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어엉? 안다고?
인사 발령 공고
공고번호: BS북 제2015―29호
제목: 인사발령(승진발령)
발령일: 2015년 8월 18일
하기와 같이 인사발령 되었음을 공고합니다.
성명: 오진아
부서: 출판본부 판타지무협 1팀
발령내용: 승진발령
발령직위: 팀장
2015년 8월 18일
주식회사 BS북
대표이사 오성민
인사 발령 공고
공고번호: BS북 제2015―30호
제목: 인사발령(승진발령)
발령일: 2015년 8월 18일
하기와 같이 인사발령 되었음을 공고합니다.
성명: 박정우
부서: 출판본부 판타지무협 1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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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일처리 무슨 일? 엄청 빠르네?’
다사다난했던 월요일이 지난 그 다음 날.
오성민 대표가 경영지원팀을 닦달했는지 출근 전에 집에서 글을 쓰다 켠 회사 전체 메일에 인사 발령 공고 메일이 도착한 걸 볼 수 있었다.
평소 유럽 공무원급 행정처리를 보여주던 BS북 경영 지원팀에서 하루도 안 지나 이렇게 메일을 바로 보냈다니. 여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끄으으. 이제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 파트장으로서?”
가볍게 목 스트레칭을 한 후 BS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불입호혈이면 부득호자라는 생각으로 썩어 빠진 BS북을 뜯어고치고 나를 악의 구렁텅이로 내몬 강경진을 끌어 내릴 생각으로 BS북에 들어왔다.
‘그런 내가…… BS북에서 진급하는 날이 올 줄이야.’
기가 막힌 상황에 회사로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진급을 해서, 파트장이란 직함으로 인해 쥐똥만 하던 월급이 쥐꼬리만 해져서 기쁜 게 아니다.
단지 판이 깔린 게 기쁠 뿐이다.
나와 오진아가 거리낌 없이 칼춤을 출 수 있는 판이 만들어졌으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
“굿모닝.”
“…….”
전날 퇴근 전.
컴퓨터와 짐을 모두 1팀 자리로 옮긴 상황이다.
평소처럼 2팀을 지나치며 인사를 했는데 역시나 조팟놈은 대꾸조차 없다.
‘조팟새끼가 1팀으로 같이 왔어야 바로 잘라버리는 건데.’
조팟놈이 내가 길로틴을 칠 수 있는 영역에 없다는 게 내심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오늘부터 근무하게 될 새로운 자리로 이동했다. 그러자 1팀 팀장이 된 오진아와 황건일 매니저가 내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정우 매니, 아니, 파트장님…….”
“다들 좋은 아침입니다.”
황건일 매니저는 전날 경찰서에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는지 하루 만에 사람이 10년은 더 늙은 모습이었다.
“정우 파트장님 오셨으니까 팀 회의 바로 진행하도록 하죠.”
“네, 팀장님.”
“알겠습니다.”
드디어 판무 1팀의 첫 주간 회의 시간이 찾아왔다.
전날 준비한 회의 내용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대회의실로 들어갔는데.
“……예예! 그렇죠 작가님. 그 사건 전개가 너무 늘어지는 편이어서요. 몇 화를 계속 같은 사건으로 끌고 나가면…….”
그 안에는 조팟놈이 떠들어 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기 자리에 있었는데, 언제 들어온 거지?
“팀장님, 저희 대회의실 예약 안 되어있었을까요?”
“아뇨, 9시 정각부터 10시 반까지 저희 1팀에서 사용하는 걸로 등록했어요.”
아 그래? 그렇단 말이지?
조팟놈이 지금 무슨 개짓거리를 하려는지 보는 내가 수치스러울 정도로 훤히 보인다.
BS북의 회의실은 대회의실과 소회의실 두 곳.
그리고 각 회의실은 모두 사내 게시판에 사용 시간을 적어두는데, 가끔 회의실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빈 시간대에는 매니저들이 통화를 하기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지금처럼 경우 없는 짓은 안 하지만.’
고작 몇 분 전 내가 출근할 때만 해도 조팟놈은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작가와의 통화를 위해 대회의실을 사용할 거였다면 사내 게시판을 진작 확인했어야 했을 텐데. 조팟놈의 가소로운 앙탈이 보인다.
“그럼 회의 진행하시죠 팀장님.”
생긋 웃으며 건넨 말에 오진아 팀장과 황건일 매니저가 자리에 앉으러 이동하는데도 조팟놈은 눈과 귀가 먼 사람처럼 의도적으로 우리와 시선을 피하며 회의실 내에서 뻗대고 있다. 길 잃은 애새끼에게 인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조성훈 파트장님, 회의실 예약되어 있는 거 못 보셨나 보네요?”
“예, 그렇죠. 그런 식으로 수정하시는 게…….”
귀가 먼 게 아니라면 충분히 들릴 수밖에 없는 데시벨. 그럼에도 조팟놈은 여전히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하하하, 네 좋습니다. 그럼 그 부분은 퇴고하시면서 그렇게 수정해 주시고 그 다음 회차는…….”
“하루 만에 귀가 멀었나? 좀스럽네 진짜.”
“……아, 작가님. 제가 급한 일이 있어서 조금 후에 연락드려도 될까요? 예, 알겠습니다.”
처음 조팟놈을 불렀을 때보다 훨씬 낮은, 아니 아예 낮게 읊조리듯 뱉은 말에 조팟놈이 즉각 반응했다.
“정우 매니저, 지금 뭐라고 했어요? 뭐? 귀가 멀어? 좀스러?”
활어처럼 팔딱대는 조팟놈을 향해 나는 피식 웃으며 다가갔다.
“매니저가 아니라 파트장이겠죠. 인사 공고도 못 봤어요? 하긴, 사내 게시판에 1팀 주간 회의 시간이라고 적힌 것도 안 보셨는데 알 턱이 있습니까?”
무슨 말을 할까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는 조팟놈을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 앉았다.
“하하, 무슨 정색을 하고 그러세요. 여하튼 회의 해야 하는데 문이나 닫고 나가 주실래요? 아!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설마 문 안 닫고 나가시거나 쾅 소리 내고 나가시면 진짜 좀스러운 거 인정하는 겁니다? 인정?”
“…….”
조팟놈의 입이 달싹였지만 별다른 말이 나오진 않았다. 오진아 팀장과 황건일 매니저의 차가운 눈빛을 견디지 못했는지 아니면 지도 이제 쪽팔린 걸 깨달았는지 조팟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갈 뿐이다.
“허엌……. 저 숨 막혀 죽는 줄 알았어요.”
조팟이 대회의실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황건일 매니저가 거친 숨을 내뱉었지만, 나는 기분이 상쾌했다.
‘경력값 못 하는 조팟놈을 봐서일지도.’
오진아 팀장 역시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주간 회의 자료를 마주 앉은 우리에게 건넸다.
“방해꾼도 갔으니 이제 새롭게 태어난 판무 1팀으로써 주간 회의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네, 팀장님.”
“예!”
오진아는 오늘이 팀장직 첫날이라는 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능숙하게 회의 안건을 토의하기 시작했다.
“……앞으로의 판무팀 계획은 이렇게 진행될 예정입니다.”
““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건일 매니저님.”
“네, 팀장님.”
회의 서류를 한 곳에 뭉치는 오진아 팀장의 시선이 황건일 매니저를 향했다.
“기존 1팀에서 교육받았던 내용은 싹 잊어 주세요. 저희가 처음 2팀에서 정우 파트장님께 배운 내용 그대로, 정말 작가를 위해서 최상의 결과물을 낼 수 있는 방식으로 업무 처리 부탁드립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질책하려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 이 말을 꺼낸 건 건일 매니저님이 담당하는 작품이 과도하게 많아서니까요. 지금 실연재 담당하시는 것만 22 작품이죠? 구작은 7 작품이고요.”
“……예, 맞습니다.”
오진아 팀장이 말하는 실연재는 실제 매일 연재 중인 작품 그리고 구작은 이미 완결이 난 작품을 뜻한다.
구작의 경우 대부분 김동현 팀장이나 조팟 그리고 이창윤 매니저에게서 넘겨받은 완결 작품이었으니 황건일 매니저의 책임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실연재 작품의 경우엔 이유가 어찌 되었든 황건일 매니저가 직접 작가 컨택을 하고 계약을 한 거였기에 질책이 아니라는 오진아 팀장의 말에도 황건일 매니저의 고개가 앞으로 숙어졌다.
“건일 매니저님은 작가님들께 연락드려서 윤문까지 희망하시는 작가님들 그리고 2교 이상 교정 원하시는 작가님 리스트 따로 파악해서 알려주세요. 거기에 맞춰 건일 매니저님이 감당하기 힘든 수의 작가님들은 정우 파트장님이 맡아주시는 걸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전날 밤.
나와 오진아가 따로 협의한 이야기였기에 나는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아의 말대로 지금 건일 매니저가 하는 업무량은 그의 능력을 초과하는 양이었으니까.
“저…… 팀장님?”
“말씀하세요.”
“그렇게 되면 저는 업무량이 줄어서 좋지만…… 정우 파트장님께도 죄송하고…… 거기다 담당자별 매출에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건일 매니저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그 모습을 본 오진아의 입이 열렸다.
“그건 괜찮아요. 각 매니저들이 담당해야 할 종 수 압박은 제 선에서 커트하기로 했으니까요. 매출 또한 저희 1팀은 담당자 개인 매출은 필요 없이 팀 매출만 고과에 반영해달라고 대표님께 말씀드렸으니 매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아……. 감사합니다, 아니, 열심히 하겠습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황건일 매니저에게 오진아 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회의 중간에도 말했지만, 우리 1팀은 지금 매출 문제가 아닌 인식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야 하니까요. 그럼 첫 주간 회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건일 매니저님은 먼저 업무 보시고 파트장님은 잠시 남아주세요.”
황건일 매니저가 나가고 대회의실엔 오진아 팀장과 나 둘만 남게 됐다.
“하루아침에 팀장이란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긴장하시는 것도 없네요?”
“그럴 리 없죠. 고작 팀장이 목표가 아니니까요. 거기다 다른 곳 대표도 하시는 대 작가님이 옆에 계신데 제가 떨릴 껀덕지나 있나요?”
한쪽 입꼬리를 살짝 휘는 오진아 팀장의 말에 나는 마른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무슨 일입니까? 따로 하실 말이라는 게.”
“무슨 일이겠어요. 다음 작품 추천받아야죠.”
“아주 팀장님 되시더니만 그냥 맡긴 물건 받듯이 달라고 하시네요?”
대놓고 혀를 차는 행동에도 오진아 팀장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그럼요? 우리 이제 공범인데 제가 빨리 자리 잡아야 서로 좋은 거잖아요.”
‘거참. 글만쓰고살지요 작가님 작품만 해도 당분간은 괜찮을 건데.’
물론 글만쓰고살지요 작가님이 앞으로 몇 년 동안 꾸준히 연참을 하고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도 단 하루의 연재 펑크 없이 글을 쓰리란 걸 아는 사람은 오직 나 뿐. 오진아의 입장에선 조바심을 내는 게 당연하긴 하다.
“지금은 ‘법대로 응징한다’ 정도의 작품은 없어요. 하지만 눈여겨볼 만한 작품이 몇 있긴 한데 우선…….”
공범을 위해 나는 회귀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 * *
새로운 팀에서 새로 추가된 업무를 진행하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8월이 마무리되고 어느덧 더위가 한풀 꺾여 서늘함 마저 드는 9월의 첫째 주 금요일이 되었다.
드르륵— 드르르르륵—
“……음? 무슨 할 말이 또 있나?”
그동안 피로가 누적 된 게 느껴졌기에 간만에 연차를 썼다. 그리고 집에서 엘가 업무 보고를 받으며 내 글 비축분을 쌓고 있는데 또다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이번에도 발신자는 단풍 삼촌이다.
“조금 전에도 전화했으면서 무슨 일—”
—대표님아! 메일 봤어? 메일!
통화 수신 버튼을 누르고 내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단풍 삼촌의 목소리가 광광 울렸다.
“메일? 지금 확인할게. 잠시…… 어?”
—그아하하하! 생소한 곳이어서 네가 잘 모를 수 있는데 이 플랫폼이 북미권에서는 엄청 큰 곳이거든. 아직 한국에 정식 서비스는 시작 안 해서 너는 모를 건데—
“알아.”
—……어엉? 안다고?
알 수밖에 없지.
내가 포워드 받은 메일 원문 하단에 박힌 새빨간 로고. 그건 OTT 서비스의 황제 넷플렉스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