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69화 (69/201)

#69화 - 7년 앞당겨보시죠.

“더 재미있게 만들면 되는 거죠. 파이톤 매니저가 직접 시켰는지 해골병 작가가 직접 소재를 훔친 건지 알 방법은 없어요.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원작자인 작가님이 보기에도 도둑놈의 글이 더 재미있다는 거죠.”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군요.”

“그렇게 처지실 것까진 없어요.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 생각했으니 이번 합숙을 제안한 거고요.”

내가 황금거위 작가에게 바라는 건 도둑글과의 큰 차별화가 아니다.

“우선 초반부 캐릭터 설정부터 집고 가자면 격투 천재 백길현을 격투 천재 백사범으로 수정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목을 바꾸라는 말입니까?”

“작가님께서 캐릭터 설정을 수정하는 게 괜찮다고 생각하시면요. 아까 차에서 하셨던 말씀이 태릉선수촌에서 퇴출된 주인공이 동네 태권도장으로 가게 된 게 MMA로 진입하기 위한 장치라고 하셨죠?”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했던 대화 내용을 꺼내자 황금 작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태릉에서 쫓겨난 백길현이 자신이 어릴 때 다니던 동네 태권도장에 머리나 식힐 겸 들르게 됐는데, 바로 옆에 새로 생긴 MMA 도장이 있어서 MMA에 발을 들이게 되는 전개였죠.”

“저는 그 부분을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풍성하게라면?”

“단지 주인공이 머리를 식힐 겸 들렸다가 우연히 옆에 생긴 MMA 도장에 발을 들인다기보다는 태릉에서 퇴출되고 앞길이 막막해진 주인공이 동네 태권도 사범으로 취직한다는 식으로요.”

“……아!”

황금 작가는 이제야 내 말의 의도를 파악한 눈치다.

“그리고 요즘 태권도장 고객 대부분은 아이들이죠. 도장이라고 보기보단 학원의 느낌이 더 강하니까요.”

“그렇긴 하죠. 어느 동네 태권도장은 영어 태권도학원 이란 이름으로 운영한다고 하더라고요. 피아노 학원하고 연계해서 통원 버스를 같이 운행하기도 하고요.”

“그렇죠. 그러면 조금 더 그 상황에 파고 들어가 보죠. 원생 대부분이 어린이인 학원 바로 옆에 종합격투기 도장이 생겼어요. 그러면 어린 나잇대의 개구쟁이 아이들이 한 번쯤은 꼭 물을 말이 뭘까요?”

“음…… 태권도랑 격투기랑 누가 더 세요?”

빙고. 좋은 접근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 특히 무도를 배우는 아이들은 궁금증도 많고 호승심도 상당하죠. 마치 호랑이와 사자 누가 더 세요? 태권도랑 격투기랑 누가 더 세요? 같은 질문처럼요.”

“이해가 가네요. 저도 그 나잇대엔 그런 이야길 친구들과 종종 하긴 했으니까요.”

“주인공 백길현이 MMA로 전형하는 과정이 지금처럼 완전히 ‘우연’적인 요소에 기인하는 것보단 추락한 태권도 천재가 먹고살기 위해 동네 태권도 사범으로 일을 시작하고, 실제 그 상황 속에 있을 주인공 주변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방향성과 목적성을 보여주는 전개로 진행한다면 어떨까 해서요. 그래서 프롤로그 부분은…….”

황금거위 작가와의 미팅이 끝나고 드디어 오늘의 주요 인물인 히전죽 작가의 차례가 됐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꼼꼼하게 살펴봐주시느라 그러셨겠죠. 황금 작가님도 피드백을 제대로 받으셨는지 타자 소리가 우렁차네요, 하하.”

내가 히전죽 작가의 상담을 뒤로 배치한 건 이야기가 길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작가님께서 준비 중이신 ‘귀농했는데 엘프 아이가 생겼다’는 티팬티내꺼 작가의 ‘엘프 아빠의 힐링 라이프’와 유사한 점이 상당히 많죠. 물론 작가님께서 해당 소재의 원작자라는 부분은 변함없는 사실이지만요.”

“솔직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이제 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살짝 쥔 히전죽 작가의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황금 작가님과 달리 히전죽 작가님께선 바로 소송을 진행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파이톤에 투고 원고를 보낸 명백한 증거도 있고 그 모든 걸 떠나서 캐릭터, 연출 심지어 대화 패턴까지도 과하게 비슷해서요.”

“하아……. 대체 5질이나 한 작가가 대체 왜 저 같은 신인 작가의 소재를 훔친 건지.”

“…….”

“그래도 소송은 원하지 않습니다. 아직 제 소송도 끝나지 않은 상황이어서요.”

“…….”

소송에 한번 시달려 본 사람들은 웬만해선 소송을 하려 들지 않는다. 특히 히전죽 작가처럼 재산 분할, 위자료, 양육권을 두고 소송을 진행 중이라면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일 테니까.

‘30대 후반에 머리가 거의 없는 걸 보면…….’

흩날려라 천본앵처럼 시시각각 가늘게 흩날리는 빈약한 숱만 보더라도 결코 유전적인 결함으로 생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솔직히 히전죽 작가는 황금거위 작가보다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 스포츠 물을 쓰는 황금 작가의 경우 캐빨에 살을 붙이고 전개 방식에 변주를 주면서 이야기를 더 풍성하고 재미있게 끌고 나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히전죽 작가의 준비작인 ‘엘프의 아빠가 되었다’의 경우, 그가 구상한 모든 게 이미 완성형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대 배경 일상물이라 세계관 자체를 더 손대기도 애매해.’

물론 주인공이 지금과 다른 목적성을 띤다면 상관없겠지만, 히전죽 작가가 구성한 잔잔한 힐링물로 진행한다면 지금 보다 더 좋은 구성은 없다고 본다. 문제는 그 구성 그대로 빌어먹을 표절 작가 놈이 더 나은 필력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이니까.

나나 다른 편집자가 삽으로 땅을 갈아엎는 수준으로 윤문을 한다면 비등해질 수 있을 테다. 하지만 과한 윤문은 작가의 색채를 잃게 하기에 결코 좋은 방법이라고 볼 수 없다.

거기다 이미 비슷한, 아니 거의 동일한 서사로 진행되는 글이라면 먼저 연재가 시작된 작품이 더 힘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작가님의 글에 주변 캐릭터를 더 추가하시거나 세계관을 조금 더 틀어서 변주를 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작가님의 기획 의도와 많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티팬티내꺼 작가놈이 연재를 시작한 글의 경우 작가 필명이 빌런이란 말 외에는 모든 댓글이 호평 그 자체다.

비록 연재하게 될 플랫폼은 다르지만, 동일한 소재와 전개로 히전죽 작가가 이대로 연재를 하게 된다면, 사정을 모르는 독자들은 원작자인 히전죽 작가의 글이 도리어 아류작이란 말을 하게 될 게 분명하고.

‘그때 가서는 좋든 싫든 법적으로 갈 수밖에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히전죽 작가가 테일랜드에 연재하는 건 득보다 실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좋든 싫든 이제는 말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나는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가까스로 열었다.

“상당히 조심스러운 말입니다만. 귀농 엘프는 뒤로 미루고 새로운 작품으로 진행하시는 건 어떨까요?”

“……아예 다른 작품으로 진행하라는 말입니까?”

“대부분의 독자들은 각 플랫폼별 심사 기간이 따로 있고, 런칭을 언제부터 준비했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재미있는 글을 소비하길 원할 뿐이죠.”

“…….”

내 말이 이해가 가는지 히전죽 작가의 고개가 푹 숙여지며 그의 휑한 정수리가 들어왔다.

“물론 작가님께서 원하신다면 지금 소재 그대로 진행하되, 윤문과 연출을 저도 최대한 힘써서 도와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만…….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소나기부터 피하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큽니다.”

잠시 내리고 그치는 소나기가 아니라 끝이 없는 장마일 확률이 더 높으니까. 내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문 히전죽 작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솔직히……. 담당 매니저님 연락을 받고 표절 글을 봤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

“제가 마흔이 다 돼가는 늦은 나이에 왜 웹소설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는지 아십니까?”

말없이 조용히 그를 응시하자 히전죽 작가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비교적 남들보다 일찍 결혼을 하고 저는 미친 듯이 일에 몰두했습니다. 아내의 말처럼 그게 가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죠. 몸은 고됐지만 남의 돈 버는 일이 쉽지 않은 건 어느 직장이나 같은 거잖습니까? 비록 몸이 힘들어도 집에 가면 토끼 같은 아내와 아이가 있었으니까요.”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 히전죽 작가는 목이 타는지 물을 몇 모금 넘겼다.

“나름 최선을 다한 삶이라 생각했죠. 그런데 출장 일정이 더 빨리 끝난 어느 날 집에 가보니 처음 보는 구두가…….”

“…….”

“그 미친년, 아니 전 부인은 우리 선우가 집에 있는데도 안방에서 기타 선생이란 작자와 그 짓을 하고 있더군요. 하하하, 스피커로 기타 강습을 받는 것처럼 소리를 크게 틀어놓고 동물처럼 엉켜 끅끅대는 모습을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는 게 무슨 기분인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이혼 사유에 내 영혼마저 더럽혀진 기분이다. 반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뱉는 히전죽 작가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고생은요. 그때부터가 고생의 시작이었죠. 기타 선생이라던 그 쓰레기 놈은 알고 보니 유명 로펌 변호사더군요. 거기다 그 년놈들은 올해 간통죄가 폐지되었다고 자주 출장을 다녀 가정을 소홀히 한 제 탓으로 가정이 파탄 난 거라는 헛소리를……”

“…….”

“소송장을 받은 것도 제가 먼저였습니다. 불륜이 발각된 그다음 날이었죠.”

“…….”

간통죄가 폐지된 건 2015년인 올해 2월.

간통죄 폐지로 불륜의 죄가 더 적어진 건 아니었지만, 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소송을 받았으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제가 잘 다니던 회사도 때려치고 웹소설 작가가 된 건 제가 글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직업만큼 사랑하는 아이 옆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물론 드래곤에서 선인세도 넉넉히 주신 것도 컸지만요.”

자신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뱉은 히전죽 작가는 개운하다는 듯이 짧은 숨을 내뱉었다.

“이야기가 길었군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저는 표절을 당한 분노보다 웹소설 작가로 자리를 잡는 게 더 먼저란 겁니다. 표절 따위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큰일을 겪고…… 아니 겪는 중이니까요.”

“…….”

“저는 작가로 자리를 잡아서 우리 선우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빠로 사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니까요. 그러니 노원지귀 작가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다른 소재로 진행하시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신다면……. 말씀하신 방향으로 맞추겠습니다.”

히전죽 작가의 말에서 그가 하는 말이 허투루 내뱉는 말이 아닌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작가님께서 드래곤 강사로 계시지만 글도 쓰시느라 공사가 다망하신데, 이렇게 발 벗고 나서 주셔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뿐이죠.”

작가가 진심을 내 봤으니 이제 나도 그에 응답할 차례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에게 가장 걸맞는 소재를 알고 있다.

“작가님, 안 그래도 제가 작가님께 추천드리고 싶은 소재가 있었습니다.”

“오? 벌써요? 하하, 어떤 건지 궁금하군요.”

“이혼물을 쓰시는 건 어떨까요?”

2021년 말 그리고 2022년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이혼물. 나는 미래를 앞당길 생각이다.

‘이혼물의 붐, 7년 앞당겨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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