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17화 (117/201)

117화 ― 초콜릿 같은 거군요?

* * *

“어…… 아…….”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아이리 스즈키 주임은 내가 거절 의사를 밝힐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이 얼어붙었다.

“시, 실례했습니다, 작가님. 하지만…… 어떤 점 때문에 저희 스튜디오와 계약을 하고 싶지 않으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린 아이리는 내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는, 아니, 저는 작가님의 글을 정말 좋게 보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해박한 요리 지식과 상상력이 넘치는 창의력인 전개! 그리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의 묘사까지!”

아이리는 내 글을 향한 팬심을 나타내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단지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님 원작의 한 명의 팬으로서 정말 함께 해보고 싶습니다. 계약 조건에 마음이 안 드시는 게 있다면 최대한 회사와 상의하여—”

“죄송합니다. 제가 원하는 조건을 맞춰주시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요.”

“…….”

조건을 듣지도 않고 단칼에 거절하는 내 모습에 아이리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작가님께서 원하시는 조건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실 수 없으실까요?”

하지만 이역만리에서 날아온 아이리의 패기와 열정은 상당했다.

“제 선에서 무조건 들어드릴 수 있다는 지키지 못할 말을 드리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저뿐만이 아니라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대표님께서도 작가님의 글을 정말 좋게 보고 계십니다. 협의가 가능한 부분이라면 저는 충분히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원하는 조건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가득하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도게자를 박을 것 같은 눈빛의 아이리에게 어설픈 이유를 들기보단 솔직한 내 속내를 말하는 게 더 나으리란 생각이 든다.

말한다고 해서 바뀔 순 없지만 그래도 정직원의 중요성에 대해 최소 한 번은 떠올릴 수 있을 테니까.

“음……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만…….”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결연한 눈빛으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아이리를 향해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잽 애니에서도 애니메이션화에 관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 잽, 애니. 역시 잽 애니가…….”

읊조리듯 잽 애니의 이름을 되뇌이던 아이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작가님.”

“……?”

“잽 애니와 달리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는 업계 후발 주자로서 판권 계약 시 최대한 작가님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드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아이리는 전보다 한층 더 침울해진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저희가 제안한 조건이 잽 애니보다 부족하다는 게…… 결코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가 작가님의 작품 가치를 잽 애니보다 더 적게 생각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부족한 제안을 드려서 송구할 따름입니다.”

아이리는 내가 언포터블 대신 잽 애니를 선택한 게 판권료의 액수 차이라고 생각하는 듯 연신 고개를 내 앞에서 조아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 아뇨. 판권료나 전반적인 계약 조건은 언포터블 스튜디오가 잽 애니보다 더 높습니다. 결코 금액적인 부분이 아닙니다.”

“금액적인 부분이 아니시라면…… 아! 비록 업계 경력이 잽 애니보다는 짧지만 저희 언포터블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사입니다!”

아이리는 이번에도 오해를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대표작으로는 꿈의 경계—”

“꿈의 경계의 화려한 작화, 그리고 후처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력적인 문제 때문에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제안을 거절한 게 아닙니다.”

“예? 그렇다면…….”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아이리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니, 어두워졌다기보단 혼란에 빠진 얼굴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남의 회사에 왈가왈부하는 것 같아 이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사실을 전해야 할 것 같다.

“제가 처음 언포터블과 잽 애니 두 곳에서 제안을 왔을 때 제일 먼저 고려한 건 직원들의 대우였습니다.”

“직원들의…… 대우? 혹시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 직원들의 대우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다른 회사와 비교하는 말을 해서 죄송하지만 제가 알기로 잽 애니는 대부분의 애니메이터 그리고 작화가 등 애니메이션 제작에 투입되는 필수 인력들이 정규직이라고 들었습니다.”

“아…….”

옅은 탄성을 내뱉는 아이리를 보니 그녀는 이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깨달은 듯하다.

“하지만 제가 알아보기로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작화가들과 애니메이터들은 대부분 직고용이 아닌 프리랜서 계약이라고 하더군요.”

“…….”

“물론 저도 단순히 판권만 팔고 더 좋은 퀄리티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주시는 회사와 판권 계약을 맺는 게 더 좋은 일이죠. 하지만 제 글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주시는 분들에 한해서는 정규직이 보장되었으면 해서요.”

일본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를 해고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첫째, 다른 부서로 이동이 어려운 경우. 둘째, 회사의 경영이 어려운 경우. 셋째, 해당 사원의 업무수행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경우다.

즉 한번 정직원이 된 이상 쉽게 해고가 되지 않기에 나는 내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정규직이 되기를 희망하는 거다. 이어진 설명에 아이리는 침묵을 지켰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무례한 말이었지만 제가 언포터블 스튜디오와 계약을 하지 않는 이유가 다른 요소 때문이라고 오해하실 것 같아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닙니다 작가님. 무슨 말씀이신지……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이시계 기사식당 같은 경우는 나름 힐링요소가 많은 글인데, 힐링 소재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드시는 분들의 삶이 힐링이 되지 않기를 바라진 않아서요.”

“……초콜릿 같은 거군요?”

“예?”

낮게 읊조리듯 말한 아이리의 말에 내가 되묻자 그녀의 설명이 이어졌다.

“다큐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입에 넣으면 사르르 녹는 달콤한 초콜릿에 열광하지만 그 달콤함 뒤엔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 농장에서 온종일 중노동과 학대에 시달리는 아이들이 있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요.”

“…….”

상당히 비슷한 상황이다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뻔했지만 나는 슬쩍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그 부분만 해결이 되면 잽 애니가 아닌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와 계약이 가능하신 걸까요?”

“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아이리의 말에 나도 모르게 놀란 음성이 뱉어졌다.

“작가님께서 고민하시는 부분이 직원들의 프리랜서 고용 문제라면 충분히 회사에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리의 눈은 오히려 나를 처음 봤을 때처럼 생기있게 반짝였다.

“한국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프리랜서 계약 직원들이 대놓고 정직원 요청을 직접적으로 꺼내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프리랜서로 계약을 한 거기에 계약 조건 변경을 요청하는 게 무례하다고 생각하니까요.”

아이리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작가님께서 저희 언포터블과의 계약 중에 고민되는 부분이 직원들의 열약한 처우 때문이라고 상부에 말씀드리면 회사 전체가 바뀌진 않더라도 최소 작가님의 작품을 담당하는 분들에 한해서는 정직원 변경을 요청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

“작가님의 작품을 담당하더라도 모든 분은 힘들 것 같습니다. 저희 언포터블에서 정규직 전환을 요청한다고 해도 프리랜서 직원분들의 경우 여러 일을 동시에 하시는 분도 계시고 프리랜서로서만 활동을 유지하고 싶으신 분들도 계셔서요.”

어찌 보면 내가 한 말을 명분으로 삼아 정직원 요청에 힘쓰겠다는 건데, 이용당하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게 마냥 싫지는 않다.

‘내가 모든 회사를 뒤바꿔 놓을 수도 없고, 뭐가 되었든 간에 긍정적인 변화일 테니까.’

전혀 예기치 못한 반응이었기에 잠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만약 언포터블 스튜디오에서 최소 제 작품이 애니메이션 제작에 투입되는 인원들을 대상으로 그렇게 진행해 주신다면 계약을 다시 고려할 생각이 있습니다. 아직 잽 애니 쪽에 계약을 하겠다고 연락을 하진 아닌 상태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하므니다!”

일본식 억양이 새게 튀어나오는 걸 보니 아이리는 내 말에 퍽 감동한 모양이다.

솔직히 일개 주임이 말한다고 해서 그리고 아무리 내 작품을 좋아한다고 해서 회사의 고용 시스템이 바뀌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이세계 기사식당의 애니메이션 판권 계약은 조금 더 계약을 기다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든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작가님.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답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식당에서 나와 작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아이리는 허리까지 꾸벅 접어 숙이며 내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일본 특유의 문화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모로 씩씩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가득 들어 나도 모르게 빙긋 미소가 지어 진다.

“아니에요. 저도 스즈키 주임님 덕분에 맛있는 음식 잘 먹었네요. 저 때문에 한국에 오시느라 고생 정말 많으셨습니다.”

“아, 아닙니다. 계산도 작가님께서 다 해주셨고…… 그리고…….”

“……?”

단순한 마무리 인사였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게 아이리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더니 식당 안에서 나와 대화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물쭈물거리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작가님과의 미팅이 가장 중요한 건 맞지만, 사실 이번에 한국에 오게 된 건 개인적으로 방문할 곳이 있어서요.”

“방문할 곳이요?”

“KTS 콘서트가…….”

아, KTS는 못 참지.

지금쯤부터 KTS 열풍이 조금씩 불기 시작할 때니까.

“하하, 네. 재미있게 즐기다 가세요. KTS는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정말 더 유명해질 거니까요.”

“자, 작가님도 KTS 팬이셨군요!”

아니, 팬은 아니었지만 KTS는 한국을 너머 전 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고 병역 문제까지 국가에서 해결해준 아이돌이었으니 모를 수가 없지.

“하하…… 그럼 한국에서 좋은 시간 보내고 가시길 바랍니다.”

“네, 들어가세요 작가님!”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며 언포터블 스튜디오 아이리 스즈키 주임과의 미팅을 마무리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