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 기름은 아직 붓지도 않았다고.
“네? 진아 매니저한테요? 이거 완전 미친…… 아니, 미치신 건가? 대체 왜 그랬데요?”
“사실 일 얘기도 아니어서 내가 그동안 말은 안 했는데, 진아 매니저 처음 입사했을 때부터 예쁘다, 자기 스타일이다 하면서 나한테 갠톡을 주구장창 보내더라고. 그리고 정우 매니저가 흑심 품는 거 아니냐며 엄청 경계하고 그랬어요, 크크.”
“네? 제가요?”
대꾸할 가치도 없는 조팟의 어이없는 자격지심에 쓴 웃음이 지어진다.
나는 글을 도둑질당한 작가들을 돕기 위해 지방까지 올라가 작가들을 통조림 시키고 있었는데. 내가 지옥의 합숙 훈련을 하는 동안 조팟놈은 신입 사원인 진아 매니저에게 찝쩍이던 거였다.
“그런데 오우~. 진아 매니저 진짜 개 쎔. 아니 솔직히 우리는 다 일 하느라 바쁘고 하니까 조팟이 찝쩍대는지도 전혀 몰랐는데, 지난 금요일이었나? 진아 매니저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거예요.”
“자리에서 일어났다고요?”
“어어! 그러더니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그 얼굴 있잖아, 아무 감정 없는 그 로봇 같은 표정. 그 얼굴로 조팟한테…….”
내 우려와 달리 강경진과는 조금도 연관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으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었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파트장님, 업무 외적인 연락은 하지 말아달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어어……? 내, 내가 무슨 사적 연락을?”
“같이 술도, 영화도, 뮤지컬도, 볼 생각 없고 이성으로 조금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파트장님이 어떤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저를 위해서 다 맞출 수 있다고 알려달라고 지금 카톡으로 보내신 말까지 합쳐서 세 번이나 말하셨는데,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 아니. 그걸 왜 회사에서…….”
“회사에서 업무를 해야 하는데 사적인 연락을 업무 시간에도, 업무 외적인 시간에도 보내시니 지금 답해 드리죠. 우선 외적인 부분부터 말씀드리면 여드름 가득한 피부, 누런 치아와 백태가 가득 낀 혀, 좁은 어깨, 근육 하나 없는 비쩍 마른 몸, 특히 총천연색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앞뒤로 박혀있는 티셔츠만 입는 파트장님의 패션 취향은 제가 특히 싫어하는 스타일입니다. 거기다 콜센터 직원보다 높은 하이톤 목소리, 평소 부정적인 말을 항상 내뱉고 투덜거리는 태도 또한 당연히 비호감이죠. 아직 더 있는데 계속할까요?”
“그, 그만…….”
웃으면 안 될 일이지만, 감정 이입 가득한 이창윤 매니저의 1인 2역 연기에 터져 나오는 웃음을 막을 수가 없었다.
“정말 대박 사건이 터지긴 했네요.”
“그렇다니까? 조팟이 그래서 다른 회사 이직하겠다고 나한테 갠톡으로 아우, 난리도 아니었어요.”
“어? 그러면 오늘 오전 반차도 다른 회사 면접 보고 온 거래요?”
“아니, 그건 아니고. 쪽팔려서 회사 못 나오겠다고 하더라고. 요즘 TO 뜬 곳도 없잖아요?”
웹소설 편집자 TO가 난 곳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야 모르지. 나는 고용이 안정적이거든.
회사 대표라.
“그런데 이상하네요.”
“뭐가요?”
“면접도 아닌데 그럼 옷은 왜 마술사 같은 걸 입고 왔데요?”
“푸흐흫, 그거 진아 매니저가 피부, 어깨부터 외모 싹 다 깠잖아. 그런데 그런 건 당장 바꿀 수 없으니까 패션 센스부터 바꿔보려 했나 보죠. 나한테 어떤 옷을 입는 게 좋냐고 물어보길래 깔끔하게 셔츠 입고 다니면 무난하게 평타는 칠 거라고 했더니만, 무슨 카지노 딜러처럼 입고 나왔어.”
조팟놈도 간혹 도움이 되긴 한다.
조팟놈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최진혁 팀장에게 성을 내느라 어지러웠던 머리의 열이 조금은 식는 기분이 든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오른쪽 주머니에 넣은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이창윤 매니저가 아직도 웃겨 죽겠다는 듯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일을 다시 낄낄대며 설명했고, 나는 탁자 아래로 폰을 슬쩍 빼 카톡을 확인했다.
—단풍 삼촌: 불씨 지폈다.
‘드디어 왔군.’
기다리고 있었던 연락이 왔다.
이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창윤 매니저님 이제 슬슬 들어가죠? 자리 너무 오래 비운 것 같아서요.”
“아하하, 이야기하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잘 마셨어요. 다음엔 내가 살게요.”
“알겠어요.”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조팟놈의 얘기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이제 들릴 이야기가 훨씬 더 재미있을걸?
“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글쎄요? 저도 잘…….”
BS북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던 이창윤 매니저가 발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내게 소곤거렸다.
‘벌써 시작하셨네.’
맹렬한 타자 소리와 매니저들의 통화 소리만 조곤조곤 울려 퍼지는 평소와 달리 BS북엔 쩌렁쩌렁한 고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BS북이랑 몇 질을 같이 했는데! 그런데 지금 나한테 이딴 사기를 쳐? 대표 어디 있어? 당장 대표 나오라고 해!”
“자, 작가님. 진정하세요. 대표님은 지금 외근 중이시라…….”
소란의 중심지는 판무 1팀 자리였다.
그곳엔 중년 사내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고 1팀 매니저들은 난생처음 겪는 일에 어쩔 줄을 몰라하며 쩌렁쩌렁한 고성을 내지르는 사내를 진정시키느라 여념이 없었다.
‘본부장들이랑 골프 치러 갔으면서 외근은 무슨? 그보다 사평 작가님. 고등학교 때 연극 동아리라고 하시더만, 성량이 장난 아니시네.’
사기를 쳐놓고도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냐며 난동을 부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사랑과평화 작가였다.
대표와 본부장들이 없는 걸 익히 알고 있기에 사평 작가는 각본대로 대표가 어디 있냐고 계속해서 난동을 이어나갔다. 혼신의 연기를 다 하는 사평 작가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후원금이라도 쏴주고 싶다.
도중 나와 잠시 눈이 마주쳤지만 사평 작가는 프로였다. 금세 1팀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는 계속해서 명연기를 이어나갔다.
“네, 대표님. 김동현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1팀이 담당하는 사랑과평과 작가님께서 회사에 찾아오셔서 대표님을 찾으시는데요? 예, 변호사분하고 같이 찾아오셨습니다. 네네, 변호사요. 그게……. 계약 사기를 주장하시는데……. 지금 1팀 팀장이랑 강경진 본부장 모두 자리를 비워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예, 급한 대로 제가 처리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우리 2팀의 곰 같은 여우.
김동현 팀장은 사평 작가의 난동을 말릴 생각은 않고 바로 오성민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실시간 상황을 고자질, 아니 보고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한치도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BS북 매니저들은 늘 대표와 본부장들이 하는 일도 없이 무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종이책 대여점 시절부터 이 바닥을 구르고 살아남은 생존자들.
변호사까지 대동한 사평 작가가 아무리 난동을 부린다고 해도 대표와 본부장들이 가세한다면, 내공이 가득 담긴 그들의 말발로 변수가 생길 수도 있을 터였다.
“사랑과평화 작가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로?”
급한 발걸음으로 벌컥 문을 열고 강경진과 최진혁이 들어왔다.
“아, 저는 BS툰 본부장인 강경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판무 1팀 최진—”
인사와 동시에 강경진이 공손히 명함을 건넸지만, 그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사평 작가는 냉큼 가로챈 명함을 구겨 바닥에 내팽개쳤다.
“장난하나 지금! 내가 명함이나 받자고 일도 빼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그래, 강경진 본부장. 당신이구만? 전자 계약서로 계약하느라 얼굴은 이제 처음 보네 사기꾼의 얼굴을.”
“작가님, 말씀이 좀…….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오해는 니미? 한우석 팀장이 담당할 때만 해도 계약서에 이딴 사기가 없었어! 그런데 갑자기 작품 계약이 아니라 작가 계약? 그것도 오 년 전속? 나한테 말도 없이 이런 장난질을 쳐놨는데 이게 사기가 아니면 뭐야? 사기가 아니면 뭐냐고!”
사평 작가는 지금 연재 중인 글의 완결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 완결고까지 모두 준비된 상황이기에 사평 작가는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묵혀 뒀던 자신의 분노를 이제야 마음껏 표출할 수 있었다.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내뱉는 사평 작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 말이 더는 연기가 아닌 그의 진심이 담긴 명백한 분노로 보였다.
“내가 아무리 성적이 좋지 않은 작가라고 해도 그렇지. 성적이 낮으면 이렇게 함부로 사기를 치고 그래도 되는 거야? 성적 나쁜 작가는 염전 노예처럼 족쇄 채우고 상의도 없이 멋대로 계약서를 당신들 입맛대로 바꿔도 되는 거냐고!”
“작가님, 진정하시고 바로 위층에 제 사무실이 있는데 거기 가서 이야기하시죠. 오해로 인한 작가님의 고충은 이해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계속 말씀하시면 다른 직원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매니저님들이 담당하는 다른 작가님들의 연재에도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고요.”
뱀 같은 혀를 날름대는 강경진의 간교한 말에 사평 작가는 잠시 주춤했다. 하지만 그 주춤거림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걸 금세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 자기 직원들 몇 분 동안 겪는 피해는 견디지 못하겠으면서 나한텐 5년짜리 족쇄를 채워 놓고 피해에? 그래, 위층까지 올라갈 것도 없고 저기 회의실 있네. 저기 가서 이야기합시다.”
“작가님, 회의실은 지금 예약이—”
“법무법인 김이박 변호사 구본석입니다. 작가님께서 많이 흥분하신 것 같은데 웬만하면 안쪽 회의실에서 대화 나누시죠.”
“……알겠습니다. 최진혁 팀장, 같이 들어가죠.”
“예, 본부장님.”
지금 이 시간엔 대회의실이 예약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강경진이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서 이야기하려 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서구식 오픈 마인드 경영을 추구하시는 BS북 오성민 대표께선 회의는 모두 숨김없이 떳떳이 하면 된다는 신조였다. 그렇기에 대회의실을 블라인드 하나 없는 통유리로 만들어 뒀기 때문이다.
대회의실 문이 굳게 닫혔지만 사평 작가의 우렁찬 성량이 가끔 새어 나왔다. 거기다 사평 작가는 본토 랩퍼 수준으로 팔을 허공에 휘저으며 자신이 출력해 온 전자 계약서 사본을 허공에 흔들어 대니, 매니저들 모두 대회의실 쪽을 힐끔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아……. 조팟놈아. 그러고 싶냐?’
이 와중에도 개 버릇 남 못 준다는 말처럼 조팟놈은 마술사 같은 옷을 입은 채로 수차례나 미팅이 이어지는 내내 대회의실 근처 정수기에서 물을 뜨며 위해 기웃거렸다.
통유리 너머로 비친 모습을 보니 사평 작가는 수차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으며 강경진을 향한 삿대질을 계속했다.
‘그럴 만도 하지. 사평 작가님이 당한 계약서 사기는 저것뿐만이 아니니까.’
그런 상태로 거진 1시간가량 미팅이 진행됐을 무렵.
“내가 그동안 BS북하고만 몇 년을 같이 계약했는데 나를 이딴 식으로 취급해? 같이 해서 드러웠고 두 번 다시 보지 맙시다!”
벌컥 열린 대회의실 문 안에서 구본석 변호사와 여전히 씩씩대는 사평 작가 그리고 강경진과 최진혁이 차례로 나왔다.
“오늘 말한 대로 처리 안 되기만 해 봐, 내가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서라도 무조건 소송까지 끌고 갈 테니까! 정글북에도 다 올릴 거야 이거!”
사평 작가는 회사 밖으로 나가는 그 순간까지 열정적인 고함을 지르며 아름다운 퇴장을 했다.
그렇게 사평 작가와 구본석 변호사가 밖으로 나가고 회사 안은 고요한 정적에 휩싸였다.
“작가님과 소통에 오해가 있어서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네요. 업무 하시느라 바쁘신 와중에 이런 소란이 생기게 되어 죄송합니다. 작가님과는 모쪼록 잘 마무리됐으니 다들 걱정 말고 일 보시죠. 진혁 팀장님은 잠깐 제 방으로.”
“네.”
강경진과 최진혁 팀장마저 밖으로 나가자 사무실 안은 싸늘한 냉기만 맴돌았다. 그 사이에서 오직 내 마음만 붉게 타오를 뿐이다.
‘마무리가 잘 되었어? 그런 말은 하지 말지 그랬어. 이제 시작인데.’
단풍 삼촌이 말했듯 이건 고작 불씨를 지폈을 뿐이다. 기름은 아직 붓지도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