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이래도 정말 할 말이 없습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렀다.
수요일이 됐음에도 BS북은 여전히 초상집 같은 분위기다.
‘그럴 만도 하지 연쇄 폭발이 일어났으니까.’
지난 월요일이었던 이틀 전.
각 팀의 팀장, 본부장 그리고 대표까지 폭탄 제거반에 급히 투입되었지만, 당연히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들을 가장 경악으로 물들게 한 건 이날 마지막으로 터진 코즈일의 계약 해지. 즉, 나의 계약 해지 요청 때문이었다. BS북에 핵폭탄을 몰고 왔던 그때를 떠올리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맺힌다.
“……소설피아에서 IP 확인도 이미 끝마쳤다고 합니다.”
“미치겠네. 그 특약으로 이런 일이……. 아니, 어떤 또라이가 작가 쪽지를 몰래 삭제해?”
“……저도 이해가 안 갑니다. 솔직히 운영팀이나 등록팀은 늘 바쁘니 굳이 코즈일 작가님의 쪽지를 뒤져보면서 쪽지 검열하고 삭제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쪽지 삭제된 날짜……. 이거 정우 매니저 해외 휴가 갔을 때잖아? 그럼 경영팀 말고는 딱히 아는 사람이 없을 건데……. 혹시 코즈일 작가가 실수로 지인에게 아이디 알려 준 거 아니야?”
“그것도 조심스럽게 여쭤봤습니다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하더라고요. 작품 계약 시 소설피아 계정을 BS북에만 넘겼었는데 이제 와서 책임 회피하려는 거냐고…….”
“…….”
“제가 무슨 실수가 있어서 일 거라고 사정도 하고 다시는 그런 일 없게 하겠다고 빌어도 봤지만…….”
“그러니까 뭐래?”
“……소송으로 안 가고 계약 해지와 작품 이관 정도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알라고 하더라고요.”
“하아…….”
2015년인 아직까진 소설피아의 웹사이트가 개판인 상황이다. 마치 사이버전이라도 당한 듯 뻑하면 서버가 다운되고 골드 충전이 안 되거나 충전한 금액과 다른 금액이 결제되거나 혹은 정상적으로 골드가 충전됐다고 해도 에러로 인해 못 읽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덕분인지 코즈일 아이디로 로그인 한 IP가 해외가 아니라 국내인 건 확실하게 소설피아에서 확실하게 확인해 줬지.’
여하튼 강경진의 똥볼, 그리고 내가 담당하는 모든 작품 계약서에 넣어 둔 특약 사항으로 인해 강경진의 치졸한 행동이 자충수가 되어 버렸다.
‘깔끔하게 잘됐네. 사평 작가님 그리고 코즈일로 쓰는 내 작품은 다 빼올 수 있게 됐으니까.’
그리고 결국 전날인 5월 19일 화요일.
출판본부를 총괄하는 이상철 본부장이 단풍 삼촌과 수차례 통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사평 작가님과 코즈일의 계약을 해지하고 엘가로 작품을 이관하는 대신 엘가 이름으로 진행 중이던 형사 고소는 취하하기로 했다.
얼핏 보기엔 엘가가 한발 양보를 하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이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일 뿐.
저작권 침해를 입은 로켓소년단, 황금거위, 히전죽 작가에게 피해가 가는 선택은 아니다.
‘작가님들께는 추후 진행할 모든 계획을 이미 말씀드린 상황이니까.’
결국 사평 작가의 글과 내 글들은 어제 중으로 BS북과의 계약을 완전히 끊어낼 수 있게 됐고 각 플랫폼에도 이 사실을 전하는 업무가 계속됐기에 어제까진 정신없는 하루가 이어졌다.
‘코즈일 작품 모두 계약 해지한다고 해서 살짝 걱정되긴 했는데…… 나한테도 별일 없어서 다행이네.’
코즈일이란 필명으로 내가 BS북과 한 계약은 편집자 박정우의 방어막이었다. 하지만 이제 코즈일의 작품이 BS북을 떠나 엘가로 가게 되면서 이제는 방어막이 없어진 상황.
즉, 이제 BS북의 다른 매니저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언제 짤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된 거다.
하지만 꿈꾸는돌 작가나 피자헛둘 작가 등을 포함한 내 담당작들의 실적은 다른 매니저들보다 월등히 높았기에 김동현 팀장도 그리고 위에서도 아무 말이 없는 것 같다.
계획대로 내가 퇴사하기로 결심했을 때 떠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 순간 카톡이 울렸다.
—사기꾼새끼: 박정우 매니저님, 본부장실로 오시죠.
허, 이 새끼 봐라?
강경진 이 양아치 새끼가 감히 나를 오라 가라 한다. 그것도 무슨 이유인지 아무 설명도 없이.
강경진이 왜 나를 부르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회사에선 직급이 깡패이기에 아무 설명 없이 이렇게 카톡 하나만 틱 받아도 발에 불나도록 뛰어가야 하는 게 맞는 일이지.
‘그런데 어쩌냐? 그러고 싶진 않은데? 방패 하나 없이 레이드 뛸 순 없잖아?’
불합리한 상황에 직면한다면,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집에서는 부모님께 말하면 될 터.
그리고 이곳은 회사. 내겐 대체재가 있다.
“저……. 팀장님?”
“왜? 무슨 일이야?”
‘회사에서 불합리한 일이 생기면 상사에게 보고하면 되지.’
나는 친구에게 억지로 보험을 강매해야 하는 신입 보험팔이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경진 본부장님께서 본부장실로 오라고 하시는데……. 잠시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뭐? 왜 부르는데?”
여기까진 예상대로다.
강경진의 더러운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김동현 팀장의 짙은 눈썹이 사납게 꿈틀댔다.
BS북에 폭풍이 몰아치고 이틀의 시간이 흐르면서 김동현 팀장은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전부 강경진 팀장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새였으니까.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올라오라고 하셔서.”
“정확히 뭐라고 하는데?”
마치 톡 내용을 보여달라는 듯이 김동현 팀장의 시선이 내 폰을 향해 꽂힌다. 나는 폰을 슬쩍 내 품 안으로 숨겼다. 내키진 않지만 조만간 강경진을 저장한 이름을 수정해야겠다.
“아무런 내용은 없고 갑자기 위로 올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다녀와도 될까요?”
“아니, 기다려 봐.”
조금 역하긴 하지만,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 같은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빛내니 김동현 팀장이 그 자리에서 바로 폰을 들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김동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정우 매니저님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웹툰 본부장님이 저희 판무 2팀에 관여하실 일은 딱히 없는 걸로 아는데요?”
생각 이상으로 날 선 반응.
매우 흡족하다.
‘최진혁이 판무 1팀 팀장이 된 후로는 사이가 계속 안 좋았지.’
게다가 김동현 팀장은 강경진이 사평 작가의 계약서에 친 장난질이 나비 효과가 되어 코즈일과의 계약도 파기되게 만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상황이다.
사평 작가가 BS북과 계약을 해지한다고 한 바로 그날 뜬금없이 코즈일도 계약 해지를 해달라고 하니 김동현 팀장으로선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공교로운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업무적으로 할 얘기가 없는데 왜 저희 팀원을 따로 연락해서 오라 가라 하시는 겁니까? 매뉴얼대로 하시죠. 타 부서와 협력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팀장을 통해서 연락하는 게 절차 아닙니까?”
김동현 팀장은 씩씩대며 말을 이었다.
“대회의실 잡아둘 테니 할 말 있으시면 이쪽으로 오시죠. 저도 참석해서 듣겠습니다. 끊습니다.”
‘오……. 우리 팀장님. 아주 막 나가기로 하셨는데?’
강경진을 향해 생각 이상으로 적대적인 김동현 팀장의 태도에 속으로 감탄하는 그때, 전화를 끊은 김동현 팀장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우 매니저, 대회의실로 가자고. 나도 옆에 있을 테니까 괜히 주눅 들지 말고.”
“예, 팀장님……. 감사합니다.”
매우 역하지만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빛을 빛내며 김동현 팀장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김동현 팀장이 내 어깨를 툭 치며 피식 웃었고 우리는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같은 건물에 있는데도 다들 오랜만에 뵙는 것 같군요.”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여전히 선교사를 연상케 하는 선하고 순수한 인상. 강경진이 가증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대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어? 저 새끼는?’
그리고 강경진의 뒤를 따라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 들어왔다.
“아, 이쪽은 저희 BS툰 웹툰 1팀 김민지 팀장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김민지입니다.”
옅은 조소를 띄며 안으로 들어온 문신충.
그건 파브르였다.
‘파브르 새끼가 여긴 왜……?’
이전에 옥상에서 마주친 적도 있었고 이미 이지연을 통해 파브르가 BS툰에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경진과 함께 대회의실로 찾아온 뜻밖의 상황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는데,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는지 강경진과 파브르가 나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먹잇감을 잡았다는 듯이.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BS툰 직원 소개해주려고 이 자리를 만드신 건 아닐 텐데요?”
“하하, 그런 건 아닙니다. 단지 정우 매니저님께 확인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민지 팀장님도 함께 모신 겁니다.”
싸늘한 김동현 팀장의 반응에도 강경진은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다. 양아치 둘이 자리에 앉았고 나를 향한 강경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음……. 사실 좀 민감한 내용일 수도 있어서 정우 매니저님과 먼저 따로 이야기를 나누려 했는데, 괜찮겠습니까 정우 매니저님? 김 팀장님이 함께 계셔도?”
‘이 새끼 봐라? 분명 파브르에게 뭔가 들은 것 같긴 한데……. 아주 기고만장하네?’
물론 파브르에게 무슨 얘기를 들었을지도 대충 파악이 된다. 즉, 나는 조금도 꿀릴 게 없는 상황이지.
“물론입니다. 제가 하는 업무 관련된 내용 중에 저희 팀장님께 숨겨야 할 부분은 조금도 없으니까요.”
“다행이군요. 사실 이걸 업무 관련이라 말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요.”
강경진의 조소 담긴 눈빛이 나를 훑었지만, 나는 그 사기꾼 새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바로 본론을 꺼내 주시죠. 갑작스럽게 코즈일 작가 계약 해지가 되면서 우리 정우 매니저 업무가 상당히 밀린 상황이거든요. 저도 바쁘고.”
“알겠습니다. 피차일반이니 바로 말씀드리죠.”
살벌함이 깃든 김동현 팀장의 말에 강경진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정우 매니저님. 지금 이 자리에 모신 김민지 팀장님과 서로 아시는 사이라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기왕이면 정우 매니저님께 진위 여부를 직접 듣고 싶군요.”
“아니……. 지금 뭐 하시자는 겁니까? 고작 서로 아는 사이인지 물어보려고—”
“김 팀장님, 중요한 문제입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하기 어려우시겠지만, 잠시만 시간을 내주시죠.”
단호함이 깃든 강경진의 말에 김동현 팀장은 영문 모르겠다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재미있네. 그럼 어디 나도 간 좀 볼까?’
강경진이 파브르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나도 내 패를 보일 필요는 없지.
“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저는 김민지 팀장님과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아, 그래요?”
강경진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보였지만, 나는 조금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유지했다.
“예, 처음 뵙습니다. 무슨 일 때문에 그걸 여쭤보시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아는 선에서 모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우 매니저님이 그렇게 말하신다면……. 제가 좀 더 설명을 돕는 게 낫겠군요.”
강경진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듯 떨리는 입술로 말을 이었다.
“김민지 팀장님과 정우 매니저님 그리고 LGA컴퍼니의 이지연 대표님. 세 분이 모두 아는 사이라고 하는데, 이래도 정말 할 말이 없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