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미팅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 * *
오늘은 11월 25일 수요일.
민소희와의 만남 이후 보름 정도의 흘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나름 여러 일들이 있었다.
그간 일어난 일들 중 가장 큰 이슈 두 가지를 뽑자면, 우선 스튜디오 해츨링이 제작하는 ‘인턴사원 회장님’의 배우 리스트에서 전진철 그 더러운 약쟁이 성범죄자 놈이 퇴출당했다는 소식.
그리고 다른 한 가지에 이슈는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영화화와 관련된 일이었다.
—아이고 작가님, 바쁘신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감독님. 어쩐 일이실까요?”
갑작스럽게 걸려 온 하진석 감독의 전화를 받기 위해 나는 잠시 회사 근처 골목으로 나왔다.
—다름이 아니라 주연 배우 캐스팅 건 때문에 연락드렸습니다. 남녀 주연 그리고 조연까지 모두 확정되어서요.
“아, 감사합니다. 상당히 빨리 결정됐네요?”
덤덤하게 대답한 것과 달리, 나는 곤두선 신경이 모두 귀에 몰린 느낌이 들 정도로 긴장한 상태다.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소설 원작자인 내게 배우의 캐스팅 권한은 없다.
원작자인 내가 어떤 배우를 기용했으면 좋겠는지 의견을 피력하는 것조차 사실 월권이 될 수 있는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민소희는 앞으로 더 승승장구할 라이징 스타.
그렇기에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민소희와 만남을 가졌던 지지난 주 월요일, 하진성 감독에게 연락을 했었다.
그리고 결코 갑질이나 을질 혹은 원작자의 히스테리가 아니고, 정말 괜찮은 배우가 있어서 오디션 기회를 한번 줄 수 있겠냐고 그에게 전했었고.
‘아마 그 결과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내가 괜히 다 긴장되네.’
하진성 감독은 15년간 입봉하지 못한 무명 감독.
그렇기에 그는 오롯이 배우의 실력만을 기준으로 캐스팅을 한다. 앞으로 그가 촬영하는 모든 영화도 그런 식으로 진행될 테고.
즉, 내가 아무리 민소희의 잠재력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현재 민소희의 실력이 아직 진흙에 묻힌 진주 상태라면, 하진성 감독의 오디션을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남자 주인공부터 말씀드리자면 마동빈 씨가 캐스팅됐습니다.
“마, 마동빈 씨요? 와…… 너무 잘 어울리네요!”
—하하, 아직 신인 배우인데 작가님께서는 바로 아시는군요?
알 수밖에 없지.
나는 회귀자니까.
—대본 초안만 보여드렸는데 자기가 찾아다녔던 배역이라며 제발 캐스팅해달라고 애원할 정도였습니다.
“정말 잘 되었네요!”
내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마동빈은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는 성난 몸을 지닌 베이근 타입 배우. 배우 마동빈이 베이비 페이스에 가려진 짐승 같은 사나운 몸을 대중에 공개하는 건 앞으로 5년은 더 지난 후의 작품이 처음이었다.
‘그 전까지만은 재벌집 아들이나 회장 아들 같은 도련님 스타일 배역만 단역으로 조금씩 나오던 사람이었는데……. 정말 대박이잖아?’
아직은 신인 배우이기에 사람들은 그의 진가를 모르고 있다. 하지만 마동빈은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준비된 신인!
심지어 불 지르는 파이어맨 소설을 처음 집필할 때부터 내가 모델로 삼은 배우이기도 하다. 거기다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 아무런 탈 없이 조용히 신앙생활만 하던 배우이기에 전진철 그 쓰레기 놈처럼 걱정되는 부분도 딱히 없었다.
—그리고 여주인공 배역은 작가님께 말씀드리기 부끄럽습니다만…….
여주인공이라는 단어가 들리는 찰나의 순간.
밀려오는 상념과 함께 시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민소희 씨를 캐스팅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군요? 잘됐네요.”
라고 덤덤히 말한 것과 달리 나는 속으로 거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몇 년만 더 지나면 지나치게 몸값이 오르고 민소희는 아예 할리우드로 떠날 것이기에 돈이 있어도 섭외 자체가 어려워질 터였으니까.
—처음에 작가님이 오디션 기회 한번 줄 수 없냐고 하셨을 때는 솔직히 갑질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하하하.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혹시나 그런 생각을 하면 어쩌지 했는데, 역시나였다.
하진성 감독의 말을 들으니 이런 식의 개입은 앞으로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가 부끄럽다고 말씀드렸던 건 다름이 아니라 영화판에 있는 제가 민소희 씨 같은 분을 바로 눈여겨보지 못해 부끄럽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아 그런 거였어?
그러면 다행이지라는 생각을 하는 그때 하진성 감독이 바로 말을 이었다.
—민소희 씨가 아역 배우 시절부터 보여줬던 모습이 너무 귀엽기만 한 비슷한 느낌이어서, 솔직히 불지파 배역에 맞으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오디션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이다! 민소희 이 사람은 이 배역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하하하!
“하하, 다행이네요.”
하진성 감독은 아직 모르는 것 같다.
민소희가 이 배역에 걸맞은 사람이라기보다 자신감이 장착된 그녀는 그냥 연기 천재, 단지 그뿐이라는 걸.
‘캐스팅이 이렇게 빠르게 되기도 쉽지 않은데. 잘 풀려서 다행이네.’
하진성 감독과 기분 좋게 통화를 마무리하고 다시 회사로 복귀했다. 그런데.
“하아…….”
“?”
황건일 매니저가 모니터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늘은 월급날인 25일.
매달 건일 매니저가 가장 밝은 미소를 짓는 날이어야 하기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건일 매니저님, 무슨 일 있어요?”
“아, 파트장님. 그게…… 작가님 때문에요.”
“또 올망 작가님이에요?”
“네…….”
매니저들 사이에선 올망으로 줄여서 부르는 올챙이말랭이 작가. 그는 황건일 매니저가 담당하는 작가들 중 가장 이슈가 많은 작가다.
올망 작가는 황건일 매니저가 지금은 깜방에 갔다는 한우석 팀장 체재하에 있을 때 종수를 채우기 위해 계약한 작가 중 하나다.
그리고 처음 계약 때와 달리 올망 작가는 점점 기괴한 행동을 벌이고 있었기에 담당 매니저인 황건일은 최근 들어 점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번엔 또 뭐라고 썼는데요?”
“여기…….”
드르륵— 드륵—
황건일 매니저가 마우스 휠을 올려 소설피아에 오늘 올라온 올망 작가의 공지를 보여줬다.
< 공지: 악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
(사진)
게임이란 악마놈 때문에 잦았던 휴재.
더는 이렇게 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 키보드를 부쉈습니다.
키보드를 부숴서 게임을 안 하게 됐는데 대신 핸드폰으로 글을 쓰게 돼서 속도가 조금 느린 점 양해 바랍니다.
일단 오늘은 승리 기념으로 휴재합니다.
“승리 기념으로 휴재? 이게 뭔 개…….”
욕이 불쑥 올라오려던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고 황건일 매니저를 향해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제가 계약한 작가여서 뭐라고 할 말이 없긴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점점 심해져서 미치겠어요.”
“……너무 심한데요? 최근에 더 심해진 거에요?”
“원래는 달에 한 번 정도였던 게 주에 한 번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3일 연속 휴재에요.”
“…….”
올망 작가에 관해선 안 그래도 그제 있었던 주간 회의에서 이야기가 나왔었다. 지금 같은 불성실 연재는 계약 위반 사항이기에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휴재를 하면 계약 해지를 요청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라고 했고.
“올망 작가님한테는 말씀드렸어요? 불성실 연재는 계약 위반이라고요?”
“네…… 특별한 사정 없이 휴재해서는 안 된다고 하니까 이런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면서 휴재를 하세요.”
“…….”
이래서 사람은 처음부터 잘 뽑아야 한다.
엘가, 우리 LGA컴퍼니에서는 작가들의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성실성과 꾸준함 그리고 인성 등을 종합 평가해서 계약을 진행하기에 올망 작가처럼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여기는 병신북이지.’
똥에 파리가 꼬이는 것이 당연하듯 BS북에선 이런 작가들이 잊힐만 하면 속속 튀어나왔다.
“어제 그제 공지 확인해 볼까요? 뭐라고 썼는지?”
“네, 파트장님.”
드르륵— 딸칵— 드르륵—
황건일 매니저가 마우스를 움직였고 혀를 차게 만드는 공지가 연이어 보였다.
< 공지: 오늘 별자리 운세 >
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오늘따라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운세를 보니, 아니나 다를까?
몸 쓰고 머리 쓰기보다는 오늘은 좀 쉬어야 한다고 합니다. 고민거리가 있더라도 오늘은 고민해봤자 해결책이 안 보여 집 안에서 휴식이 필요한 하루라고 하는군요.
행운의 아이템: 자판기 커피
*자판기 커피가 행운의 아이템이라 커피 한잔하고 영감 좀 떠올리며 쉬겠습니다.
“아니 이거…… 정상이 아니네요.”
“…….”
“이게 화요일 공지에요?”
“네……. 월요일 공지는 여기 있습니다.”
드르륵— 드륵— 딸칵—
< 공지: 죄송합니다. 운세 49점입니다. >
배틀로얄 in 조선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
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이미 공지로 몇 번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오늘의 운세 지수가 50점 이상이어야 연재를 합니다.
제 공지를 처음 보는 독자님들께서는 비효율적인 처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이는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과학적인……
(중략)
……글을 왜 안 쓰냐고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오늘 운세 지수는 49점으로 오늘 일을 하는 건 사냥 나간 호랑이가 발톱을 잃은 격이라고 합니다.
애를 써서 굳이 뭐를 하려 하지 말고 베푸는 마음으로 후일을 기약하는 게 유리하다고 하니, 독자님들도 너른 마음으로 휴재를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아니……. 원래 이 정도는 아니지 않았어요?”
“예…….”
황건일 매니저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 작가님 갑자기 왜 이러는 거예요?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쓰라는 글은 안 쓰면서 공지는 창의력 대장이다.
토정비결, 운세, 사주, 타로, 신점 등 별의별 핑계를 대면서 쓰는 공지의 결론은 오늘 글을 안 쓰고 쉬겠다는 뜻.
진짜 편집자한테 처맞아야 할 소리다.
“건일 매니저님, 웹소설 작가가 되기 쉬워 보여도 이 리그 안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올망 작가님처럼 물 흐리게 둬서는 안 돼요.”
“죄송합니다, 파트장님……. 이제는 정말 계약 해지 말고는 남은 선택지가 없어서요…….”
마치 애새끼가 장난질하는 듯한 공지.
누군가는 열정과 꿈을 안고 오는 웹소설 연재 플랫폼에서 올망 작가는 최소한의 예의를 보였어야 했다. 신성하게 여기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올챙이말랭이란 필명은 회귀 전에도 본적도 들은 적도 없어.’
즉, 가만히 놔두면 도태될 작가가 분명하다.
소설피아에서 연재하는 올망 작가의 글은 심지어 구매수도 이미 두 자릿수. 큰 수익성 또한 기대할 수 없는 글이라는 뜻이고.
일반적으로 BS북에서 이런 작가를 대하는 가장 일방적인 방법은 방치다. 작가가 성실하지도 않고 글의 재미도 없고 또한 수익성도 없는 삼박자가 콤비네이션으로 갖춰졌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내비둘 생각은 없지. BS북은 우리 판무 1팀에서부터 새롭게 태어날 거니까.’
올망 작가는 지금 이 모든 상황을 장난처럼 받아드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마치 놀이터에서 곤충의 다리를 뽑는 잔인한 놀이를 하는 철없는 아이처럼.
‘그리고 철이 없으면 혼나야지.’
나는 오진아 팀장을 향해 몸을 옮겼다.
“팀장님. 작가 미팅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