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 건필입니다.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질문에 그나마 얼마 없던 취기마저 사라지는 기분. 살짝 놀란 눈빛으로 진아 매니저를 바라보니 그녀는 평소와 동일한 무표정으로 쌍꺼풀 짙은 눈을 끔벅일 뿐이다.
‘……뭔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
몇 달 전 오진아 매니저와의 첫 회식 자리에서 그녀는 소름 끼치는 분석력으로 내가 노원지귀가 아닌지 의심했었다. 그렇기에 그녀 앞에선 내 행동과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야 하는 게 맞지만, 어떤 출판사를 차리고 싶은지를 묻는 말은 피하고 싶지 않다.
나 혼자만 잘 먹고 잘사는 삶.
내가 그런 삶을 원했다면, 과거로 되돌아온 후 내 글만 쓰고 코인 투자에만 집중하는 게 더 나았을 터.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아니다.
그런 안락한 삶을 뒤로한 채 이런 좋좋소에 내 발로 스스로 욱여넣은 건 출판계에 변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니까.
“저는…… 상생할 수 있는 출판사를 만들고 싶어요.”
“……상생이요?”
“네, 상생. 작가와 출판사 그리고 편집자 모두가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그런 출판사를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진아 매니저의 발걸음이 살포시 느려진다. 아무래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겠지. 지금 나는 엘가의 대표가 아닌 돈과 매출 그리고 실적만 쫓는 출판사, BS북의 판무팀 매니저 박정우니까.
“우리 회사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중요하죠. 하지만 제가 출판사를 차린다면 작가님들에게 당장 돈이 되는 글만 쓰라고 요구하진 않을 것 같아요. 작가님들이 쓰고 싶은 글, 좀 더 다양하고 창의적인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싶거든요.”
“음……. 하지만 작가가 자신이 쓰고 싶은 글만 쓴다면 독자의 니즈와는 너무 멀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위험이 크지 않을까요?”
진아 매니저는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눈앞의 수익만 보고 싶진 않다는 뜻이에요.”
“……?”
“작가님께서 익숙한 맛으로 쓰길 원하신다면 그렇게 진행해야 할 테죠. 하지만 작가님께서 신선하고 참신한 소재로 집필하고 싶다고 하시면, 당장 대중에게 익숙한 소재는 아니더라도 작가님의 의견을 수용해 함께 더 좋은 작품으로 만들어 나가고 싶어요. 그런 출판사가 하나쯤은 있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하나쯤은……. 있어도 나쁘진 않겠네요.”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진아 매니저를 보니 나와 엘가의 접점을 눈치채고 물은 질문인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우린 갈림길에 섰다.
“저는 이쪽 방향이에요.”
“들어가세요. 주말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봬요.”
“정우 매니저님도요.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 * *
지난 한 주간 워낙 사건 사고가 많아서였는지 주말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작가님……. 주말 내내 퇴고만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비축은 정말 하나도 안 쌓으신 거세요?”
“타는 냄새 안 나세요, 작가님? 발등이 아니라 허벅지까지 활활 타고 계신데?”
“작가님……. 말이 너무 달라지신 거 아닌가요? 계약 전에는 하루에 2빡씩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 여, 여보세요? 작가님?”
오늘도 사채업자에 빙의한 BS북 판무 2팀 매니저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원고 독촉 전화를 돌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물론 나 또한 다른 이유로 바쁘긴 매한가지다.
“정우 매니저, 코즈일 작품 이관 언제부터라고 했지?”
“소설피아는 28일, 테일랜드와 웹월드는 차주 월요일인 6월 1일에 엘가 쪽으로 이관될 예정입니다.”
“하아……. 씁쓸하구만. 알겠어, 마무리 잘 해줘.”
“네, 팀장님.”
작품 이관을 위해 현재 코즈일로 연재하던 글은 모두 휴재 공지를 올린 상황이다. 갑작스러운 휴재에 독자들의 원성이 엄청났지만 별다른 방법은 없다.
‘BS북 CP를 통해 관리하던 글을 LGA컴퍼니 CP로 옮기는 시간이 각 플랫폼에서도 필요하다니까, 어쩔 수 없지.’
작품 이관이 매달 1일에 진행되는 대부분의 플랫폼과 달리 소설피아의 경우 작품의 정산도 이관도 매달 28일에 진행한다.
운영팀을 통해 들은 말로는 플랫폼에서 진행하는 작품 이관 작업은 보통 2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 이관 작업은 2주도 안 되는 기간 안에 촉박하게 진행되는 일정. 그렇기에 운영팀과 나 그리고 내 본진인 엘가의 직원들 또한 바쁠 수밖에 없었다.
차례차례 급한 업무를 정신없이 처리해 나가는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서 노원지귀 폰이 진동을 울려댔다.
“팀장님, 잠시 작가님과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어, 다녀와.”
옥상으로 올라와 아무도 없는지 확인을 마치고 전화를 받았다.
“지연 본부장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다름이 아니라 사랑과평화 작가님하고 코즈일 표지 관련해서요…….
“표지요? 우선은 디자인 표지로 진행하고 새로 만든 표지 완성되면 그때 교체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디자인 표지란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외주를 맡겨 만든 캐릭터가 들어가 있는, 통상적으로 독자들이 알고 있는 그런 표지가 아니다.
웹소설 출판사에서는 일반적으로 큰 수익성을 기대할 수 없거나 급히 표지를 만들어야 할 때 디자인 표지를 사용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같은 곳에서 산이나 강 등만 그려진 풍경만 있는 그림에 타이포 외주만 맡겨서 작품 제목, 작가 이름, 장르, 출판사 로고 등만 넣어 급하게 만든 표지를 흔히 디자인 표지라고 말한다.
‘이미 다 끝난 얘긴데, 무슨 일이지?’
작품을 이관하게 되면 ISBN(국제 표준 도서 번호)도 따로 등록해야 하고 부가적으로 할 일이 많다. 그리고 지금처럼 급하게 작품 이관을 진행하는 경우 가장 중요한 문제가 표지다.
표지 제작 일러스트레이터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적으로 표지 제작에 걸리는 기간은 3~4주 정도. 만약 빠른 제작을 요청한다면 3주 이내 그리고 우리 엘가처럼 자체 일러 팀이 있다면 그보다 조금 더 빠르게 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이관받는 작품 중 사평 작가는 구작이 상당히 많았고 코즈일로 쓰는 내 글만 해도 완결된 ‘남작가 성형 천재’를 빼고 ‘인턴사원 회장님’과 ‘불 지르는 파이어맨’은 아직 연재 중인 작품이기에 표지를 대충 만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우선 디자인 표지로 제작하기로 협의한 상황이었다.
—네, 그거 때문에 말씀드리려고 해요. 코즈일이라는 이름은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 팬층도 상당히 두꺼운데, 아무리 기간이 촉박하다고 해도 디자인 표지를 사용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요.
“음……. 그러면 BS북 표지 구입을 하자는 말이세요?”
—……네. 디자인 표지를 사용하는 기간이 몇 주에서 길게는 한 달 정도뿐이겠지만, 아직 연재 중인 인턴사원 회장님하고 불 지르는 파이어맨 같은 경우엔 디자인 표지가 독자들에게 상당히 반감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BS북에서 출간한 기존의 표지를 구입해서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레이어가 분리된 포토샵 파일을 구입해 BS북의 판무 레이블인 파이톤 로고만 없애고 우리 드래곤 로고만 넣어 사용하면 되는 거니까.
‘하아……. 이 양아치 새끼들 돈 벌어다 주기 싫은데.’
하지만 문제는 BS북에서 표지 비용을 원래 제작 비용보다 훨씬 높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것도 2배 이상 높은 금액을!
심지어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표지는 이지연이 외주 작업을 진행한 표지. 그렇기에 표지 제작 비용을 정확히 알고 있음에도 BS북 이 양아치 놈들은 2배가 넘는 표지 비용을 달라며 강짜를 놨다.
솔직히 나는 글을 읽을 때 표지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글만 재미있다면 표지가 어떻든 상관없다는 주의니까.
—대표님이 어떤 이유로 BS북 표지를 구매하기 싫어하시는지는 잘 알아요. 하지만 소설피아에서는 이제 하루 뒤 그리고 웹월드와 테일랜드에선 바로 차주에 우리 LGA컴퍼니 이름으로 코즈일, 아니, 대표님의 작품을 처음으로 선보이는 거잖아요. 대표님 작품을 부족한 모습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요…….
“…….”
하지만 내가 표지를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서 디자인 본부장인 이지연의 말을 허투루 들을 수는 없다. 이지연이야말로 이쪽 업무의 전문가니까.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그럼 BS북 측에 다시 연락해서 표지 구입하겠다고 전달 부탁드릴게요.”
—바로 진행할게요!
이지연과의 통화가 끝나니 바로 한숨이 쉬어졌다. 병신북이 양아치 짓을 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으니까. 몇 푼 안 되는 돈에 신경 쓰지 말자는 생각을 하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그때.
끼익—
“…….”
“…….”
그가 옥상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제 며칠 뒤면 BS북을 떠날 그가.
“정우 매니저님.”
“……안녕하세요 팀장님.”
옥상 문을 닫고 온 그는 지체 없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저 내일모레 퇴사합니다.”
“……들었습니다.”
“아, 들으셨군요.”
“…….”
최진혁 팀장의 퇴사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그의 퇴사가 로켓소년단, 황금거위, 히전죽 작가가 입은 피해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잠시 고요한 침묵만 잠시 오가는 그때, 최진혁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강경진 본부장님은 저를 로맨스 팀에서 구해주신 은인이었어요. 그래서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죠.”
“…….”
“그리고 언제부턴가 강 본부장님이 제게 시키신 일 중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섞여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처음에는 저도 정말 고민 많이 했죠. 편집자로서 해도 되는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최진혁 팀장은 차분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처음이…… 처음이 어려울 뿐이더군요. 한 번, 두 번, 그렇게 본부장님이 지시한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이었습니다. 정우 매니저님도 잘 아시는 것처럼요.”
“그래서……. 그런 이유로 퇴사하는 겁니까?”
내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고, 잠시 침묵을 지키던 최진혁 팀장이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전 정우 매니저님과 대화한 이후로 편집자로서의 저 자신에 관해 정말 많이 생각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그런 일들을 벌였든 간에 제가 해선 안 되는 일을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최 팀장님이 하신 실수는 본인 선에서 바로 잡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 이유가 어찌 되었든 최 팀장님이 하신 일이 없어지는 건 아닐 텐데요.”
싸늘함이 가득 담긴 말에도 최진혁 팀장은 부인하지 않았다.
“저도 압니다 도망치는 것 같아 보일 거란 걸요. 하지만……. 이번 엘가 작가들의 작품과 이슈가 있었던 작품 계약 관련해서는 제가 손을 쓸 수 있는 부분이 없습니다. 더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도 없고요.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강경진이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모르겠다.
그리고 왜 저런 우직함, 아니, 바보같이 강경진을 감싸려는지도 이해 가지 않기에 짜증이 밀려온다.
“사과는 제가 아니라 작가님들께 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네……. 퇴사하고 제가 담당했던 모든 작가님들께, 그리고 피해를 받으신 작가님들께도 사죄의 말을 전하려 합니다.”
“…….”
최진혁 팀장의 태도를 보니 강경진으로부터 분명 무슨 사주를 받은 게 분명하다. 하지만 끝까지 혼자 안고 가려는 태도가 명확하다.
답답함으로 가득 팽창하던 마음에 작은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김이 새는 느낌이 가득 들지만 어쩔 수는 없지. 강경진이 어떤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하는지 나도 수년을 직접 겪어 봤으니까.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면 결코 자신이 세뇌당했다는 걸 깨닫지도 못할 테다.
‘하지만 상관 없지.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오늘 대화는 내가 유익하게 잘 써 줄게.’
옥상에서 최진혁을 마주친 그 순간부터 그리고 이전에도 최진혁을 마주쳤을 때마다 난 그와의 대화를 폰으로 녹음해 뒀으니까. 물론 회귀 전에 쓰던 폰에 비교하면 음질이 구리지만 요즘 쓰는 폰도 녹음 음질은 쓸 만하다.
“그래서, 앞으로는 무슨 일 하실 생각입니까? 다른 출판사 찾으실 겁니까?”
“아뇨……. 제가 한 일이 있는데, 다시 편집자로서 일하는 건 안 되겠죠…….”
고개를 가로젓는 그의 얼굴보다 핏줄이 불거지도록 힘이 들어간 그의 주먹에 눈길이 간다.
“그럼 글 관련 일은…… 아예 그만두실 생각입니까?”
“…….”
간단한 질문에 최진혁 팀장은 한참을 고민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스럽게도 글 관련이 아닌 일은 할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우선은 정우 매니저님께서 했던 말처럼 해보려 합니다.”
“글을…… 쓰신다는 말입니까?”
최진혁 팀장은 내 물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하고 싶은 건 예전도 그리고 지금도 편집자 일을 계속하고 싶죠.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작가님들의 심정을 더 깨닫고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더……. 반성해야 하니까요.”
강경진의 사주가 있었든 없었든 최진혁 팀장이 한 행동은 명확한 잘못이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후회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작게나마 그를 응원하고 싶은 상반된 감정이 들기도 한다.
편집자 일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왜 바보같이 이런 식으로 활자의 세계를 그만두는 거냐, 이왕 글을 쓸 거면 제대로 써서 다른 곳 말고 엘가에 투고해라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에 솟아올랐다. 하지만 내가 최진혁 팀장에게 건넨 말은 단순했다.
“건필입니다.”
“정우 매니저님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최진혁 파트장과 악수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5월의 마지막 금요일.
최진혁 팀장은 BS북을 떠났다.
* * *
그리고 6월의 첫째 주 월요일.
최진혁 팀장의 빈 자리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얼굴이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