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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90화 (90/201)

#90화 ― 끌어내릴 거에요.

미니 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사두용미 아카데미의 종강식과 함께 시작한 7월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7월 1일 부로 황건일 매니저가 판무 1팀으로 이동했고 BS북 오성민 대표가 선인세를 풀어서 그런지 다들 조금씩 계약을 늘려가는 모양이다.

‘나 빼고는 다들 늘리고 있지.’

주간 회의에서 김동현 팀장은 내게도 작품 수를 늘리라 했지만, 작품 컨택이 잘 안 된다면 뻐기는 중이다.

‘지금 더 늘릴 수는 없지. 나는 이제 슬슬 BS북에서 발을 빼야 하는 상황이니까.’

내가 담당하는 모든 작품들은 궤도에 올라선 상황. 각 작품마다 실연재를 따라다니는 결사대가 있기에 이제 내가 원하는 갓벽한 타이밍에 강경진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걷어차고 나오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다.

“아하핫! 예, 작가님! 아유우~ 바쁘긴요 무슨. 작가님이 연락주시면 저도 합법적인 농땡이 좀 피고 좋죠, 하하.”

비록 마른 편이었지만 건강미를 뿜어내던 황건일 매니저. 그는 전화기 너머로 작가들을 대할 때 늘 웃고 있었다.

하지만 밝게 웃으며 내뱉는 그의 목소리와 달리 황건일 매니저는 날이 갈수록 점점 수척해져 갔다.

그리고 어느 날.

1팀의 한우석 팀장과 김영진 파트장은 새로 뽑을 신입 사원 면접에 들어가고 황건일 매니저 홀로 자리에 남아있던 그때였다.

“예…… 예?! 아…… 그게……. 제가 옥상으로 가서 전화드리겠습니다 작가님.”

작가들과 통화할 땐 늘 당당하던 모습과 달리 황건일 매니저가 한 작가에게 전화를 받고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길래 저러지?’

그동안 우리 2팀에 있을 때도 그리고 한우석 팀장이 자리에 있을 때도 본 적이 없던 그런 허둥대는 모습이어서일까?

왜인지 모르게 이날 황건일 매니저가 보였던 모습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예, 감사합니다 작가님!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하하!”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단순한 착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며칠 후부터 황건일 매니저는 다시 원래의 그 모습 그대로, 아니, 전보다 훨씬 더 밝고 당당해진 모습이 되었다.

“이야, 황건일이?”

“예, 팀장님!”

“너 뭐 하는 놈이야? 어? 무슨 계약의 성좌라도 붙었나, 무슨 계약을 이렇게 무더기로 해?”

“하하, 운이 좋았습니다.”

“운빨도 실력이야 인마. 역시 이래서 사람은 터가 중요한 거야, 어? 2팀에 있을 땐 그냥저냥 계약하던 놈이 우리 1팀 오니 그냥 훨훨 날잖아? 안 그래?”

“하하하…….”

“새끼, 퇴근하고 영진이랑 셋이서 술이나 한잔하자. 너 1팀으로 온 거 환영회도 할 겸.”

“좋습니다, 팀장님!”

황건일 매니저가 계약하는 작가 대부분은 신인 작가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하루에 하나꼴로 신작을 연달아 계약하는 건 BS북 창립 이래로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래서였는지 판무 1팀의 한우석 팀장마저 황건일 매니저를 좋게 보는 눈치다.

‘괜한 걱정이었나 보네. 1팀에 잘 적응한 것 같아 보이니 다행이야’

혹시나 했던 노파심이 수그러 들었다.

1팀에서도 황건일 매니저가 잘 적응하는 것 같아 보여 이제 정말 마음 놓고 퇴사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팀장님, 작가님 전화가 와서 잠시 받고 오겠습니다.”

“어, 그래. 다녀와.”

김동현 팀장에게 허락을 받고 나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로 이동해 이지연 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연 본부장님, 이제 통화 가능해요. 무슨 일이에요?”

—웹툰 일정 나와서 보고드리려고요.

“오! 어떤 거요? 불 지르는 파이어맨? 아니면 남작가 성형 천재가 되었다?”

아무래도 좋은 소식인 모양이다.

이지연이 기분 좋을 때 내는 흥얼거림이 전화기 너머로 슬며시 들리는 걸 보니.

—둘 다요. 불지파는 웹월드에서 8월 14일 그리고 남성천은 테일랜드에서 8월 15일 런칭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요? 해당 일정으로 괜찮으실지 일정 확인 부탁드려요.

“잘됐네요! 잠시만요, 이어폰 좀.”

주머니에서 이어폰 줄을 빼내 귀에 꽂고는 핸드폰 달력 일정을 확인했다.

“불지파는 금요 웹툰이고 남성천은 토요 웹툰……. 어? 둘 다 빨간 날이네요?”

—네, 원래 웹월드랑 테일랜드 둘 다 토요 웹툰으로 런칭하자고 했었어요. 광복절 연휴여서 그때 프로모션 태워주겠다고요. 그런데 아무리 플랫폼이 서로 달라도 연재 요일은 겹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음……. 그렇긴 하네요. 두 작품을 연달아 연재하는 날에 갑자기 일이라도 터지면 수습하기도 두배로 힘들 테니까요.”

이로써 다음 달이면 현재 테일랜드에서 연재 중인 ‘인턴사원 회장님’을 포함해 내가 쓴 글 중 총 세 작품이 웹툰계의 메인 플랫폼에 자리 잡게 되는 상황. 1년 만에 내가 이룬 아니 이지연과 엘가의 식구들이 함께 이룬 성과에 뿌듯함이 가득 밀려왔다.

—그럼 런칭 일정 그렇게 해달라고 웹월드랑 테일랜드에 전달할게요.

“고마워요 지연 본부장님. 이제 혁명적인 작가 생활만 런칭하면 제가 글로 쓰는 작품은 전부 다 웹툰화 되는 거겠네요.”

—대표님, 이제 2개 런칭 준비하는데 바로 새로운 작품 그리라는 압박? 그런 거죠 지금?

“아하하, 장난이에요. 웹툰 본부 매니저님들 런칭 준비하느라 고생 많이 하고 있을 텐데 런칭일 맞춰서 인센……헛?!”

—대표님? 정우 씨? 무슨 일이에요?

이지연 본부장과의 통화를 위해 오늘 내가 온 카페는 1층 전면부가 통유리로 된 카페였다.

평소 내가 가던 후미진 카페가 얼마 전 폐업해 엘가 임직원들과 통화가 필요해 새로 찾게 된 카페였는데.

“아…… 아니에요. 일정 그렇게 해주시고 제가 조금 있다가 톡으로 연락드릴게요.”

일부러 창가 자리에 앉아 혹시라도 회사 사람 누가 오는지를 보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데 이어폰을 낀 채로 잠시 달력을 보느라 정신이 팔린 모양이다.

황급히 전화를 끊고 이어폰 줄을 당겨 귀에서 빼냈다. 그리고 카페 통유리 밖에서 나를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어색한 미소와 함께 슬쩍 손을 올렸다.

딸랑—

“진아 매니저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

카페 안으로 들어온 오진아 매니저의 표정은 평소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내 심장은 두방망이질 쳤다. 마치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다.

“저는 작가님과 통화하러 온 건데, 하하. 아직 주문 안 했죠? 뭐 드실—”

“작가님과 통화하셨다고요?”

“……?”

“작가로서 통화한 게 아니실까요? 노원지귀 작가님.”

“…….”

오진아 매니저가 카페 안으로 들어와 내게 묻는 말에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든다.

곧바로 대답을 해야 했다.

하지만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마치 시간이 멈추고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하하, 그게 무슨 소리예요?”

영겁처럼 느껴지던 그 찰나의 순간을 이겨내고 뱉은 말에 오진아 매니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지파는 금요 웹툰이고 남성천은 토요 웹툰. 어? 둘 다 빨간 날이네요?”

“……네?”

“고마워요 지연 본부장님. 이제 혁명적인 작가 생활만 런칭하면 제가 글로 쓰는 작품은 전부 다 웹툰화 되는 거겠네요.”

“…….”

“웹툰 본부 매니저들 런칭 준비하느라 다들 고생 많이 하고 있을 텐데 런칭일 맞춰서 인센……. 여기까지가 정우 매니저님이 LGA컴퍼니의 지연 본부장님이란 분과 하신 대화일 텐데요. 대화 맥락으로 유추해 봤을 때 LGA컴퍼니의 이지연 대표님을 말하신 거겠죠.”

“…….”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 같다.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적시고 싶고 손으로 코끝을 만지고 싶은 기분이다.

무심결에 본능을 참지 못하고 마른침을 넘기는 그때, 오진아 매니저는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구화법이라고 하죠. 농아인 친구가 있었거든요.”

“…….”

서늘해진 등골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지는 와중에도 오진아 매니저는 덤덤히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이 말을 그대로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강한 부정이 긍정으로 보인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런 부정 않고 가만히 듣고 있는 것 또한 긍정의 의미로 보일 수 있었으니까.

“진아 매니저님.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저 대표님 딸이에요.”

가뜩이나 멍멍해진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예?”

“오성민 대표님 딸이라고요. 아무한테도 하지 않은 얘기를 하는 건 정우 매니저님의 비밀을 저도 지킬 거라는 뜻이에요.”

“…….”

“퇴근하고 따로 얘기하시죠. 시간 내주세요.”

“…….”

아무래도 걸린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를.

* * *

오늘은 7월 17일 금요일인 제헌절.

퇴근 후 오진아 매니저와 마주한 룸 식당에서 나는 그녀가 폰을 꺼내 건넨 온갖 증거 자료들을 보며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이건 정말…….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네요.”

오진아 매니저의 클라우드 사진첩엔 BS북이 종이책 출판사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해왔던 온갖 파렴치한 행위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BS북은 원래 개인 회사였어요. 그리고 웹소설 출판사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고 법인으로 전환 하면서 이 전보다 훨씬 더 많은 비리와 불법 행위를 저지르고 있죠. 소속 작가들 그리고 BS북에서 일하는 직원들도 포함해서요.”

“…….”

오진아 매니저의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처럼 BS북은 내가 알고 있던 것 그 이상으로 많은 비리에 연루 되어 있었으니까.

‘특히……. 강경진이 입사하고 난 후부터 모든 사기 계약이 시작 됐어.’

오진아 매니저가 보여 준 증거 자료들을 살피니 이전 까지는 치사한 장난질 정도였던 BS북의 꼼수가 강경진의 입사 뒤부터는 본격적인 사기 행위로 변모해 나가는 형태였다.

“정우 매니저님도 증거 자료를 봐서 알겠지만 BS북이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 사촌 오빠, 강경진 본부장이 아버지한테 접근한 후부터 점점 겉잡을 수 없이 범죄 행위가 늘어가고 있죠. 그리고 저는 이걸 더는 두고 보지 않을 생각이고요.”

“…….”

“경진 오빠는 위험한 사람이에요. 저와 나이 차이가 있긴 하지만 미국 한인 커뮤니티는 상당히 좁거든요. 그래서 전해 들은 얘기도 많고요.”

오진아 매니저는 잠시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눈을 응시했다.

“BS북에 들어오기 전까지 경진 오빠가 무슨 일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알고 계시나요?”

“골드만 삭스 본사에 다니다 나와서 개인 사업을 했다는 정도로만 들었어요.”

“개인 사업……. 그게 무슨 일인지는 모르시죠?”

내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자 오진아 매니저는 입술을 잠시 질끈 깨물었다.

“경진 오빠는……. BS북 같이 작은 기업을 키워서 비싼 값에 더 큰 기업에 파는 일을 했어요.”

“기업 사냥꾼 같은 건가요?”

“아뇨, 기업 사냥꾼 까지는 아니고 그 일을 주도하고 중간에서 수익을 얻는 사람이었죠.”

오진아 매니저는 가득 차 있던 맥주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얼핏 듣기론 기업 가치를 높이는 일이기에 좋게 보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경진 오빠 같은 경우는 기업의 장기적 성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

“안에 담긴 내용물이 아니라 선물 포장지만 예쁘게 만들어 보기 좋게 하는 것처럼, 단기간에 극단적인 기업 운영을 강행해 몸집을 불려 나갔죠.”

말을 잇던 오진아 매니저는 목이 타는지 다시 맥주 잔을 가득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한 후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예상하시는 대로 겉모습만 멀쩡할 뿐이지 그 속은 곪아가고 있죠. 단지 예쁘고 거대한 겉모습을 위해 내부 직원들을 믹서기에 갈아 넣었고 경쟁 기업과의 출혈 경쟁도 마다하지 않는 식이었으니까요.”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던 오진아 매니저는 각오를 다지려는 듯이 잠시 말을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녀는 알콜향이 짙은 숨을 내뱉으며 다시 말을 이었다.

“경진 오빠의 다음 타겟이 BS북인 거에요. 그리고 저는 이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하고 싶진 않아요.”

“두고 보지 않겠다면……?”

“끌어내릴 거에요. 경진 오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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