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 계약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 * *
“애니…… 애니메이션?”
—그래, 심지어 언포터블 스튜디오 그리고 잽 애니 두 곳이야.
“아니…….”
단풍 삼촌의 말에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애니메이션을 그리 즐겨보는 곳은 아니지만 그 두 곳 모두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들어 봤을지는 모르겠는데, 잽 애니는 사실상 일본 1위 애니메이션 제작사고 언포터블은 요 근래 가장 핫한 곳이지. 제작 비용 조건은…….
“잽 애니. 잽 애니랑 계약하자고 전해줘.”
—뭐? 계약 조건도 안 듣고? 잽 애니가 더 유명하긴 해도 언포터블 스튜디오가 조건이 더…….
그리고 이번에 놀라 말문이 막힌 건 단풍 삼촌이었다.
“조건 차이가 많이 나?”
—적진 않다. 언포터블 스튜디오에서 제시한 판권료가 1.5배 정도 더…….
“판권료 차이 정도라면 잽 애니에서 했으면 좋겠어. 내가 알기로 잽 애니 애니메이터와 작화가를 정직원 위주로 기용하거든.”
잽 애니라고 더 자주 불리는 재패니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달리 프리랜서가 아닌 정직원 위주의 애니메이터와 작화가를 기용해 일정한 퀄리티를 보장한다.
거기다 하나 특이한 점은 국내 웹소설 매니지들이 레이블을 따로 만들어 자체 작품을 출간하듯 ‘카르마 문고’라는 자체 레이블이 있다는 점이다.
즉, 애초에 애니화를 상정하고 라노벨을 발간하고 그것을 원작으로 애니화를 하는 방식을 주로 취한다는 뜻이지.
‘그런데 이세계 기사식당을 보고 바로 연락이 왔다니! 바로 전 주에 출간한 글인데?’
웹월드에 이세계 기사식당을 출간한 지 아직 한 주도 지나지 않은 상황. 그런데 한국도 아니고 애니메이션의 강국이라는 일본에서 이렇게 연락이 왔다는 사실이 상당히 놀랍게 다가왔다.
—흠, 이세계 기사식당이 힐링물이라 잽 애니와도 잘 어울릴 것 같긴 한데……. 우선 나도 지금 막 메일 확인한 거라 번역해서 내용 전달해 줄게. 그거 먼저 보고 정하자. 언포터블 스튜디오가 꿈의 경계 만든 곳이야. 너도 꿈의 경계 알지?
“고마워, 삼촌. 계약 조건 보고 조금 더 고민해 볼게.”
—알겠다. 메일 보내고 톡 할게. 끊는다.
“오케이.”
단풍 삼촌에겐 고민해 본다고 말했지만 사실 내 마음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전화를 끊고 자리를 돌아오면 괜히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돈만 본다면 언포터블 스튜디오와 계약하는 게 맞아. 언포터블 스튜디오는 괴물 같은 작화 그리고 뛰어난 후처리 작업을 하니까.’
언포터블 스튜디오는 지금보다 훨씬 더 승승장구할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분명하다. 내가 언포터블 스튜디오의 상업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 현재 대표작인 ‘꿈의 경계’ 때문만이 아니다.
‘불멸의 칼날이 연재되는 게 내년 초였지 아마? 그게 애니화되는 게 2019년도였고.’
내 기억이 맞다면 일본 만화 역사의 한 획을 긋는 대작 ‘불멸의 칼날’이 내년인 2016년 초인 2월 15일부터 ‘주간 소년 플라이’에 연재될 예정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4년 뒤인 2019년 4월 6일에 언포터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방영을 시작할 테고.
‘하지만 언포터블은 사람을 갈아 넣기로 유명하지. 직원 계약을 대부분 프리랜서 위주로 진행하니까.’
애니를 보는 시청자들의 입장에서는 덕업일체를 하는 거기에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다.
자신이 애정하는 캐릭터를 손수 만들고 그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구현할 수 있는 선택 받은 직업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고.
‘심지어 애니메이터나 작화가도 자기 몸을 갈아서 넣는 게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밤을 새워 가면서라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
개개인이 추구하는 방식이 모두 다르기에 그 방식이 무조건 나쁘다고 재단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내 글이 원작인 작품하에서는 결코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사람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인데 맷돌이나 믹서기로 갈려가는 직원을 보는 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니까.
‘음…… 역시, 판권료가 언포터블 쪽이 더 높긴 하네.’
잽 애니가 제안한 판권료는 1,000만 엔.
하지만 언포터블 스튜디오가 제안한 판권료는 1,500만 엔이다.
‘500만 엔이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돈이 없으면 안절부절할 만한 금액은 아니지.’
단풍 삼촌이 번역해서 보내준 두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계약 조건을 비교해보며 잽 애니로 확정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단풍 삼촌: 정우야! 대표님아!
—응, 안 그래도 계약서
보내준 거 봤어
안 그래도 잽 애니
이세계 기사식당의 애니메이션 제작 판권은 잽 애니에 넘기겠다는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단풍 삼촌의 카톡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단풍 삼촌: 아니! 잠깐만!
—단풍 삼촌: 지금 언포터블에서 왔댄다
—단풍 삼촌: 한번 얘기나 나눠보자고 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언포터블에서 왔다니?
어딜? 한국?
—단풍 삼촌: ㅇㅇ
—단풍 삼촌: 담당자가 개인 일정으로 한국에 잠시 와 있다는데?
—단풍 삼촌: 시간 되면 잠시 만나 보고 이야기 나눴으면 한다는데?
—나를?
—단풍 삼촌: ㅇㅇ 원작자랑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댄다
일본과 한국이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진 않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남을 요청할 줄은 몰랐다.
‘음…… 시간이야 내면 되긴 하지만…….’
이미 내 마음은 잽 애니로 굳혀진 상황.
그렇기에 굳이 만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단풍 삼촌: 한국말도 할 줄 안다니까
직접 만나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음…….
—단풍 삼촌: 작품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하는 것 같다
—단풍 삼촌: 물론 만나는 김에 계약
조건 마음에 안 드는 부분 있으면
그에 관한 얘기도 슬쩍 꺼내볼 수 있지
않겠어?
—단풍 삼촌: 물론 정우 네가 정
부담스러우면 내가 대신 나가고
어차피 외국인이니 내가 미팅 자리에 직접 나간다고 해도 신변 노출은 별다른 문제가 없으리란 생각이 든다. 거기다 한국어도 할 줄 안다고 하니 단풍 삼촌 없이 나 혼자 만나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한국까지 왔다는데 일단 만나는 볼까?’
언포터블 스튜디오 직원이 한국에 개인 일정이 있어서 왔다고 하긴 했지만, 이런 제안이 온 것과 맞춰서 한국에 온 건 내 계약과 완전히 무관한 건 아닐 것 같다.
언포터블은 비록 직원을 갈아 넣기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하지만 이만한 노력을 보여주는데 최소 거절의 말은 직접 만나서 전하는 게 나으리란 생각이 든다.
—직접 만나 볼게
언제 어디로 가면 돼?
* * *
이튿날인 12월 1일 화요일.
유포테블 직원의 숙소가 마침 홍대라고 했기에 나는 퇴근 후 바로 약속 장소로 걸어서 이동했다.
거리에서 들려오는 버스킹 소리, 시끌벅적한 인파의 소음을 지나치자 오늘의 미팅 장소인 한정식 식당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일찍 왔나?”
약속 시간은 오후 7시.
하지만 합정과 홍대는 고작 한 정거장 차이였기에 약속 장소인 고즈넉한 외관의 한정식 식당 앞에 도착했을 무렵 시계는 아직 오후 6시 2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근처 카페에라도…… 어?’
너무 일찍 도착했기에 근처 카페라도 가서 기다릴까 하던 찰나. 시야에 잔뜩 긴장한 정장 차림의 젊은 여성이 보였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무언갈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사람이.
“저…… 혹시?”
“헤에에?! 스, 스미…… 죄, 죄송합니다!”
이 사람 맞네.
더 물을 것도 없이 오늘 미팅을 하기로 한 사람이 연신 사과를 내뱉는 이 여성인 걸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노원지귀라고 합니다. 오늘 미팅하기로 하신 스즈키 주임님 맞으실까요?”
“아! 안녕하세요 작가님! 아이리 스즈키입니다. 노원지귀 작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발음에서 일본식 억양이 조금씩 새어 나왔지만, 의식하지 않고 들으면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이리 주임의 한국어는 유창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명함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잔뜩 긴장한 게 오롯이 느껴졌다.
“최대한 일찍 오려고 했는데, 저보다 먼저 도착하실 줄은 몰랐네요.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닙니다, 작가님. 저도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요청드렸는데도 시간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기대와 희망으로 환한 미소를 내비치는 그녀에게 내가 건넬 말은 오직 거절의 말.
그렇기에 벌써부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안으로 드셔서 이야기 나누시죠.”
“예, 작가님!”
한정식 전문점이어서 그런지 안에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바로 정갈한 밑반찬들이 준비되어 나왔다.
“주임님께서는 한국어가 상당히 유창하시네요?”
아이리는 미팅 장소를 극구 내가 원하는 곳으로 잡겠다고 했기에 혼자서는 먹기 어려울 한정식 식당으로 미팅 장소를 잡은 거였다.
그런데 아이리의 유창한 한국어를 보니 한국에 방문하는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닐지는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저는 자이니치, 그러니까 재일한국인 3세입니다.”
“아, 그러셨구나. 어쩐지 유창하시더라고요?”
그 말과 동시에 내가 그녀가 건네줬던 명함을 슬쩍 살피자, 아이리는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어머니가 재일한국인 2세십니다. 성은 아버지 성을 따라 쓰지만 어머니와는 한국어로 대부분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문화도 무척 좋아하고요.”
교포라…….
이역만리 타국에서 사는 교포에게 거절의 말을 해야 한다니……. 밥이라도 잘 먹여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가득 든다.
재일한국인으로서 일본에서의 삶은 어떠한지, 한국에서는 얼마나 지내는지, 음식은 입에 잘 맞는지 등의 스몰 토크로 대화를 이어가며 어느새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보리 굴비는 자주 먹어보지 못했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입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그리고 후식으로 잣이 띄워진 수정과가 나왔을 무렵 아이리는 환한 미소를 밝게 건넸다. 내 양심이 찔리도록.
“식사 다 마치셨으면 제안 주셨던 계약 관련해서 이야기 나눠도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작가님.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는 원래 일본 내의 망가와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일 얘기가 나오자 아이리는 비장한 장수 같은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번에 노원지귀 작가님께서 웹월드에 새로 연재하신 작품을 보면서 이번에 한국 원작의 글이라도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원지귀 작가님께서 저희 언포터블 스튜디오와 함께해주신다면—”
“저…… 죄송합니다.”
“……?”
아이리의 말이 더 길어질 것 같기에 나는 중간에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미 그녀의 눈빛은 내가 언포터블 스튜디오와 계약을 하리라 생각하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으니까.
“죄송하지만 언포터블 스튜디오와의 계약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