진아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중세 유럽에서는 수은을 먹거나 피부에 직접 바르는 미백 화장품이 인기였다고 하죠. 하지만 수은을 먹어서 피부가 탱탱해지는 건 혈액 순환이 안 돼서 일시적으로 주름이 펴지는 거고 얼굴이 하얘지는 건 표피가 괴사해서 상대적으로 하얀 아래층 피부가 드러나는 거였죠.”

오진아는 자신의 아버지인 오성민 대표에게 시험을 받는 입장이다. 그래서였는지 오진아 팀장은 짧게 끝낼 수도 있는 말을 결연한 표정으로 계속 이어 나갔다.

“한우석 팀장은 전형적인 수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단기간에는 BS북의 실적에 도움을 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바르면 바를수록 피부가 썩어들어가는 수은처럼 저희 BS북도 썩어들어간 거죠.”

“흐음…….”

오성민 대표는 자신의 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을 흥미롭다는 듯이 경청했고 오진아 팀장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즉, 아무리 경력이 길고 단기적으로 실적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한우석 팀장 같은 사람이 회사에 들어온다면 회사를 썩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었습니다.”

사뭇 당돌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오진아 팀장의 말에 강경진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오직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으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떨림이었다.

‘……저 새끼, 왜 저래? 알고 보면 한우석을 데려온 것도 강경진 아니야?’

1년 365일, 늘 한결같이 수도승 같은 가면으로 속내를 감추는 강경진이 저런 격한 반응을 하는 것을 보면 한우석을 BS북으로 다시 데려온 게 오성민 대표 단독으로 행해진 일이 아니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리고 제가 팀장으로 있는 1팀에서는 그런 사람을 뽑을 생각도 없고 그런 사람이 없더라도 회사의 매출을 증대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1팀은 판무 2팀보다 더 적은 인원으로 더 높은 실적을 내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어진 오진아 팀장의 말에 판무 2팀 김동현 팀장과 조팟의 얼굴이 시뻘겋게 일그러졌다.

‘이거…… 오늘 일내는 건가?’

오진아 팀장의 맹공은 임원진만을 향하지 않았다. 오진아 팀장은 오늘 이 자리에서 BS북의 썩은 뿌리를 모두 단두대에 올리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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