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 역시 놈이 원흉이었다.
“박정우? 판무 2팀 박정우 매니저?”
“네, 그 박정우 맞습니다.”
강경진과 독대 중인 김민지는, 박정우를 언급하는 말에 본부장이 반응을 보이자 광대를 씰룩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그건 김민지의 착각이었다.
“김민지 씨. 분명히 인수인계 다 끝나면 근신하고 있으라고 했을 텐데? 지금 나랑 말장난이나 하자는 겁니까? 내가 왜 BS툰과는 상관도 없는 매니저 일을 듣고 싶다고 생각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강경진의 목소리 톤은 조금도 높아지지 않았지만 살벌함이 물씬 묻어났다. 강경진의 눈앞에 서 있는 양아치 같은 사내는 웹툰계에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트레이싱을 해서 작품을 날려 먹은 머저리 같은 놈.
올댓스토리에서 30억을 받고 빠르게 웹툰 법인을 차리느라 되는대로 인력을 뽑은 거였는데, 강경진이 보기에 김민지는 규격 외의 머저리. 아무 짝에 쓸모없는 쓰레기였다.
김민지는 BS툰이 웹툰계에 자리를 잡기도 전에 잿더미를 뿌린 놈이었기에 강경진은 팔에 덕지덕지 곤충을 박아 놓은 그 머저리를 볼 때마다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두서없이 박정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는 꼴을 보자니, 강경진은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자르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보, 본부장님! 이거 중요한 얘기입니다!”
“김민지 씨, 이달 말에 해고 처리될 건데 지금 상황에 뭐가 중요하다는 겁니까? 쓸데없는 일로 노닥거릴 시간 없으니까 당장 나가세요.”
분명 자신의 말을 들었음에도 김민지가 요지부동이자 강경진은 결국 언성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당장 안 나가!”
“판무 1팀 최진혁 팀장이 박정우 매니저와 옥상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뭐라고?”
본부장실을 나가지 않고 속사포처럼 쏘아낸 김민지의 말에 강경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김민지는 그 미묘한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제가 좀 전에 회사 옥상에 올라갔는데, 그때…….”
파브르는 고자질하는 애새끼처럼 자신이 목격한 상황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
‘시발. 녹화라도, 아니 사진이라도 찍었어야 했는데, 쯧. 존나 당황해서 그러지도 못했네.’
지금으로부터 열흘 전.
자신이 주도한 트레이싱이 발각된 김민지는 이번 주 금요일까지만 회사를 다니고 해고 처리가 될 예정이다.
일을 워낙 개판으로 해놨었기에 인수인계를 할 것도 뭣도 없었다. 하지만 인수인계를 끝낸 후엔 회사에 출근도 말고 근신이나 해야 하는 처지.
그렇기에 김민지는 회사에 나와도 하루에도 수차례 화장실에 처박혀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옥상으로 가 담배를 빨며 시간을 때우는 게 일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느 때처럼 김민지는 입에 담배를 꼬나물고 씨발씨발 거리며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활짝 열린 옥상 문을 통해 보니 옥상 구석 난간 쪽에서 남자 둘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게 답니까? 둘이서 싸웠…… 아니 싸운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하, 예. 거리가 좀 있어서 들리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 LGA컴퍼니와 연관된 일이 분명합니다!”
할 일도 없는 반백수 김민지에겐 옥상에서 일어나는 사내 둘의 다툼이 간만의 요깃거리였다. 그 사내들이 누구인지 알기 전까지는.
‘벤쓰 그 시벌련이 우리 회사 매니저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네.’
처음 다툼이 있을 때 김민지는 괜히 그 둘 사이에 껴서 한따까리 하고 싶은 양아치 본능이 들끓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한 명은 강경진 본부장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판무 1팀의 최진혁 팀장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작년인 2014년 3월.
김민지가 웹툰 학원 강사 알바를 잠시 하던 시절, 그에게 개쪽을 안긴 벤츠를 몰던 이지연의 남자친구가 분명했다.
“박정우 매니저야 당연히 LGA컴퍼니랑 연관이 있겠죠. 담당 작품이 거기서 연재가 되는데. 하아……. 고작 그딴 말을 하려고—”
“그, 그게 다가 아닙니다 본부장님!”
강경진이 옅은 한숨을 내쉬자 김민지는 필사적으로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박정우 매니저와 엘가 대표 이지연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이입니다!”
“개인적인 친분?”
“예에, 서로 사귀는 사이거든요.”
“……뭐? 연인이란 소립니까?”
강경진이 격한 반응을 보이자 김민지는 신나서 작년 3월에 자신이 겪었던 그 치욕스러운 순간을 살짝 양념도 쳐가며 강경진에게 설명했다.
‘크크큭, 좆되봐라 썅년놈들아.’
이지연이 LGA컴퍼니의 대표인 걸 김민지가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LGA컴퍼니에서 BS북 전체 메일로 보냈던 웹툰 제안 메일을 강경진이 BS툰 웹툰 부서 매니저들에게 참고하라며 포워드를 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강경진이 포워드 해준 그 메일에 있던 LGA컴퍼니의 포트폴리오는 김민지 자신이 그림을 봐줬었던, 그리고 BS툰에 입사하기 위한 포트폴리오에 슬쩍 껴 넣었던 이지연의 그림체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단지 배만 아팠을 뿐이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정보였다. 하지만 LGA컴퍼니의 대표 이지연이 BS툰 판무 매니저들 중 가장 실적이 좋다고 알려진 박정우 매니저와 서로 사귀는 사이라면?
김민지가 자신의 야비한 머리를 대충 굴려봐도 좋은 그림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좆될 수밖에 없는 그림이.
김민지는 계속해서 자신이 BS툰에 입사한 지 얼마 안 지났을 무렵인 작년 12월 초, 옥상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던 박정우를 마주쳤던 것부터 자신이 아는 이지연과 박정우에 관한 모든 사실을 쏟아냈다.
“으음…….”
한참이 계속된 김민지의 설명을 듣던 강경진이 검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데? 박정우 매니저의 얼굴은 알았지만 원래 이름은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름이 박정우인 건 어떻게 안 겁니까? 최 팀장이랑 대화하는 말도 안 들렸다면서?”
“아, 그건 제가 박정우 매니저랑 최 팀장님이 다툴 때 옥상 계단에 잠시 숨어 있었거든요. 박정우 매니저, 아니 이 산업 스파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을 때 냉큼 최 팀장님한테 가서 물어봤죠. 저 사람 누구냐고, 어떻게 된 거냐고.”
이어진 김민지의 말에 강경진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게 답니까?”
“예……예? 그게 다라니, 그게 무슨……?”
“최 팀장이 박정우 매니저와 무슨 일로 다퉜는지는 말을 안 했냔 말입니다.”
냉기만 가득 감도는 강경진의 말에 김민지는 눈을 빛냈다.
“아, 그게요! 안 그래도 좀 이상하더라니까요? 최 팀장님한테 무슨 일로 싸웠냐고 물어도 박정우 매니저랑 싸운 적 없다는 말만 하고 그냥 가시더라고요? 그때 느꼈습니다. 박정우 매니저, 이 산업 스파이가 중상모략과 권모술수를 여기저기 펼치고 있구나 하는 그런 감을 말이죠. 아니, 아무리 실적이 좋다고 해도 일개 사원이 팀장님과 그렇게 말싸움을 하고 막 밀치고, 멱살 잡고 이러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잖습니까?”
“…….”
“제가 그걸 두 눈으로 또옥똑히 다 봤는데도 최 팀장님이 오히려 아무 일도 아니라고 감싸는 걸 보니까 박정우 매니저, 엘가 이지연 그리고 어쩌면 최진혁 팀장님까지 이 셋 사이에 뭔가 긴밀한 커넥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김민지의 말에 강경진의 머리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박정우와 최진혁이 무슨 접점이 있는지 조금도 예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알겠어요. 그럼 가 보세요.”
“아, 예……. 근데 저, 본부장님?”
“할 말이 더 남았습니까?”
강경진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며 김민지는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박정우 매니저가 정말 산업 스파이라면 제가 제보자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렇다면 BS툰뿐만이 아니라 BS북에도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일 텐데…… 그럼 제 해고 처리는…….”
“고생 많았어요. 그건 확인 후에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죠. 일단 가서 일 보세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본부장님!”
강경진이 평소의 부드러운 어투로 생각해보겠다는 말을 하자 김민지는 허리까지 접는 폴더 인사로 자신의 감사를 연거푸 표하고 본부장실을 빠져나갔다.
“주제도 모르는 새끼가, 쯧.”
물론 강경진은 김민지 같은 양아치놈을 두 번 다시 BS툰에 발 들이게 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김민지의 말이 흥미로운 건 사실이었다.
“흐음……. 재밌네. 저 급 떨어지는 양아치 놈의 말이 사실일 리는 희박하지만, 만에 하나 그게 다 사실이라면…….”
생각을 정리하던 강경진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최진혁 팀장. 지금 내 방으로 와 주세요.”
강경진은 자신의 심복, 아니 하수인부터 심문하기로 했다.
* * *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자 오전 반차를 썼던 조팟이 회사 안으로 조용히 기어 들어왔다.
‘아니…….’
최대한 은밀하게 들어온 건 맞지만 조팟놈은 내 시선을 제대로 강탈했다. 조팟이 특별히 유별난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가득 들어간 티셔츠만 입던 조팟놈이 평소와 달리 양복을 입고 있자 놀라울 정도로 사람이 달라 보인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정장 바지에 셔츠만 입었어도 되었을 걸, 이 더운 날씨에 하필 영화 속 바텐더나 입을 법한 베스트를 입고 온 꼴이 마술사 같은 기운을 가득 자아냈다.
“크흡, 자자. 다 왔으니 주간 회의 바로 시작하자고.”
김동현 팀장의 말에 판무 2팀 매니저들은 모두 대회의실로 이동했다. 그런데 오늘 출근했을 때부터 느꼈던 거지만 팀 분위기가 묘하게 이상하다. 그리고 조팟놈이 온 후로는 더 묘해진 것 같기도 하고.
옷소매 안쪽에서 당장이라도 하얀 비둘기가 펄럭대며 뛰쳐나올 것만 같은 조팟놈의 꼬라지에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는다.
‘……김동현 팀장이 가만히 있을 양반이 아닌데?’
대회의실로 들어오기 전만 해도 조팟의 마술사룩을 본 김 팀장은 놀리긴커녕 웃음을 자제하느라 애쓰는 표정이었다. 회의실에 들어와서도 아무런 언급조차 없었고.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에 감지된 이 묘하고 이상한 기류는 김동현 팀장에게서만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니었다.
주간 회의가 진행되는 내내 팀 분위기는 평소보다 더 정적이었고, 기분 탓인진 모르지만 왠지 다들 조팟놈을 신경 쓰는 듯한 분위기다.
‘월요일인 걸 감안해도 분위기가 너무 처지는데?’
—창윤 매니저님
—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분위기가 엄청 다운 된 것 같은데
—이창윤 매니저님: 아…….
—이창윤 매니저님: 있었지 아주 대박 사건이
—대박 사건이요?
—이창윤 매니저님: 지금 말하기는 좀 그렇고
—이창윤 매니저님: 회의 끝나고 카페 ㄱㄱ
대체 무슨 일이길래 창윤 매니저가 저런 반응을 보내는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자자, 금주 주간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한 주도 모두 고생합시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평소보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주간 회의가 마무리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 나는 김동현 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작가님한테 연락이 와서 잠시 나가서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다녀와.”
김동현 팀장에게 묵례를 하고 나는 회사 근처 카페에 도착해 전화를 걸었다.
“저 카페 도착했어요. 뭐 드실래요? 아아? 아니면 다른 거?”
—안녕하세요 작가님. 오랜만이네요, 하하. 아무래도 거기서는 좀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느낌이 나는 소재가 좋지 않을까요?
“달달한 거 뭐요? 아이스 초코?”
—아뇨, 그 소재는 좀 진부할 것 같은데요.
“스무디도 있어요. 딸기? 바나나?”
—으음……. 마지막 소재가 좋을 것 같은데요?
“바나나 스무디? 큰 걸로 시킵니다?”
—네, 그게 좋겠네요. 아, 작가님 자암시만요. 저 팀장님…….
이창윤 매니저는 나처럼 실적이 높은 게 아니었기에 대놓고 밖으로 나와 통화를 하는 것도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었다.
통화를 끊고 몇 분 뒤.
한적한 카페 안으로 이창윤 매니저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오 벌써 나왔네? 얼마에요?”
이창윤 매니저가 탁자에 놓인 바나나 스무디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며 물었다.
“에이 됐어요. 제가 살게요.”
“무슨 소리야? 정우 매니저 월급 얼마 된다고. 돈 보낼게요.”
“창윤 매니저님이나 저나 쥐꼬리만 한 월급 얼마 차이 안 나거든요? 저 없는 동안 무슨 일 있었는지나 알려 줘요.”
“아니…… 왜 뼈를 때리고 그래. 잘 마실게요.”
이창윤 매니저가 바나나 스무디를 한 모금 쭉 빨아들이며 피식 웃었다.
“하긴, 근데 이 이야기는 솔직히 커피값 정도는 되는 이야기긴 하지.”
“대체 무슨 일이었길래 그래요?”
“조팟이 대형 사고 하나 쳤어요.”
“대형 사고요?”
오늘 내 시선을 강탈하던 조팟.
역시 놈이 원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