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76화 (76/201)

#76화 ― 이건…… 또 뭐야?!

넓고 탁 트인 3층 본부장실.

인접한 책상에 앉아 말없이 서로를 마주한 두 사내의 태도 때문인지,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본부장실 안의 분위긴 냉랭했다.

“최 팀장님. 정말 할 말이 없습니까?”

“…….”

오늘만 벌써 두 번씩이나 본부장실에 불려온 판무 1팀 팀장 최진혁은 평소와 달리 과묵했다. 하지만 거듭된 강경진 본부장의 물음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최진혁 팀장의 굳게 닫혔던 입이 열렸다.

“본부장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정우 매니저님에 대해 보고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김민지 팀장님이 보셨다는 것처럼 다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물론 최진혁이 부인한다고 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강경진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보낸 유학 생활 그리고 세계적인 대기업인 골드만 삭스에서에서 유색 인종으로 살아남기 위해 터득했던 그의 눈치는 그 누구보다 민감했기 때문이다.

‘……대체 뭘 숨기는 거지? 이해가 안 돼. 박정우를 돕는다고 해서 이득이 되는 것도 없을 텐데?’

자신의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최진혁 팀장은 분명히 수상쩍었다. 하지만 강경진은 전과 달리 자신의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는 최진혁 팀장의 달라진 행동을 더는 두고 보지 않기로 했다.

“곤란하군요.”

강경진은 당근 대신 채찍을 꺼내 들기로 했다.

매를 드는 게 사실 그의 본성에 더 어울리기도 했으니까.

“……?”

한 톤 낮아진 강경진의 싸늘한 음성에 최진혁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댔다.

“최 팀장도 알다시피 나는 능력이 되는 사람에게 기회 주는 걸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맨스 팀으로 좌천된 최 팀장을 다시 판무 1팀으로 복귀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었죠. 그것도 파트장이 아닌 팀장 자리로.”

서늘함이 가득 담긴 말에 최진혁 팀장이 마른침을 삼켰지만 강경진 본부장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 내게 필요한 능력, 아니, 최 팀장에게 원하는 능력은 내게 도움이 되어야 하는 능력이죠. 그런데…… 최 팀장이 지금 내게 그런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

최진혁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강경진 본부장이 자신의 이전 상사였던 한우석 팀장처럼 욕설을 내뱉거나 손찌검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가 낮게 읊조리는 말은 명백한 협박이 분명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로맨스 팀으로 다시 보낼 수 있다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 오해 말아 줬으면 합니다. 최 팀장이 지금껏 잘해줬으니까.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잘해주면 된다는 말입니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얘길 들어 볼까요?”

바르르 떠는 최진혁의 모습을 보며 강경진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딱딱한 고기의 힘줄을 끊고 연하게 만드는 듯한 말에 최진혁 팀장의 파리해진 입술이 천천히 떼졌다.

“저, 저는……. 박정우 매니저님 같은 분이 참 편집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다진 고기의 입에서 뱉어진 예상 밖의 말에 강경진의 억양에 힘이 들어갔다. 최진혁 팀장 또한 본부장의 억센 음성이 또렷이 들렸다.

하지만 최진혁 팀장은 질끈 깨물었던 입술을 떼고 결연한 표정으로 강경진 본부장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조금 전보다 더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김민지 팀장님이 본 건 사실이 아닙니다. 누차 말씀드렸다시피 옥상에서 박정우 매니저님과는 아무런 마찰도 없었습니다.”

최진혁 팀장의 입에서 다시 나온 말은 사랑과평화 작가가 BS북에 오기 전에 그에게 들었던 말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 최진혁 팀장의 말에 강경진 본부장의 짙은 가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최 팀장……. 내가 어려운 걸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있었던 사실 그대로만 말하면 된다는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최 팀장의 능력을 내게 의심받을 정도로?”

비록 작은 빌딩 안의 사무실 안일 뿐이다.

하지만 강경진 본부장은 이 건물의 3층에서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 강경진 본인도 그리고 다른 이들 중에서도 이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재미있네? 이렇게까지 숨긴다고?’

관리 사무실에도 이미 확인을 부탁했지만 이 낡은 건물의 옥상 CCTV는 고장으로 작동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기에 사실 확인은 오로지 최진혁 팀장의 입을 통해서만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입을 열지 않으려 한다면 숨기는 게 더 많다는 것의 방증이라는 생각에 강경진 본부장은 이제 더 집요하게 캐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최진혁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이 구제해 주신 덕분에 다시 제가 판무팀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정우 매니저와 나눈 이야기를 들려달라 했더니, 엉뚱한 얘기를 하는군요? 지금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는 겁니까?”

서슬 퍼런 강경진의 말에 최진혁 팀장은 잠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떼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드려야 할 말이라고 생각 들었습니다. 지금껏 군말 않고 본부장님께서 시키신 일을 다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하는 모든 일들은 분명히 잘못됐습니다.”

최진혁 팀장의 말에 강경진 본부장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엉뚱한 말을 하는 게 재미있기는 한데, 아무리 그래도 말은 똑바로 해야죠. 우리가 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모든 일은 최진혁 팀장님이 한 건데?”

“…….”

언제부턴가 최진혁 역시 이런 상황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상자 속에 가둬 뒀던 그 불안감이 사실이 되자 최진혁은 더욱 각오를 다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박정우 매니저님은……. 편집자로서 부끄럽고 해선 안 되는 걸 그리고 진짜 편집자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셨을 뿐입니다. 정말 다툼이나 그런 건 전혀 없었습니다.”

“하.”

이어진 최진혁 팀장의 말에 강경진 본부장은 더는 참지 못하고 조소를 뿜었다.

“진짜 편집자라……. 그러면 최 팀장은 가짜 편집자란 말입니까?”

“저는…….”

다시 한번 입술을 질끈 깨문 최진혁이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강경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떨리는 입술로 말을 이었다.

“제가 한 행동이 부끄럽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편집자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재미있네. 박정우 매니저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 했을 뿐인데……. 사람을 홀리는 재주가 있었네?”

강경진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지금 이 상황이 유쾌하다는 듯이 검지를 책상에 툭 툭 치기 시작했다.

“그래서……. 최 팀장 생각엔 내가 회사를 위해 힘써 보자고 부탁하는 일들을 더는 하지 못하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내가 정확히 들은 게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그건…… BS북을 위한 일도, 작가님들을 위한 일도, 작가님이 고생해서 만든 작품을 담당하는 저희 편집자를 위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시킨 더러운 일들을 여태 잘해오다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듯이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들으면 들을수록 강경진은 어이가 없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툭— 툭!

계속해서 책상을 치던 강경진 본부장의 검지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고는 강경진은 싸늘하게 변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도 내가 시킨다면.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시 로맨스팀으로 가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

강경진 그는 사람의 장점 그리고 약점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는 사람. 그렇기에 최진혁 팀장이 비록 지금은 자신을 대신해 칼춤을 추고 있지만 그의 본모습이 얼마나 유약한 사람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겁먹은 토끼처럼 바들대는 최진혁 팀장의 모습을 보며 강경진이 속으로 비릿한 웃음을 짓는 그때.

“그래야 한다면……. 퇴사하겠습니다.”

“……?”

전혀 예상 밖의 말이 최진혁의 입 밖으로 나왔다. 순간 금이 가던 강경진의 가면 반절이 부서졌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회사의 발전을 위해, 실적을 내기 위해 부탁한 일이 그렇게 어렵다는 건가?”

“아,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쉽습니다.”

“……?”

“그리고 이젠……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일들이 점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는 게 문제입니다.”

최진혁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고는 입에 박힌 가시를 빼어냈다는 듯이 개운함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사직서는 금일 중으로 제출하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최 팀장! 지금 무슨……? 지금 어딜 가는 거야? 최 팀장!”

가면이 반 이상 벗겨진 강경진이 언성을 높이며 최진혁을 불렀다. 하지만 고개를 깊게 숙이고 본부장실을 빠져나간 최진혁 팀장은 두 번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 이 새끼들 봐라? 재미있네.”

어차피 강경진에게 최진혁은 적당히 쓰다 언제든지 쉽게 버릴 수 있는 장기말 중 하나.

단지 꼭두각시 인형처럼 자신의 입맛대로 움직이지 않는 행동이 어이가 없을 뿐 이제 다른 장기말을 찾으면 될 뿐이었다.

작은 의심으로만 여겼던 김민지 팀장의 말이 이제는 의심을 넘어 확신으로 느껴지는 그때.

강경진 본부장의 날카로운 눈에 새로 도착한 메일이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 * *

강경진이 최진혁 팀장을 불러 이야기하고 있던 그때, BS북은 직원들의 수군거림으로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사랑과평화 작가가 불씨를 싸지르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꺼져가는 줄 알았던 불씨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쳤네 진짜. 이게 무슨 일이래요?”

“와……. 표절을?”

“……형사 고소?”

“무슨 일이에요 이게?”

드르륵— 드르륵—

BS북 매니저들은 마우스 휠을 굴리며 회사 대표 메일로 도착한 메일을 떡 벌어진 입으로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이 도착한 그 메일은 표절 관련해 고소장을 접수했다는 내용이었으니까. 바로 내 자랑스러운 회사, 엘가에서 온 메일이었다.

“황금거위……. 히전죽? 아니 무슨 듣도 보도 못한 하꼬 작가 글을 파쿠리했대?”

“지난번에 최 팀장님 담당작이랑 겹친다고 댓글창 테러당한 그 작품도 메일 내용에 있네요. 자리에 안 계신데 빨리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이 도착한 메일을 보며 조팟과 이창윤 매니저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김동현 팀장이 우리 2팀뿐만이 아니라 1팀까지도 들릴법한 소리로 말했다.

“냅둬.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워야지. 근데 이런 큰일이 생겼는데 당사자는 어디 갔나 몰라? 아, 저기 오시네.”

김동현 팀장이 걱정을 빙자한 조소를 뿜어내는 그때 이번 고소 사건의 당사자인 최진혁 팀장이 혼이 다 빠진 모습으로 터덜터덜 2층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최진혁 팀장이 자리에도 앉기 전에 그의 전화가 울렸지만 그는 잠시 전화를 받지 않고 지긋이 폰 화면을 바라보더니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작가면 저렇게 전화를 끊지도 않았을 텐데, 설마……. 강경진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물론 단지 궁금했을 뿐, 뭐가 되었든 내 사정은 아니다. 이제는 내 일부터 마무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나는 BS북 매니저로서 사용하는 업무용 폰을 책상 위에 보란 듯이 올려놨다.

“아우, 물을 많이 마셨나. 화장실을 자주 가네.”

내가 생각해도 몹쓸 연기긴 했지만, 확실히 해둬야 했다. 민망함을 뒤로한 채 나는 화장실로 가 전화를 걸었다.

정말 가끔 쓰는 코즈일용 폰으로.

아마 지금쯤 내 책상 위에선 업무용 폰이 요란스럽게 진동하고 있겠지.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네, 안녕하세요.”

코즈일용 폰은 음소거 모드로 바꾼 후 화장실에서 손에 물만 슬쩍 묻힌 후 자연스럽게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는데, 계단으로 급히 내려오는 강경진을 마주쳤다.

강경진 이 쓰레기 놈은 평소와 다름없는 인자한 미소였지만, 빠르게 지문을 찍고 BS북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니 아마 놈도 메일을 확인한 모양.

‘새에끼, 아주 똥줄이 바짝 타나 보네?’

다급한 발걸음으로 판무 1팀 자리를 향해 가는 강경진이 최진혁 팀장에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 일을 마무리하는 게 먼저지. 요리는 끝났고 이제 조미료만 치면 끝나는 상황이니까.

드드드드득— 드드득— 드드드드득—

“정우 매니저! 전화가 계속 울리는데? 코즈일 작가야. 얼른 받아 봐.”

“아, 죄송합니다. 바로 받겠습니다.”

내가 자리에 도착하기도 전에 김동현 팀장이 손짓으로 책상에서 달그락대는 내 폰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소 10초 이상은 시끄러운 진동을 울렸을 테니 신경이 쓰일 만하겠지.’

나는 김동현 팀장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곤 내 자리에서 덜그럭대는 전화를 냉큼 주워 들었다.

“네, 작가님. 그동안 잘 지내셨을까요?”

그리고 조금 전까지 평온하기만 하던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다. 전화를 받자마자 바로 끊고 통화를 받는 척만 했기에 지금부터는 단지 원맨쇼를 할 뿐이다.

그렇다고 내 발연기가 걱정되진 않았다.

이 쇼는 길어질 필요가 없는 쇼였으니까.

‘단 한마디만 하면 끝나는 쇼지.’

나는 폰을 쥔 손에 힘을 주곤 풍 맞은 사람처럼 덜덜 떨며 당혹감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예에? 아니, 야! 그게 무슨 소리야! 계약 해지를 하고 싶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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