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10화 (110/201)

110화 ― 모두를 위해서.

* * *

VVIP룸에 단풍 삼촌이 설치한 도청기.

그리고 그 도청기와 연결된 이어폰을 꽂은 채로 나는 계속 귀를 기울이는 상황이다.

—소희 씨랑 반년 가까이 촬영하면서 이렇게 따로 자리 갖는 건 처음이네요.

—죄송해요. 제가 대본 외울 시간도 없어서.

—어휴, 아역 배우부터 하셔서 가장 선배님이신데 이렇게 또 겸손하세요? 하하.

이어폰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으니 각기 다른 사내들이 민소희에게 금칠을 하기 바빴다.

—진짜 소희 씨 아니었으면 이번 드라마 이렇게 뜰 수 없었어요. 종방연 축하 기념으로 건배 한잔 하시죠!

—네, 다들 정말 고생하셨어요.

—에에이, 뭐야. 소희 씨 아까 1차 때도 물만 드시더니. 여기서도 주스만 드시는 거예요?

—하하, 죄송해요. 제가 술을 잘 못 마셔서요. 사실 클럽도 태어나서 처음 와보는 거라 주스만 마셔도 술에 취하는 느낌인걸요?

‘좋아, 민소희. 잘하고 있어.’

민소희의 나이는 고작 20살.

하지만 아역 배우 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해 온 베테랑이어서인지 능숙하게 늑대들의 술 권유를 쳐냈다. 하지만 작정을 한 늑대들은 집요했다.

—에이, 너무하시네.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 모임인데요.

—맞아요, 소희 씨. 클럽도 처음 와본다면서요. 원래 술은 아는 사람끼리 있을 때 편하게 마시면서 느는 거예요.

—아, 그만. 드시기 싫다는 데 억지로 그러지 마세요. 소희 씨 부담스럽게.

‘이 새끼네.’

이어폰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목소리.

민소희를 위하는 척하면서 다른 이들을 말리려는 기시감 가득한 전진철의 목소리에 벌써 심장이 두근거린다.

—대신, 계속 안 드시면 분위기가 좀 그러니까, 이번 잔 말고 다음번에 짠 할 때 딱 한 잔. 오늘 한 잔만 드세요. 그다음부터는 다 제가 마실게요.

—아, 뭐야아? 진철 씨 벌써 흑기사 해주려는 거예요?

—아시아 프린스라 그런지 매너가 어우.

—하하, 매너는요 무슨. 많이 드시면 피곤하실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한 잔 정도는 괜찮으니까, 어때요? 콜?

‘뭐, 다음 잔부터는 지가 마셔? 어디서 약을 팔아 이 새끼가?’

—알겠어요. 그럼 정말 딱 한 잔만 마실게요! 오늘 클럽 첫날이기도 하니까요!

—이여어얼! 멋지다 민소희!

—우윳빛깔 민! 소! 희!

—이상한 소리 말고 짠이나 해요. 소희 씨 민망해하겠네.

—다들 짜안!

—치얼스!

다들 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당장 삼촌들에게 말해 출동을 시켜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오늘 물이랑 주스를 너무 많이 마셨나봐요.

—하하, 다녀오세요 소희 씨.

—갔다 와서 바로 그럼 한잔하기에요.

—그럼요. 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에요.

—다녀오세요.

민소희가 자리에서 일어서고 VVIP룸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비 삼촌: 누구 나왔다

—솔 삼촌: VVIP룸에서 누구 나옴

—홍싸리 삼촌: 마스크 쓴 여자 화장실로 가는데?

—오동 삼촌: 지금 들어가? 재껴?

—아직, 아직이야

화장실 간 거 민소희니까

룸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까지 모두 대기

VVIP룸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는지 삼촌들의 보고가 주르르륵 올라왔다. 하지만 내 정신은 온통 도청기에 연결된 이어폰에 가 있었다.

—와, 진짜 아시아 프린스. 크크, 연기 개 쩌네?

—나 진짜 감탄함. 진철이 형은 어떻게 눈 하나 안 깜빡하고 그렇게 부드럽게 말할 수 있어요? 난 완전 떨려 죽겠던데.

—헛소리 말고 술이나 부드럽게 말아.

—흐흐, 알았어요. 그럼 로얄 살루트에…….

—야, 뭐하냐? 여자애들 독한 거 잘 안 마셔. 알망에 섞어서 줘. 그래야 술 맛 안 나지.

—아, 하하하. 역시! 프로페셔날은 다르시네.

놈들의 대화를 들으니 숨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다. 전진철만 범죄자가 아니라 그 방에 있는 모든 새끼들이 공범인 게 확실시된 순간이었으니까.

—자, 우리 우윳빛깔 소희를 위한 물뽕 샴페인은 먹기 좋게 한 병 쭉 타서 말아 놨습니다아.

—진철이 형, 그런데 민소희가 알망 안 마시고 로얄이나 보드카 마시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요?

—병신아, 내 앞에 얼음 들어간 언더락 잔 두 개 안 보이냐?

—허얼? 뭐야, 형 거기에 이미 탄 거예요?

—그렇지. 요즘 여자애들 영악해져서 주의해야 해. 언더락 잔에 넣으면 걍 얼음이 녹은 줄 아니까 알아채도 크게 신경 안 쓴다고.

악마 같은 말을 너무 태연하게 내뱉는 전진철의 말에 이걸 듣는 내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다.

—내 앞에 하나 두고, 하나는 네 쪽에 갖다 놔. 민소희 다른 술 마시겠다고 하면 이 잔에 따라주면 되니까.

—크흐흐흐, 역시 에이시안 프린스으!

—아시아 프린스는 무슨, 여기 가드랑 웨이터 놈들한테도 돈 찔러줬으니 문 열릴 걱정은 안 해도 돼.

—하하, 역시 이게 싸나이들의 의리지. 의리!

—크흐흐, 원래 돈이 의리인 거다. 의리!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에 이를 악무는 그때 아버지의 큼지막한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정우야, 정신 차려. 지금 여자애 거의 다 돌아왔댄다.”

아버지의 말에 카톡방을 보니 삼촌들의 카톡이 물밀듯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바로 경찰에 신고해 주세요. 마약 강제 투약 상황 적발했다고요.”

—어, 소희 씨 왔어요? 우리가 술 미리 만들어 놨어요. 자, 짠 해요!

—무슨 술을 이렇게 빨리 마셔요.

—하하, 종방연이니까 그렇죠. 소희 씨 술 잘 못 마신다니까 샴페인에 탔어요. 거의 콜라나 마찬가지니까 시원하게 마셔보죠. 자, 다 같이 짠!

시발. 생각보다 너무 빠른 진행이다.

민소희가 술을 마시기 전에 진행할 생각이었는데.

—나 지금 들어가

—단풍 삼촌: 뭐? 무턱대고 그렇게 가면!

—오동 삼촌: 인마!

이어폰을 뺀 후 VIP룸을 박차고 나가 VVIP룸을 열기 위해 바로 달려갔다.

“거기 스톱. 여기 VVIP룸이에요. 방 잘못 오셨어요, 손님.”

“아는 분 있어서 인사만 하려고요. 잠시만 들어갈게요.”

“아, 안 된다고.”

민소희가 있는 룸을 열기 위해 바로 손잡이를 잡았는데 입장할 때 신분증을 확인하던 문신 돼지, 아니, 가드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덥썩—

그때 뒤에서 나온 상처투성이의 거대한 손이 내 손목을 잡은 가드의 팔뚝을 무 뽑듯 잡아 뺐다.

“너, 뭔데 우리 막둥이 몸을 터치해? 어? 말로 하는 거 못 배웠어?”

“이 아저씨들 아까부터 뭐야? 술 취하셨으면 조용히 집 가세요.”

“내 동생이 확인 좀 한다잖아. 어?”

뒤에서 이어진 오동 삼촌의 지원 사격에 가드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 씨발. 진짜 손 안 놔? 귀 한쪽이 없어서 말길을 못 알아먹나? 뭐 어디서 생활 좀 했어? 덩치빨 믿고 나대지 말고 좋게 말할 때 꺼지라고.”

“너는 지금 대한민국 인구의 5%. 전국 249만 장애인을 모욕한 것이여.”

“아, 니미. 장애인 새끼한테 별 병신 같은 말을 다 듣네. 어이, 짝귀 아재. 깽값 물기 없이 하고 한번 할까?”

“여기서? 야외 플레이는 풍기문란죄여. 우리 룸으로 가자고. 솔찬히 혼 좀 나야 쓰것어.”

“뭐, 이런 병신 같으……아아악! 팔! 팔!”

오동 삼촌을 모욕한 가드는 팔이 꺾인 채 바로 끌려갔고 그 모습을 본 다른 가드들이 VVIP룸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간나야! 정신 차려라! 안 들어가고 뭐 하니?”

그리고 귓가에 울린 단풍 삼촌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바로 VVIP룸의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여기 전진철 배우님 계시다고 들었……?”

VVIP룸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 계획은 이랬다. 전진철 당신이 캐스팅된 드라마의 원작자가 나다. 우연히 클럽에 들어가는 걸 봤다는 사람들의 말에 인사할 겸 들어온 거다.

“뭐, 뭐야?”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에 벌써 물뽕이 든 샴페인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민소희의 옷 한쪽 어깨를 벗기고 있는 금수들을 보니 눈이 뒤집혔다.

“안 멈춰 이 쓰레기 새끼야!”

덥썩—

“폭력은 안 된다, 간나야.”

금수들을 향해 쏘아지는 내 주먹을 단풍 삼촌이 바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삼촌들이 거대한 몸을 구기며 빠르게 들어와 벙찐 얼굴의 범죄자 새끼들을 하나씩 붙잡았다.

“뭐 하는 놈들이야! 가드 어디 있어!”

“이거 안 놔! 꺼지라고!”

“응, 꺼질 거야. 우리 룸으로. 경찰들 오고 있으니까. 가만히 있어? 니 곱상한 얼굴 형 얼굴처럼 되기 싫으면.”

단풍 삼촌, 흑싸리 삼촌, 난초 삼촌, 모란 삼촌, 공산명월 삼촌이 각각 다섯 놈의 쓰레기를 옴짝달싹 못 하게 자신의 몸으로 잡고 VVIP룸 밖으로 끌고 나왔고 그 밖에는 가드 열댓 명이 몰려와 우릴 포박한 상황.

경찰들이 오기 전까지 VVIP룸에 남겨진 증거물을 지켜내고 내 겉옷을 덮어 준 민소희를 안전히 지켜낼 수 있는지 걱정이 된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였다. 삼촌들을 둘러싸고 실랑이를 벌이는 가드들을 비집고 삼촌들과 얼추 비슷한 덩치의 사내가 나타났다.

“자알, 하는 짓이다 새끼들아. 귀한 분 오셨으면 제대로 모셔야지.”

“죄, 죄송합니다. 사장님. VIP룸에 있던 손님들이 갑자기 VVIP룸에 멋대로 들어가서 소란을…….”

“시끄럽고. 아저씨들은 뭐세요? 이건 뭐, 액면가만 삭은 게 아니라 실거래가도 삭아 보이는데. 룸 잡았으면 조용히 놀다 갈 것이지 어디서 소란을—”

“그러게 말이다.”

“……?”

사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사나운 얼굴을 삼촌들에게 들이미는 그때. 그의 뒤에서 하얀 양복의 사내, 아버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조용히 놀고 가려는데 서비스가 여엉 안 좋아. 안 그러냐 뽕구야?”

“뽀, 뽕구? 이 쌉새끼가 어디서 내 이름을 그따구로! 너 누구야 새끼야!”

“누구? 뽕구가 감이 안 좋아졌구나. 이러면 알아보겠니?”

아버지가 살벌한 안광을 감추던 선글라스를 내렸고, 그 모습을 본 가드들이 고개를 까딱거리며 피식댔다.

“으푸후훗, 이거 어디서 멋쟁이 아저씨가 나오셔서 빅 재미 주시—”

짜악!

“닥쳐 이 새끼야!”

아버지에게 뽕구라고 불렸던 사내는 가장 먼저 입을 놀리던 가드의 뺨을 그대로 세차게 쳤다.

“구, 구광적 형님. 여, 여긴 어쩐 일로…….”

그러고는 혹한의 추위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견디는 사람처럼 바들대기 시작했고 아버지의 이름을 들은 가드들 또한 단체로 몸에 진동이 오듯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우리 뽕구가 많이 컸어? 어? 하늘 같은 큰형님 성함을 함부로 부르고?”

오동 삼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인 클럽 사장의 뒷머리를 잡아 강제로 자신을 향해 돌렸다.

“크흡! 허……허어억! 흐, 흑싸리 형님!”

“이야, 뽕구 그동안 어디 박혀있나 했더니. 어디서 족보도 없는 애들이랑 이런 물뽕 장난질을 하고 있었네? 음?”

“예에? 아, 아닙니다. 결코 그런 적…… 아아악!”

흑싸리 삼촌은 한쪽 손으로 클럽 사장의 뒷목을 우악스럽게 잡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우야, 경찰 올 때까지 문 닫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어. 삼촌들은 동생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어…… 으응. 고마워, 삼촌.”

예상했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한 가지 확실해진 건 하나다. 역시 삼촌들의 도움은 함부로 받아선 안 되겠다.

‘폭력은 안 된다면서…….’

건너편 VIP룸에서 들리는 끔찍한 절규가 클럽 비트에 섞이는 걸 들으며 나는 경찰이 속히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민소희뿐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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