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 마주치고 싶었던, 하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작가님?”
영문을 모르겠는 말에 내가 되묻자 히전죽 작가는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티팬티내꺼 작가 그리고 BS북에 소 제기 진행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아직 너무 늦은 게 아니라면요.”
“아! 물론이죠 작가님! 잘 생각하셨습니다. 변호사 선임비부터 소송에 진행되는 모든 비용은 저희 회사, 아니 엘가에서 부담할 거니 걱정 마시고요.”
“하하하, 작가님은 정말 엘가를 자기 회사처럼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주인 의식 가득한 모습 정말 보기 좋습니다.”
일부러 속이려는 건 아니지만, 주인 의식이 있을 수밖에. 애초부터 엘가는 내 회사니까.
‘그리고 작가님들은 제 회사 소속 작가고요.’
괜스레 마음 한켠이 뜨금했지만, 나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궁금증이 더해진다.
조금도 소송에 휘말리기 싫어하던 그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꾼 건지.
“그런데 작가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마음을 바꾸셨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오해는 마시죠. 물론 저는 작가님께서 정말 용기 있고 제대로 된 선택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계기가 궁금해서요.”
내 질문에 슬쩍 미소 지은 히전죽 작가는 턱짓으로 테라스 밖을 가리켰다. 황금거위 작가는 배가 부르다면서도 남은 음식을 계속해서 흡입 중이었고 흑싸리 삼촌은 선우에게 복싱을 알려주고 있었다.
“크흐흐, 좋아! 위빙 끝나고 바로 원투! 양훅! 어퍼!”
퍼버버벅! 퍽!
흑싸리 삼촌은 보육원에서 미트를 챙겨 왔었는데 그걸로 매일 미트를 쳐주면서 지난 일주일간 선우를 단련시켰다.
‘선우를 가리키는 것 같긴 한데…….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내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 무렵 히전죽 작가가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아내의 외도 후, 선우와 단둘이서 살게 되었을 때, 처음엔 정말 끔찍했습니다.”
“그래도 선우와 같이 살 수 있으니…….”
“하하, 선우와 같이 사는 게 끔찍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제 자신이 끔찍한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네? 작가님이요?”
놀라 되묻는 말에 히전죽 작가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를 떠올리는지 왠지 처량해 보이는 눈이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서요. 선우가 뭘 좋아하는지. 친구는 몇 명이나 있는지.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군지. 심지어 선우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 지도 저는 아는 게 전혀 없더군요. 굳이 변명을 하자면 평일엔 삼시세끼를 다 나가서 때웠으니까요.”
“아…….”
“그 썅년, 아니 전 아내가 외도하는 걸 선우는 알고 있었는지 주말만 되면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요.”
“…….”
“여하튼, 선우와 함께 살게 된 후로 저는 중요한 것부터 잡아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늘 선우에게 공부보다 더 중요한 건 인성이다. 네가 좋은 사람이 돼야 한다. 그러면 주위에 나쁜 사람을 거를 수 있을 거다라고 말했죠. 그리고 우리 선우는 싫은 소리 한번 안 하고 제 말대로 따라줬구요.”
“멋진 아버지시네요.”
인성을 먼저 기르라는 선우 아버지, 히전죽 작가의 말이 진심으로 와닿았다. 하지만 진심을 담은 내 말에 히전죽 작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제 이기심이었고 단지 이상적인 생각이었을 뿐이었죠. 제가 이혼을 하고 얼마 안 지나서 선우 담임 선생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어찌 된 건지 선우 엄마가 불륜을 피우다 걸린 게 학교에 쫙 퍼져서 몇몇 애들이 불륜녀의 아들이니, 더러운 피니 뭐니 하면서 선우를 괴롭혔다고요.”
“아, 아니…… 뭐 그런 놈들이 다?”
상상 이상으로 악랄한 아이들의 행동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반면 히전죽 작가는 오래된 상처를 바라보듯 덤덤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뿐이 아니었죠. 몇몇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괴롭혀서 선우는 학교에서 따돌림마저 당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전화를 끊고 선우에게 왜 아빠한테 말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선우는 오히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제게 말하더군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든 내가 좋은 사람이 되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했습니다.”
“…….”
말을 이어가던 히전죽 작가는 잠시 감정이 복받치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저는 바보 같은 놈입니다. 아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 데도 잘했다고 했죠. 그땐 그게 답인 줄 알았으니까요. 하지만 이젠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히전죽 작가의 눈이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스스로 좋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변함없다고 생각합니다. 뼈가 부러지면 전보다 더욱 단단해진다는 말처럼요. 하지만 반복된 상처에는 결국 상처가 곪아 버릴 수밖에 없죠. 회복될 틈을 안 주니까요.”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죠.”
내 대답에 히전죽 작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작가님의 삼촌분이 우리 선우를 매일 운동시키면서 그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좋은 마음가짐을 갖는 건 무척 어렵다. 하지만 건강한 신체엔 건강한 정신이 그리고 좋은 마음가짐이 깃들기 쉽다고요.”
흑싸리 삼촌.
아버지한테 뒤지게 맞아 갱생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양아치 중의 쌩 양아치로 유명한 사람이었는데, 멋진 말은 혼자 다 한다.
“그래서 마음을 바꾸게 된 겁니다. 우리 아들도 이렇게 어려움을 극복하려 애쓰는데, 아비로서 소송 한 번 더 하는 게 뭐가 무섭다고 눈치를 봐야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잘 생각하셨어요. 작가님이 잘못하신 것도 없는데요.”
“그러니 잘 부탁드립니다. 단지 글뿐만이 아니라 많은 걸 배웠습니다. 다 작가님 덕분입니다.”
중년 사내가 진심과 존중을 담아 허리를 꾸벅 접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면서도 폴더 인사를 해주시다니…….’
그에게 용기를 북돋울 수 있는 수만 가지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하지만 나 역시 허리를 접어 고개를 꾸벅 접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하겠습니다 작가님. 작가님 같은 분들이 출판계에 가득하실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길면서도 짧았던 작가들과의 합숙 훈련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 * *
“안녕하십니까 작가님! BS북 판무 레이블 파이톤의 황건일 매니저입니다. 아하핫! 어우, 아닙니다. 연락받아주셔서 제가 더 감사하죠. 제가 연락드린 이유는…….”
“안녕하세요, 쪽지 보냈던 오진아 매니저입니다. 네, 정산비는 쪽지로 말씀드렸던 내용과 동일합니다. 아뇨, 지금 성적으로는 정산료나 선인세 조율을 불가능합니다.”
작가들과의 합숙 훈련이 끝난 그 다음 날.
간만에 회사에 출근하니 정신이 사납다. 지난 금요일 소설피아 공모전 참가 일정이 끝났기에 주말인 토, 일요일부터 공모전에 참여하지 않은 괜찮은 작품들이 슬금슬금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판무 2팀의 신입 매니저 황건일과 오진아는 열심히 신작 연재를 시작한 작가들을 데려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직접 보니까 알겠네. 오진아 매니저가 왜 계약을 못 했는지.’
지난 한 주 동안 황건일 매니저는 총 2명의 작가를 계약했다. 반면 오진아 매니저는 단 한 명의 작가도 계약을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 신입들이 작가들과 통화하는 내용을 들으니 뭐가 이유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전반적인 능력은 오진아 매니저가 훨씬 앞서지만……. 작가 계약은 별개의 영역이지.’
오진아 매니저는 천재라는 말이 부족하지 않다.
나 역시 사진기 같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지만 내 기억력은 오직 내 관심사인 글 부분에 한정된다. 반면 오진아 매니저는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것을 또렷이 기억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지난 한 달간 온보딩을 진행하며 그들의 업무 진행을 관찰했을 때, 황건일 매니저와 달리 오진아 매니저는 교정 교육에서 단 하나의 오탈자도 빼먹지 않는 두각을 나타냈었다.
‘윤문은 솔직히 말해 엘가 판무팀으로 뺏어 오고 싶은 실력이지. 그런데 황건일 매니저는……. 저런 능력이 있는 줄은 몰랐네?’
황건일 매니저에겐 오진아 매니저 같은 사진기 같은 기억력도 없고 국문학과 출신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교정교열 교육에서도 허점이 종종 보였다.
심지어 교정 교육을 진행할 때 스스로를 못 믿겠다며 매번 맞춤법 검사기를 돌려가며 교정을 하던 사람이라 불안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작가를 응대하는 태도에서만큼은 발군의 성적을 보이고 있다.
서글서글하면서도 나긋나긋한 화법.
타고난 친화력으로 황건일 매니저는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장벽을 순식간에 허물었다.
그런 황건일 매니저와 상반되는 오진아 매니저에게는 따로 조언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 그때.
“정우 매니저, 푹 쉰 거 맞아? 어째 안색이 더 피곤해 보여?
나는 타인과의 스킨십을 싫어한다.
회식 자리에서 이미 몇 번 말했을 텐데.
내 자리로 다가온 김동현 팀장은 그걸 잊었는지 두툼한 손으로 내 어깨를 마사지하며 안색을 살폈다.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회복이 좀 더딘 모양이에요.”
의자를 자연스럽게 회전시켜 내 어깨를 마사지하는 김동현 팀장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뿌리쳤다.
“하실 말씀이라도?”
“아, 별건 아니고. 우리 정우 매니저 오랜만에 보니 좋아서 그러지.”
“…….”
김동현 팀장의 한껏 치솟은 입꼬리와 달리 정적인 그의 눈은 철저히 나를 분석하고 있다.
내가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을 쓰는 걸 타인이 본다면 대략 저런 느낌이 아닐까 싶다.
‘왜 이러는지 알겠구만?’
지난주 월요일 오후부터 내내 자리를 비웠으니 정말 내가 아팠던 건지, 그게 아니면 내가 다른 회사 면접을 보러 다녔는지를 의심하는 눈초리가 분명하다.
“팀장님, 저 남의 회사 안 갑니다. 걱정 마시죠.”
“아핫핫핫핫! 그러취이! 정우 매니저는 우리 가족인데 남의 회사 갈 사람이 아니지, 암.”
맞는 말이다.
나는 내 회사가 따로 있으니까.
멀쩡한 내 회사를 두고 굳이 다른 회사에 갈 필요가 없지.
“그런데 오늘 주간 회의 안 하나요? 회의 시간 다 돼가는데?”
“아아, 조팟 오전 반차 썼거든. 오늘 주간 회의는 오후에 하자고.”
‘조팟이…… 오전 반차?’
매번 오전 반차는 머저리들이나 쓰는 거라며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이 바로 조팟놈이다.
반차를 쓸 거면 오후 반차를 써야 빨리 퇴근하지 게으른 놈들이나 오전 반차를 쓰는 거라며 욕하던 놈이었는데. 친구도 없고 약속도 없는 놈이 난데없이 오전 반차를 쓴다니 의아하다. 뭐,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알겠습니…… 어, 작가님한테 전화가 온 것 같네요. 잠시 통화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어서 다녀와.”
마스크를 챙겨 쓰고 옥상으로 바로 올라갔다.
전화를 받기 전에 한 바퀴를 쓱 돌았지만 옥상엔 아무도 없었다.
“어, 흑싸리 삼촌, 이 시간에 웬일이야?”
—크으흐흐, 그 피도 안 마른 씨벌것들 잘 처리하라고 말해 둬쓰. 오늘 하굣길에 바로 정신 교육 들어간다고 하니까, 끝나고 영상 보내 줄게.
역시 흑싸리 삼촌.
보육원의 삼촌들은 다들 각자의 사연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 구광적 원장에게 참교육을 당해 수하, 아니 가족이 되기 전까지 흑싸리 삼촌은 속초의 왕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물론 그건 본인 피셜이지만.
“영상은 됐어. 근데 그 애들이 진짜 선우 따돌리고 괴롭힌 거는 확실한 거야? 자료 조사 제대로 한 거 맞지?”
—크흐흐. 나야, 나. 속초 대왕 문어. 어제 생활하던 동생들 시켜서 다 알아봤다. 어린 노무 쉐키들이 아주 악랄하더만? 가끔 괴롭힌 것도 아니고 집요하게 괴롭혔어. 더러운 피로 태어난 놈이 뭔 돈이 필요하냐고 돈도 뺐고, 신발도 뺐고, 쯧. 여하튼 동생들한테 최대한 좋게좋게 잘 타일러서 갱생시키라고 했다. 선우 졸업할 때까지. 3년이면 그 핏덩이 양아치 놈들도 갱생이 되겠지.
“갱생이 안 되면?”
—그으흐흐. 될 거야.
“…….”
—안 되면 그것도 나름 재밌겠고.
“…….”
—여튼, 동생들이 속초에 지들 같이 막장 인생 사는 양아치 꿈나무가 더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아주 번듯하게 사람 만들어 놓겠다고 호언장담했으니까 걱정할 것 없슈.
“어……. 고생했어, 삼촌.”
불안감이 가득 깃든 스산한 웃음이 전화 너머로 들려왔지만, 자세히 묻진 않았다. 흑싸리 삼촌이 어련히 알아서 잘 처리했을 테니까.
‘때론 법만으로 뭐든 게 해결되지 않을 때도 많지. 이걸 이이제이, 아니, 이독제독이라 해야 하나?’
히전죽 작가의 아들 선우가 물리치료를 받은 거라면 선우를 괴롭힌 싹수 노란 양아치 놈들은 도수치료를 받게 될 거다. 물론 그 정도는 놈들이 얼마나 빠르게 갱생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이게 다 아름다운 출판계를 만들기 위함이니 너무 억울해하지 말라고 핏덩이들아. 그러게 평소 마음을 아름답게 가꿨어야지. 내가 직접 팰 수는 없잖아?’
어제저녁 작가들과의 합숙 숙소를 떠나기 전.
흑싸리 삼촌에게 넌지시 건넨 말이 알아서 잘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마음이 한결 더 가벼워진 기분이다. 역시 지역 일은 지역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 그게 더불어 사는 이웃이니까.
끼익—
이제 가벼운 마음으로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하던 그때.
“어?”
“…….”
마주치고 싶었던, 하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그 얼굴이 옥상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