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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89화 (89/201)

#89화 ― 계속 다니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BS북 오성민 대표의 소환에 회사로 달려온 강경진 본부장은 자신을 향한 고성에도 표정을 구기지 않았다.

강경진은 여유란 늘 표정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가 생각하기엔 아직 BS북은 그와 대표가 계획하는 여유로운 범주 안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강경진은 얼굴을 구기지 않고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 아니, 그보단 조금 더 경직되었지만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진정하세요 이모부. 비록 최근 들어 일이 좀 생기긴 했지만,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에요.”

비록 회사였지만 지금은 주말.

거기다 사무실 안엔 둘 뿐만 있었기에 강경진은 자신의 혈연관계를 슬쩍 들먹이며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강경진의 이모부인 오성민 대표의 표정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진정? 지금 이게 진정하게 생긴 상황이야? 시간이 지나도 수그러들긴커녕 정글북인지 뭔지 그 빌어먹을 곳에선 더 난리잖아! 네가 나한테 뭐라고 그랬어? 소송은 잘 마무리됐다고 하지 않았냔 말이야!”

정글북에 LGA컴퍼니 표절 사건이 불거진 이후로부터 한 주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오성민의 말처럼 BS북의 악명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높아지기만 할 뿐이었다.

강경진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느긋했다. 지난 화요일 이 일이 터졌을 때 자신의 이모부인 오 대표와 이미 나눴던 대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경진은 자신의 이모부가 이런 말을 다시 꺼내는 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지 답답함을 해소하고 싶기에 하는 말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강경진은 지난 화요일에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걸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엘가 놈들이 장난질을 쳤네요. 형사는 취하했는데 해당 작가들한테 바로 민사가 들어오는 걸 보면요.”

“지난번에도 엘가가 했다고 하더니만. 확실한 거 맞아? 작가들이 직접 소송을 한 걸지도 모르잖아?”

오성민의 말에 강경진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아닐 겁니다. 이번에 민사 제기한 엘가 쪽 작가들 셋 모두 법무법인 김이박에서 사건 수임을 했죠. 찾아보니 검찰 출신 전관 타이틀 변호사더라고요. 기본 수임료만 억이 넘는 변호사죠.”

“뭐…… 뭐어? 억이 넘어? 엘가 그것들 미친놈들 아니야? 이겨도 손해인 게 뻔한데 뭘 하러 이딴 짓을 하는 거야?”

지금 강경진이 꺼낸 억대 수임료란 말은 지난 화요일엔 듣지 못했던 말이었기에 오성민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떡 벌어진 입으로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오성민과 달리 강경진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그것도 기본이 억이죠. 최소 1억으로 잡는다고 하면 작가 셋에 3억입니다. 표절 이슈로 소를 제기한 작가 셋 모두 신인이던데, 각자 1억씩 내고 소송을 진행한다? 이건 엘가가 뒷배로 있다는 게 분명한 거죠.”

강경진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갔다.

“지난번에도 제가 딱히 신경 쓰실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던 건 소송을 한다고 이게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엘가 작가들이 민사를 걸어도 우리가 1심에서 상소하고 2심에서 항소하고 대법원에 상고하면서 질질 끌면 이삼 년 지나가는 거 후딱이니까요. 저희는 그사이에 원래 계획대로만 진행하면 되는 거고요.”

“흐음……. 그렇긴 한데…….”

설명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는 오성민에게 강경진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모부, 걱정 마세요. 저희는 수임료 200짜리 변호사 써서 우리 쪽하곤 전혀 상관없다는 액션만 취하면 되니까요. 솔직히 독자들은 재미만 있으면 보지 어디가 원조인지 이런 거 안 따지잖아요. 누가 밥 먹을 때 어디가 원조인지 따지면서 먹나요? 배고플 때 자기 먹고 싶은 거 별생각 없이 먹는 거죠.”

비록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그가 내뱉는 말에선 그가 평소 독자들을 어떻게 여기는지가 여실히 드러났다. 그리고 오성민 대표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잠시 주억거리다 다시 미간을 구겼다.

“아니, 그래도 법무법인 김이박 수임료가 인당 억대라며? 그러다 소송 지면? 그 수임료 우리가 물어줘야 하는 거 아냐?”

“에이, 이모부. 물어주면 되죠?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러지 변호사 선임 비용 편차가 얼마나 큰데 비용 전액을 돌려받을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확실한 거야?”

오성민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지자 강경진도 옅은 미소로 화답했다.

“물론이죠. 소송 비용으로 인정하는 변호사 선임 비용을 소송 목적의 가액에 따라 정해두니까요. 그 규칙에 따라 정해진 금액을 저희가 소송에 졌을 때 물어주면 되는 건데 소송 목적의 값이 법무법인 김이박 변호사 수임료보다도 훨씬 낮잖아요. 계산하자면 국선 변호인 보수 1배에서 많아도 5배 수준이라 진짜 많이 들어봤자 몇천도 안 나올 거예요.”

“아니, 이 자식이! 그런 걸 진작 말해 줬어야지! 괜히 마음 졸였잖아?”

“하하, 저는 이모부도 당연히 알고 계신 줄 알았죠.”

강경진 본부장은 바짝 다가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오성민 대표를 향해 해맑게 미소 지었다.

‘기본 상식도 없는 사람이 뭔 사업을 한다고, 쯧.’

물론 강경진의 속내는 그가 짓는 미소와는 사뭇 달랐다.

‘어릴 때부터 잔대가리 하나는 타고난 놈이야. 역시 여러모로 써먹기 좋다니까.’

하지만 동상이몽을 꾸는 건 오성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럼 뭐, 우리 경진이 말대로 소송은 일단 질질 끄는 거로 생각하면 되겠고. 나머지는 어때? 소송 말고 한 팀장 그 새끼도 말썽인데 말이야.”

“한우석 팀장은 딱히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급한 불 끌 용도로 데려온 거잖아요?”

“흠……. 그렇긴 하지. 그 싸가지 없는 새끼. 솔직히 네가 데려오자고 하는 거 아니었으면 두 번 다신 우리 회사 문턱도 못 넘게 했을 거야.”

강경진은 마치 조카가 재롱을 피우듯 오성민의 어깨를 옆으로 둘러 슬쩍 감쌌다.

“하하, 이모부. 조금만 참으세요. 지금은 과도기여서 한 팀장 같은 장기말이 필요한 거 아시잖아요?”

처조카의 말에 오성민은 끄응 소리를 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나도 알긴 하지. 그런데 지금도 50억에 사겠다는 곳이 있는데 굳이 한우석 같은 꼴 보기 싫은 새끼들 옆에 둬가면서 내가 회사를 유지해야 하냐 이 말이야. 니네 웹툰 본부에 있던 그 문신이나 덕지덕지 한 말라깽이 양아치 같은 놈도 봐라. 그놈은 시키지도 않은 트레이싱인지 뭔지 하다가 일만 키우고, 쯧.”

“에이, 이모부도. 50억을 누구 코에 붙여요?”

오성민의 말에 강경진은 무슨 소릴 하냐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한 팀장 같은 장기말하고 불편한 동거긴 해도 지금은 참는 게 나아요. 50억은 진짜 푼돈이에요.”

“뭐, 푼돈?”

50억을 푼돈이라 하는 강경진의 말에 오성민은 혀를 찼다. 하지만 강경진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재작년만 해도 100억 규모던 웹소설 시장이 작년엔 200억대로 성장했잖아요? 올해는 500억 원대로 성장할 겁니다. 내년에는 1,800억 대 이상으로 성장할 거고요. 웹소설은 아직 시작일 뿐이에요, 이모부. 장담컨대 일이 년만 지나도 100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예요.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흐음…….”

숫자의 힘으로 사람을 홀리는 자신의 주특기를 펼쳤음에도 오성민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강경진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이모부, 웹소설 시작하면서 법인으로 바꾸기 전까지만 해도 대여점 시장에서 솔직히 큰돈은 못 버셨잖아요. 개인사업자 하실 때처럼 작가한테 2천 부 찍었다고 하고 3천 부 찍어서 여기 찔끔, 저기 찔끔 팔아서 차액 남기고, 그런 걸로는 큰돈 못 만져요. 힘드시겠지만 저희 계획대로 최소 100억 이상 올라갈 때까지만 견뎌 주세요.”

“하긴……. 100억은 있어야 나도 일 좀 그만하고 편하게 좀 살지, 쯧.”

강경진은 자신의 이모부가 지금도 하는 일은 딱히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속내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은은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솔직히……. 저는 100억도 적다고 생각해요.”

“으하하, 적어? 우리 조카가 아주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구나.”

“빈말 아니에요, 이모부. 지금 BS북이 웹소설 시장을 선점한 것만으로도 50억에 사겠다고 하는데, 웹툰 시장도 잡는다면 어떻겠어요? 그러면 50억 100억씩 회사 몸값이 올라가는 건 정말 순식간일 거예요.”

“음……. 정말 그렇게만 된다면 꼬마 빌딩 사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투자긴 하지.”

아래턱을 매만지며 이제야 흡족한 미소를 짓는 오성민 대표의 모습에 강경진 본부장은 마무리를 짓기로 마음먹었다.

“당연한 거죠. 그리고 한 팀장은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되세요 이모부. 한 팀장이 원하든 원치 않든 오래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 될 테니까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영문을 모르겠다는 오성민의 눈빛에 강경진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올댓스토리 상황 들어보니까 재정 상황이 많이 안 좋아진 모양이더라고요. 저희한테 30억 투자한 것 말고도 다른 중소 출판사에도 여기저기 투자를 했는데 성과가 전부 안 좋다고 하고요.”

“하하하, 그래? 경진이 너 진짜 보는 눈 하나는 좋구나? 처음에 돈 받아오면서 올댓이 망할 회사라고 큰소리칠 때만 해도 솔직히 못 믿었었는데 말이야.”

오성민은 자신의 처조카를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애초에 웹월드나 테일랜드처럼 웹소설, 웹툰에만 집중한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문어발식으로 손대다 보니 망할 수밖에요. 투자금을 빌미로 판무 작품 가져와서 키워보려 했지만, 무리한 경영으로 결국 그나마 잘돼가던 로맨스 쪽도 함께 침몰하게 된 거죠.”

“우리 투자금 받은 걸 회수한다거나 하진 않겠지?”

강경진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은 없어요. 투자금 유치 계약서에 그런 조항 자체가 없거든요. 거기다 올댓 자체가 대기업 계열사잖아요. 모기업이 컨텐츠 전문으로 팔던 회사도 아니고 망한다고 해도 컨텐츠 사업부만 없어지는 식으로 진행될 거예요.”

“으하하, 잘됐네. 아주 잘됐어. 그러게 로맨스 쪽이 잘되고 있었으면 그쪽에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할 거지 괜히 판무 쪽도 노리다가 쪽박을 차버렸어!”

대표실에 가득 울리는 오성민의 너털웃음을 들으며 강경진은 계속 말을 이었다.

“저희야 30억 꿀떡 삼킨 거니 나쁠 것 없는 장사죠….”

“으하하하! 그렇지! 우리한텐 좋은 일이지!”

“그러니 한 팀장은 너무 걱정 마세요. 올댓 관련해서 새로운 소식 들으면 이모부한테도 바로 말씀드릴게요. 올댓 망하면 한 팀장도 바로 치워 버리면 되니까요.”

“그래, 이왕이면 망할 거 당장 망했으면 좋겠구나. 그러면 우리 직원들이 메인 플랫폼에만 집중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하하, 그러면 정말 좋겠네요.”

오성민을 따라 웃음 짓던 강경진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계속 다니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누구?”

“…….”

강경진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 잠시 고민하던 오성민은 이내 누구를 말하는 건지 깨닫곤 인상을 찌푸렸다.

“하아……. 누굴 닮아서 고집이 그렇게 센지, 쯧.”

“하하, 어차피 오래 다니게 하실 생각은 아니시잖아요?”

“100억 받고 팔아넘기기 전까진 지 하고 싶다는 대로 내비 두려고. 쯧, 여하튼 경진이 너는 회사 제값 받고 팔아 넘길만한 곳이나 계속 잘 알아봐. 그래야 나도 약속한 대로 잘 챙겨줄 거 아냐? 안 그래?”

오성민의 말에 강경진은 피식 웃었다.

“물론이죠, 이모부. BS북을 평생 직장이라고 생각할 개돼지들은 낌새도 모르게 처리할게요.”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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