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05화 (105/201)

105화 ― 핵무기를 만드는 기분.

* * *

다음 날 오전.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으러 가는 아이같이 엘가 사무실을 향해 내달렸다.

틱—

LGA컴퍼니 라는 글씨가 깔끔한 폰트로 적힌 사무실에 지문을 찍고는 덜컹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 단풍 사암……?!”

곧장 단풍 삼촌이 있는 경영 본부장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 누군가의 인기척이 옆에서 느껴졌다.

‘좆됐다!’

오늘 엘가는 쉬는 날이라 회사에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너무 들뜬 마음으로 오느라 사무실 안에 단풍 삼촌 말고 다른 사람이 있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인간의 시야 범위는 거진 180도 전방.

즉, 직접적으로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이 공간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분명히 느껴졌다.

“아…… 층을 잘못 눌렀나 보네요. 실례했—”

“정우 대표님, 뭐 하세요?”

“푸훗, 뭐예요?”

“……?”

익숙한 목소리와 웃음소리.

등을 구부린 채 도둑처럼 얼굴을 가리고 황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다 들려온 소리에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미현 본부장님, 지연 본부장님? 아니…… 두 분이 여긴 웬일이세요?”

토끼 눈으로 묻는 말에 권미현과 이지연은 피식 웃을 뿐이다. 그리고 등 뒤에서 덜컹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아하하! 제가 제일 늦었군요. 자자, 간만에 대표님까지 다 모이셨으니 바로 미팅 진행하시죠?”

“아니, 단풍 삼…… 무진 본부장님, 이게 뭡니까? 오늘 우리 둘이서 미팅하기로 한 거 아니었—”

“거참, 대표님! 저도 해외 플랫폼 사업 궁금하거든요? 휴일인데 왜 왔냐 구박할 생각 마세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권미현 본부장이 앙칼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후훗, 미현 본부장님 말이 맞아요. 저도 해외 플랫폼 베타 버전 나왔다고 해서 같이 보러 온 거예요. 아직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UI 디자인 부분은 어차피 제 도움이 필요하잖아요? 명절 상여금도 넉넉히 받았는데 오늘 하루 더 일 한다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그아하하! 자자, 어제 퇴근 전에 대회의실에 미팅 준비 싹 다 해뒀으니까 얼른들 들어 가십시다!”

이제 보니 아주 본부장들끼리 협잡을 한 모양이다.

‘오늘은 별말 하지 말자. 체계적인 게 좋긴 해도 너무 기계같이 딱딱한 건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

쉬는 날에도 회사 일로 모여 준 본부장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마음속으로 전하며 나는 군말 없이 대회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가 본사는…… 오히려 어색한 기분이네.’

임원 미팅을 할 때도 혹시나 직원들을 마주칠까 봐 내 옆집인 구 엘가 사무실에서 만나 미팅을 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내가 대표인 회사 회의실일 뿐인데 낯선 기분마저 드는 기분이다.

“자, 빔프로젝터 세팅 완료됐고. 그럼 레이아웃 설명부터 진행할게요. 우선 웹툰이 메인인 플랫폼인 만큼 신작이나 프로모션 들어가는 인기 작품의 대표 이미지를 상단 대배너에 배치했고, 그 아래는 요일별 인기 순위로 기본 세팅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해외 플랫폼 제작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단풍 삼촌은 이미 수차례 PT를 준비한 사람처럼 조금의 버벅거림도 없었다.

단풍 삼촌은 베타 버전 플랫폼에 관한 UI부터 각 탭의 기능 앞으로 어떤 기능이 추가될 예정인지 등을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음…… 기능적인 부분은 기존 국내 웹툰 플랫폼과 비슷해서 별다른 위화감이 없는데, 요일별 작품 썸네일 크기는 적당한 데 비해 매인 배너 크기는 너무 과하게 크지 않나요?”

이지연의 질문에 단풍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다만 기존 국내 웹툰 플랫폼의 경우 이미 자리를 잡은 경우고, 우리가 작업 중인 해외 플랫폼의 경우엔 인지도가 없기 때문에 마케팅 적으로 대배너 크기를 키워서 무조건 볼 수밖에 없는 인기 작품들로 독자 유입을 하려고 합니다.”

단풍 삼촌의 프리젠테이션 중간중간 서로의 의견 또한 자유롭게 오갔다. 베타 버전인 만큼 다양한 의견의 취합이 중요한 시점이었으니까.

“브루나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한 플랫폼이니만큼 플랫폼의 언어 디폴트값은 말레이어입니다. 하지만! 브루나이가 아닌 타 국가의 IP에서 접근하게 되면 기본 언어 설정은 영어로 되죠, 흐흐. 연재된 작품들도 당연히 영문 버전으로 나오게 되고요. 어차피 우리가 수익을 내는 건 브루나이가 아닌 거 다 알잖아? 그죠? 그아하하하!”

설명을 이어가던 단풍 삼촌은 악당같이 사악한 웃음을 내뱉었다. 내 삼촌이지만 얼굴에 칼자국이 가득한 모습으로 걸걸한 웃음을 내뱉는 모습이 정말 더없이 삿돼 보인다.

2015년인 올해 브루나이의 전체 인구수는 고작 41만이 조금 넘는 수준. 브루나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플랫폼 제작을 진행하고 있지만 이런 적은 인구수의 시장에선 콘텐츠 사업으로 수익을 내기가 어렵다.

‘콘텐츠 사업 수익은 무조건 쪽수로 승부를 봐야 하는 사업이지.’

그렇기에 이번 해외 플랫폼 제작 사업은 말레이어와 영어로 동시에 번역해서 진행되고 있었는데 권미현은 그에 관해 의문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왕 번역해서 진행하는 거면 영어랑 말레이어 말고 중국어랑 일본어로도 함께 진행하는 건 어떤가요? 얼마 전에 기사를 보니까 웹월드와 테일랜드 쪽도 해외 진출 진행하고 있는데 두 플랫폼 다 일본 쪽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거 같아서요.”

권미현의 말에 단풍 삼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시장이 나쁘진 않죠. 전 세계 만화 시장 규모가 60억 달러, 한화로 치면 7조 2천억 규모입니다. 그중에 40% 매출을 차지하는 게 일본 시장이죠. 그래서 다들 그 시장을 뺏으려고 안간힘을 쓰긴 하는데…….”

단풍 삼촌이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자상이 가득한 손을 깍지를 끼고 회의 테이블 위에 팔을 올렸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서 일본이나 중국 시장까지 신경을 쓰는 건 시간적으로도 그리고 자금적으로도 무리이지 않을까 하군요.”

“제 생각도 비슷해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일본 시장 그리고 중국 시장 순서로 넓히면 좋을 것 같습니다. 꼭 한국 콘텐츠는 아니더라도요.”

“오리지날 콘텐츠 말고 로컬 콘텐츠로 시장에 진입하자는 건가요?”

내게 묻는 권미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웹월드나 테일랜드가 일본 시장에 진출한다고 해도 한국 웹툰의 일본화로 당장에 큰 수익을 낼 순 없다고 봐요. 비록 한국에서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해도 정서적인 차이, 문화적 차이 거기다 기존의 일본 출판 만화와 달리 풀컬러로 제작되는 웹툰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실제로 웹월드와 테일랜드는 상당 기간 동안 해외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왜냐면 한국적인 것, 즉, 우리가 보기에 재미있는 것을 해외 시장에 받아들여지기에 집중했었으니까.

“소설피아 같은 경우엔 작가 지망생들이 연재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있죠. 테일랜드의 웹툰 페이지에서도 아마추어 작가들이 연재하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고요.”

설명이 길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빔 프로젝터 화면에서 내 얼굴로 옮겨졌다.

“저희가 만드는 웹툰 플랫폼에도 언어별로 영어권 그리고 말레이어권 작가들이 해당 언어로 직접 아마추어 게시판에 웹툰을 연재하게 하는 건 어떨까요? 거기서 재능이 있고 인기가 있는 작가들을 정식 연재 작가로 섭외하는 식으로요.”

“음…… 작가를 현지에서 수급하는 게 좋긴 하죠. 하지만 이미 테일랜드에서도 그런 식으로 진행을 하는 것 같은데, 차별화를 할 수 있을까요? 테일랜드가 하는 아마추어 게시판도 딱히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진 않아서요.”

이어진 권미현의 질문에 나는 생긋 미소 지었다.

왜냐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차별화야 간단하죠. 저희는 돈으로 줄 거니까요.”

“돈이요?”

“네,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엔 돈보다 좋은 게 없죠. 아마추어 게시판 활성화를 위해 초반에는 실력을 떠나서 꾸준히 연재를 진행하면 수익을 주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무진 본부장님.”

“예!”

“무진 본부장님이 담당하시는 일이 많아 바쁘시겠지만 영어권에서 유명한 작품들 저희 플랫폼에서 연재할 수 있는지 계속 알아봐 주시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쉽지는 않지만 해당 작가들 그리고 출판사들 계속 문 두드리고 있습니다.”

그 후로도 해외 플랫폼 사업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 진행됐다.

웹 버전을 먼저 출시하고 모바일 버전은 언제 출시 되는지 안드로이드 버전과 IOS 버전은 언제 출시 예정인지 등 회의 안건은 끊임없이 쏟아졌다.

“이야아, 우리 개발자님들 고생하겠구만 기래. 그럼 플랫폼 베타 버전 관련해서는 우선 이 정도면 우선 된 거 같고.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 보여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흐흐.”

쉬지도 않고 3시간 정도 플랫폼 운영 및 수정 사항 등에 관한 조율이 이어졌고 단풍 삼촌이 나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뭐길래 또 그런 미소를…… 어? 저, 저건!”

그리고 단풍 삼촌이 빔 프로젝터 화면에 새로 띄운 프로그램 화면을 보자 나는 단풍 삼촌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으흐흐, 이것도 베타 버전입니다. 아직 플랫폼에 연동은 안 해뒀는데 프로그램 따로 출시할 거니까 기능만 빼 달라고 해서 만든 거니 다들 그점 참고해 주시고.”

“에르미스…… 에르미스 맞죠?”

에르미스는 한글 프로그램과 스크리브너의 단점을 보완해 만들기 바랬던 그 프로그램. 제작 진행 과정이 길 거라고 해서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에르미스마저 베타 버전으로 나왔을 줄이야!

전반적인 인터페이스는 마치 코딩 프로그램을 보듯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상상으로만 구상했던 에르미스가 실제 프로그램 형태로 구현되어 있자 마치 내 소설이 처음 웹툰화가 되었을 때처럼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이다.

“그흐흐, 맞습니다. 우선 에르미스는 아직 버벅거림도 심하고 오류도 있긴 한데 간단히 기능 소개해보겠습니다. 스크리브너와 마찬가지로 화면 분할, 자동 저장 등 기능이 있고 언어는 영어, 말레이어뿐만이 아니라 전문 번역가가 붙어서 한글화 또한 자연스럽게 진행하고 있죠.”

딸칵— 딸칵—

프로그램을 구동하면서 렉이 걸리는지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이면 잔상과 함께 딜레이가 생기는 게 보였다.

하지만 전반적인 기능을 파악하는 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저런 잔 에러는 차차 나아질 테니까.

“우리 정우 대표님이 가장 궁금해했을 것부터 보시죠.”

스윽— 툭—

“와…… 그냥 드래그앤 드롭만으로도 열리네요?”

“그으흐흐, 그렇습니다. 한글 파일과 아예 호환이 되지 않던 스크리브너와 달리 에르미스의 분할된 화면 창에 이렇게 한글 파일을 그대로 이메일에 파일 첨부하듯 드래그앤 드롭만 해도 글자 깨짐 하나 없이 연동이 되도록 했죠.”

내가 놀라 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 듯 단풍 삼촌은 걸걸한 웃음을 내뱉으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거기다 맞춤법 검사 기능도 완벽하게 연동했고 다른 부가적인 기능 또한 계속 추가 예정입니다.”

“매우 좋네요. 연동 문제도 없을까요? PC에서 맥으로, 맥에서 PC로, PC에서 안드로이드나 IOS로 호환되는 식이요.”

“개발자들이 지금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하고 있더군요. 그래도 우선 PC 버전과 맥 버전부터는 해외 플랫폼에 적용해서 사용할 예정이니 안드로이드 그리고 IOS버전보다는 빨리 출시가 될 겁니다.”

에르미스라는 워드 프로세서와 해외 플랫폼이라는 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는 단지 출판사들과의 투닥거림이 아니라 더 큰 전쟁도 가능해진 기분. 마치 몰래 핵무기를 만드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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