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은태식이랑 계약을 했다고?
폭풍 같던 미팅이 개운하게 끝나고 또다시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오늘은 5월의 넷째 주 금요일이다.
‘사평 작가님 글은 다음 주 목요일, 내 글은 다다음 주 월요일이면 이관이 된다니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네.’
작품 이관 협의를 끝내기 전인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그 이틀 동안 BS북 판무팀의 팀장급과 본부장들 그리고 오성민 대표까지 사평 작가님과 코즈일(나) 작가에게 더 좋은 계약 조건으로 계약을 수정해주겠다며 사정을 했었다.
‘BS북에서 끝까지 계약 해지 안 해주겠다고 뻐길까봐 조금 걱정되긴 했지.’
하지만 BS북의 계약 조건 수정 요청을 전화로 받은 사평 작가는 바로 걸쭉한 저주를 쏘아냈다.
그리고 사평 작가는 자신이 당한 피해를 바로 정글북에 글로 써서 올려버렸다.
2015년 5월 22일인 오늘.
정글북의 회원 수는 3,172명이다.
정글북은 웹소설 작가들의 유일한 소통 창구로서 점점 더 활발하게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중이다.
정글북에서 단 며칠 만에 엄청난 조리돌림과 더불어 BS북과의 계약 보이콧을 하자는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BS북은 사평 작가와 코즈일의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었다.
—조팟: 와
—조팟: 다들 들으심?
—김동현 팀장님: ?
—조팟: 엊그제 대회의실 강 본부장님이랑 같이 내려와서 미팅했던 문신충 오늘 잘렸다 함
—이창윤 매니저님: ???
—이창윤 매니저님: 갑자기요?
—조팟: ㅇㅇ
—조팟: 아카회귀 트레이싱한 게 그 문신충이었음
—이창윤 매니저님: 헐?? 그분이 웹툰 1팀인가 2팀 팀장 아니었어요?
—조팟: ㅇㅇ 개어이없음
—김동현 팀장님: ㅉㅉ 어떤 새낀가 했더니만……
—김동현 팀장님: 관상이 사이언스라는 옛말이 틀린 게 없어
조팟이 BS툰을 통해 웹툰화를 시도했었던 ‘아카데미 회귀만 백만 번째’의 트레이싱 사건.
그 주도자가 파브르였다는 게 솔직히 놀랍지도 않다. 똥에 파리가 몰리듯 더러운 짓엔 그런 양아치 놈이 득실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뭐, 조팟놈도 크게 다를 건 없지.’
조팟놈은 내가 엘가 소속 작가들과 한 주간 합숙 훈련을 하는 동안 오진아 매니저에게 찝적거렸다가 내상을 입었다.
며칠간 축 처진 채로 마법사 같은 옷을 입고 다녔던 조팟놈은 다시 원래 입고 다니던 아키하바라스트 옷차림으로 회귀했다.
‘조팟놈은 저러는 게 더 어울리긴 하지.’
조팟놈은 옷뿐만이 아니라 평소처럼 뒷말을 지껄이는 행동도 다시 시작했다.
다만 진아 매니저와 함께 있는 판무 2팀 단톡은 아니고 나와 김동현 팀장 그리고 창윤 매니저까지 넷만 있는 방을 따로 파 여기에서만 험담을 지껄였다.
김동현 팀장과 이창윤 매니저는 한동안 조팟이 울적해 하던 게 신경 쓰였는지 새로 톡방을 파서 험담을 늘어놔도 이젠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다.
“우리 이번 달에 회식 안 했지? 다들 약속 없으면 오늘 가볍게 한잔할까 하는데?”
“좋습니다!”
김동현 팀장의 말에 황건일 매니저가 즉답했다.
“네, 저도 좋습니다.”
“맛있는 곳으로 가죠.”
이번 한 주간의 분위기가 워낙 안 좋아서인지 다들 별말 없이 회식을 진행하기로 했다.
늘 그렇듯 회사에서의 금요일은 정신없이 흘러갔고, 퇴근을 마친 판무 2팀 매니저들은 말없이 회사와 좀 떨어져 있는 상수역 방면으로 향했다.
다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회사와 좀 떨어져 있는 곳에서 회식을 진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일 터다. 그 정도로 고된 한 주였으니까.
“다들 한 주간 정말 고생 많았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번 주에 회사 전체로 봐서도 그리고 우리 판무 2팀 내에서도 좋지 않은 일들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은 상수역 골목 안쪽에 숨겨져 있는 경주식당. 빨간 벽돌 외관만 본다면 평범한 기와집처럼 생긴 곳인데 내부는 깔끔한 우드톤으로 되어있는 세련된 고깃집이다.
“다들 알다시피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뚝심 있고 배짱 있게 기운 차립시다!”
““뚝배기!””
경주식당이라는 백반집스러운 이름과 달리 내부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경양식 전문점 같은 분위기.
물론 김동현 팀장은 늘 그렇듯 신경 쓰지 않고 건배사를 추진했고 판무 2팀 매니저들도 이젠 그러려니 하는 분위기로 김동현 팀장의 비위를 맞춰 와인 잔을 부딪쳤다.
“아니 근데, 팀장님?”
“어, 왜?”
우리가 시킨 메인 메뉴는 고기 큰상 2판.
김동현 팀장은 먹기 좋게 구워져 나온 생삼겹과 목살, 소고기를 번갈아 집어 먹으며 조팟놈의 말에 대답했다.
“사평 작가는 그렇다 쳐도 코즈일이면 솔직히 우리 2팀뿐만이 아니라 출판 본부 전체에서 가장 큰 매출 내는 작가잖아요? 그런데 대표가 그냥 계약 파기하게 허락해줬어요?”
“뭐 별수 있겠어? 이 본이 사평 작가한테 계약 조건 바꿔서 계약 유지하자고 말했다가 사평 작가 그 양반이 정글북에 바로 글 싸질러서 불났잖아?”
이 본이라 불리는 이상철 본부장은 판무 1, 2팀 그리고 로맨스팀을 총괄하는 출판본부 본부장.
대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업무 시간을 골프장에서 할애하는 사람이다.
“아, 그래요? 그런 글 못 본 거 같은데?”
“못 봤겠지. 이 본이 바로 계약 해지하겠다고 대신 글 내려달라고 빌었으니까. 여하튼 사평 작가만 해도 그 정돈데 코즈일이 그런 글 정글북에 쓴다고 해봐. 그건 불쏘시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불지옥이야, 재앙이라고.”
으적대던 고기를 와인으로 삼킨 김동현 팀장의 말에 조팟은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그건 또 사실이에요?”
“또 뭡니까, 조팟님아.”
김동현 팀장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지만 조팟놈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최진혁 팀장 퇴사한다고 하던데? 뭐 들으신 거 없어요?”
‘뭐? 최진혁이 퇴사한다고?’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말에 나 역시 깜짝 놀란 표정으로 김동현 팀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아, 그거?”
잠시 휴지로 입가를 닦은 김동현 팀장의 눈에서 이채가 띠었다.
“조팟은 어디서 들었데? 나도 오늘 들었어. 최 팀장 이달 말까지만 다니고 퇴사한다고 하더라고.”
“헐……. 진짜였네. 이달 말이면 다음 주 금요일이잖아요?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았는데 그렇게 빨리 퇴사해도 되는 거예요?”
조팟의 말에 김동현 팀장은 거대한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안 될 건 없겠지? 연차 남은 거 다 몰아서 쓰는 모양이더만. 조팟, 우리 대표님 성격 몰라? 어차피 나갈 사람이면 연차수당 받게 하지 말고 연차 다 쓰게 하고 나가게 하라 인 거?”
“그렇긴 한데……. 아니 근데, 그럼 1팀 팀장은 누가 되는 거죠?”
“으흐흠. 글쎄다?”
조팟놈의 말에 김동현 팀장은 한쪽 입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갔다.
“그런데 요즘 강 본부장님 대표실에 들락날락 거리던데 강 본부장님은 별일 없어요?”
“나도 모르지. 웹툰 관련 얘기 아니면 딱히 할 말도 없고 층도 다른데 나라고 뭐 아는 게 있겠어? 그 양반은 어차피 별일 없을 건데, 신경 꺼. 우리 강 본부장님께선 성골이신데 나 같은 육두품이 뭘 알겠어?”
“그렇긴 하죠.”
“뭐 인마?”
“장난이에요, 팀장님 정도면 진골 정도는 되겠죠.”
김동현 팀장과 조팟이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껄껄대는 모습에 절로 혀가 차 진다.
‘김동현 팀장……. 어쩐지 표정이 밝더라니…….’
김동현 팀장은 판무 1, 2팀 종합 팀장 그리고 조팟 놈은 자신이 판무 1팀의 팀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는 듯한 표정이다.
“자자, 안 좋은 얘기는 여기까지 합시다. 회사에 나쁜 소식만 있는 게 아니라 좋은 소식도 있으니까.”
‘……좋은 소식?’
BS북의 최근 회사 분위기상 좋은 일이 있을 수가 없는데, 김동현 팀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다. 피식 웃는 김동현 팀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우리 2팀 매니저님들 그동안 계약할 때 고생 많았지? 차주부터는 선인세 지금보다 편하게 줄 수 있을 거야.”
“엥? 진짜요?”
“대표님도 승인한 건가요?”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 건가요?”
갑작스러운 김동현 팀장의 말에 조팟과 이창윤 매니저 그리고 황건일 매니저가 연달아 물었다.
와인으로 목을 축인 김동현 팀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대표님도 승인했어. 앞으로 권 당 100만 원씩은 나랑 본부장님 결재 없이 완결 회차까지는 선인세 줘도 돼.”
“아니……. 그 짠돌이 양반이 어쩐 일이래?”
“씁! 어허이! 신입들 앞에서 그런 말 엠바고랬지?”
“다닌 지 한 달 넘었으면 신입 끝난 거죠, 뭐. 언제까지 신입이에요? 사건 연달아 터져서 회사 분위기 알 만큼 다 알겠구만.”
입을 샐쭉이며 와인을 마시는 조팟놈의 말에 김동현 팀장이 옅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여하튼 웹소설 출판사도 요즘 우후죽순으로 생기고 있고 지금 여론도 안 좋으니까 올댓스토리에서 받은 투자금 남은 걸로 선인세 좀 뿌리라고 하시더라고.”
확실히 사평 작가와 코즈일의 대탈주 사건 그리고 표절 이슈가 연달아 터져 BS북의 평판이 창립 이래 최악으로 떨어진 게 대표의 마음을 움직인 모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선인세 막 뿌리면 고생하는 거 알지? 선인세 못 까는 거 실적에 다 포함되는 거니까.”
“혹시 계약금도 가능한가요?”
“조팟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뭐……. 저도 당연히 그건 안 될 줄 알았어요. 확인만 한 거예요.”
신인 작가들은 계약금과 선인세를 헷갈려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계약금과 선인세는 큰 차이가 있다.
선인세는 말 그대로 추후 유료 연재될 글로 발생될 인세를 미리 받는 거기에 무이자 대출 같은 개념이다. 반면 계약금이란 계약 성사를 위해 출판사에서 작가에게 무상으로 주는 조공 같은 돈.
‘선인세와 달리 계약금은 주는 순간부터 바로 마이너스지. 그러니 출판사에서도 계약금은 쉽게 주려고 하지 않고.’
이유가 어찌 됐건 간에 회사 밖으로 나가는 모든 돈에 인색하던 대표가 선인세를 푼다니.
BS북 입장으로 보면 마냥 나쁘기만 한 변화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그때였다.
“그렇다고 계약할 때 몸 사리기만 하라는 건 아니야. 우리가 선인세 푼다고 해도 계약이 쉽게 되리란 보장이 없는 상황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 어디 돈 푸는 매니지라도 생겼어요?”
조팟놈의 말에 김동현 팀장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미라지 출판사 알지?”
“미라지요? 잘 알죠. 헐……. 설마?”
입이 떡 벌어진 조팟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김동현 팀장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미라지도 웹소판에 뛰어들었다고 해. 은태식 작가도 계약했댄다.”
“으, 은태식?!”
“와아…….”
미라지는 문학클럽, 글자출판과 함께 대여점 시절 절대 강자였던 출판사 중 하나다.
‘은태식이랑 계약을 했다고?’
그리고 은태식 작가는 한국 신무협의 살아있는 전설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