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글 쓰기의 신을 만들어주마!
“큰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평소와 달리 심각함이 가득 담긴 단풍 삼촌의 목소리에 긴장이 가득 된다. 전화 통화로는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이 쓸 수가 없으니까.
—그아하하하하하하! 됐어! 됐다고 이 쌍간나야!
“됐다고? 좀 알아듣게 말해 봐!”
—브루나이 플랫폼 지원 사업 2차 심사 발표도 우리가 통과했다 이 말이디!
“!!!?”
뇌리를 파고드는 찌르르르한 감동의 향연에 몸이 절로 부르르 떨렸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뒤섞여 뇌 속에서 탭댄스를 추는 기분!
“뭐? 지, 진짜로? 그럼 이제 다음은 또 뭐야? 이제 3차 남은 거였나?”
—대가리에 핵처맞을 소리 하고 있니? 3차가 어디 있네? 2차가 끝이다 사장놈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그, 그럼, 배, 백오십억 우리 꺼야?”
—그으흐흐. 보너스나 두둑하게 준비해 두고 있으라! 왜 말이 없나? 여보세요?
황금 접시에만 밥을 먹고, 순금으로 장식된 개인용 제트기를 직접 운전하며 숨만 쉬어도 석유 판매로 인해 초당 12만 원씩 버는 술탄이 통치하는 황금의 땅 브루나이!
“조금도 기대 안 해서인지 너무 기쁘잖아!”
—이 자식……. 너 속마음을 그대로 내뱉은 거 아니냐?
“아하핫! 고마워 삼촌! 이걸 다 성공하고. 역시 단풍 삼촌이야!”
단풍 삼촌은 어떻게 플랫폼 사업을 새까맣게 잊고 있을 수 있냐고 잠시 투덜댔다. 하지만 인센 소리에 바로 살벌한, 아니 해맑은 웃음을 내뱉었다.
“정우야 무슨 좋은 일 있었어? 웃음소리가 장난 아니던데?”
통화를 마치고 작가 사무실로 돌아오니 도준이 형이 내게 물었다.
“내 목소리가 좀 컷나 보네. 회사에 좋은 일이 있어서.”
“좋은 일?”
“해외 플랫폼 진출을 하게 돼가지고 말이야.”
“해, 해외 플랫폼?!”
작가일 때는 나도 몰랐다.
출판사 대표들이 왜 그렇게 회사 자랑을 하고 다니는지.
해외 플랫폼이라는 말에 입이 떡 벌어져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도준이 형을 보니 자랑할 맛이 넘치도록 난다.
“저, 정우야! 아니 정우 대표님 정말 잘하겠습니다! 진짜 좋은 작품 쓸게!”
“에이 형. 드래곤과 계약해줘서 내가 고맙지.”
나는 진심으로 도준이 형이 고마웠다.
형이 잊었는지 모르겠지만 형은 어차피 엘가와 전속 계약이다.
‘어디 못 간다는 말이지.’
엘가보다 더 좋은 계약 조건인 곳이 생긴다면 당연히 언제든 보내주겠지만, 그럴 일은 쉽게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딸칵— 딸칵딸칵— 딸칵—
“좋아, 이제 설치 끝났다!”
그리고 잠시 후.
영어 천재 도준이 형의 도움으로 작가 사무실 PC 전체에 스크리브너 설치가 완료됐다.
“고생했어 형. 오……. 인터페이스는 한글이랑 좀 많이 다르네?”
회귀 전에도 종종 작가들이 스크리브너를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었다. 도준이 형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때도 스크리브너란 프로그램 이야기를 간혹 듣긴 했었고.
하지만 스크리브너의 화면을 직접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다.
“그치? 스크리브너를 만든 사람이 원래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초등학교 교사였데.”
“초등학교 교사?”
“하하하, 의외지? 키스 블라운트라는 영국 사람인데, 한국에선 작가들이 보통 글 쓸 때 아레아 한글 쓰듯이 해외에선 MS 워드를 쓴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워드로 글 쓸 때마다 아이디어 정리하기가 특히 많이 힘들어서 자기가 직접 프로그래밍 배워서 만들었데.”
“글 쓰는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이라……. 어때? 한글보다 많이 편한가?”
스크리브너가 손에 익으면 사용하기가 쉽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내가 직접 사용해보진 않았기에 솔직히 설명만 들어서는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당연하지! 장점이 얼마나 많은데!”
도준이 형은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양 주먹을 꽉 쥐고 언성을 높였다. 새로운 소재를 말하거나 할 때 흥분하면 언성을 높이던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도준이 형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생각해 봐. 한글이나 워드와 달리 스크리브너에선 한 프로젝트 안에 원고를 회차별로 따로 구분할 수가 있고 전 회차 내용에서 검색도 가능하게 되어 있거든. 정우 너도 글 쓸 때 그런 일 종종 있지 않아?”
“어…… 그렇지?”
“주연이 아니라 비중 적은 조연 캐릭터를 스쳐 지나가듯 쓴 적이 있는데 그 캐릭터가 몇 화에 등장했는지 기억이 안 나서 파일 하나하나 다 클릭해서 찾고 그런 적?”
“으응…….”
물론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소설, 특히 내가 쓴 글에 한해서 내 기억력은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또렷하고 정확하니까.
‘애초에 그렇게 뒤져볼 상황이 안 생기긴 하지만……. 닥치고 있자. 괜히 재수 없어 보일 수도 있으니까.’
“와……. 갓작가님은 그런 일 없나보네? 지금 너 좀 재수 없다.”
“크흠, 흠. 여튼 그런 장점이 있구나, 하하하.”
이 사람이, 친해지니 이렇게 바로 막말을?
하지만 확실히 다른 작가들이 사용하기에는 상당히 괜찮은 프로그램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 돈으로 대략 4~5만 원 꼴이라 아주 저렴한 금액은 아니다. 무기 이름, 여러 등장인물, 능력 이름, 햇갈리는 문파명, 지명 등 다양한 설정을 한 프로젝트 안에 모아둔다면 확실히 200화 이상을 기본으로 쓰는 웹소설 작가들에겐 상당히 유용하리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야. 스크리브너가 참 좋은 프로그램이긴 한데 특히 한글화가 안 되어 있다는 게 참……. 한글화만 되었어도 더 많은 작가들이 썼을 텐데 그게 가장 아쉽긴 하지.”
“그렇긴 하네. 나라도 스크리브너가 한글화가 되었다면 한번 써보기는 해봤을 것 같으니까.”
잠깐. 스크리브너가 한글화가 되는 게 언제였지? 내가 스크리브너를 사용하진 않았어도 한글화 패치가 된 게 대략 2018년도쯤이라는 건 기억하고 있다.
당시 작가들 사이에서 드디어 한글화 패치가 되었는데 기계 번역 수준으로 개판이라는 말이 흉흉이 돌았으니까.
심지어 내가 회귀 직전의 시기에도 스크리브너 한글화가 개판이라서 짜증 난다는 말이 종종 들려왔으니 지금 버전은 말할 것도 없겠지.
‘완벽한……. 한글화가 된 스크리브너 같은 프로그램. 그런 게 있다면 어떨까? 다른 단점도 보완이 된다면?’
스크리브너가 기능적으로 훌륭한 프로그램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정에 부족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한글처럼 맞춤법 기능이 정교하지도 않고 안드로이드 버전도 출시되지 않았으니까.
폰과 태블릿, PC를 번갈아가며 사용하는 작가들에겐 한글 파일처럼 아무 때나 동일한 인터페이스에서 이어서 쓰기가 힘들다는 게 치명적인 단점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는 그때.
‘잠깐만……. 해외 플랫폼 프로젝트에서 이거 제작할 수 있지 않으려나? 150억에서 일부분만 떼서 쓸 수 있다면?’
“어디 가?”
“먼저 글 쓰고 있어 형. 급하게 전화할 때가 있어서.”
“응, 천천히 다녀와.”
폰을 낚아채듯이 집어 들고 작가 사무실 밖으로 나와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단풍 삼촌!”
—왜, 인마. 귀청 떨어지겠다.
“삼촌 프로젝트 예산 배정 어떻게 할지 다 정했어?”
—지금 장난하니? 발표 심사까지 다 끝났는데 안 했을 리가 있나? 임원 미팅 때 너한테도 보고 자료 줬었는데. 다시 메일로 포워드 해 줘?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 예산 일부를 써서 오피스 프로그램 하나 만들 수 있나 해서.”
—오피스 프로그램?
“그게 뭐냐면…….”
단풍 삼촌에게 스크리브너의 대략적인 인터페이스 그리고 장단점 및 현재 대부분의 작가들이 사용하는 한글 프로그램의 장단점에 관해서도 비교하며 설명했다.
—흐음……. 단점을 보완한 스크리브너라…….
보고 있지 않아도 전화기 너머로 단풍 삼촌의 잔뜩 찌푸린 험상궂은 미간이 쉬이 상상된다.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에 흥분해 전화했던 게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이다.
“하하, 나도 그냥 해본 말이야. 하긴 플랫폼 사업이 메인인데 그 예산으로 프로그램 제작 진행을 한다는 게 아무래도—”
—나쁘지 않은데?
“……그래?”
—플랫폼 제작 예산으로 대놓고 별도 프로그램 제작을 할 수는 없지만 살짝 껴놓을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전화기 너머로 단풍 삼촌의 스산한 웃음이 들렸다. 단풍 삼촌이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웃음이다.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제작하는 데 드는 비용이 한두 푼도 아니고 우리 돈 태워서 하는 것보단 눈먼 나랏돈 타서 쓰는 게 좋다 이 말이디. 그으흐흐흐.
“……어,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대놓고 할 수는 없다며?”
방법이 있다면 좋은 거지만 단풍 삼촌이 어떻게 석유 왕국의 돈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반면, 내 고민과 달리 단풍 삼촌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
—쉽게 생각하면 되지. 웹소 작가들이 대부분 한글을 사용해 글을 쓰지. 완성된 원고를 매니저가 전달받으면 매니저들이 웹월드나 테일랜드 같은 경우엔 CP 사이트를 통해 올리거나 메일로 플랫폼에 원고를 보내 원고 등록 요청을 하고.
“그렇지?”
—하지만 소설피아 같은 곳은 다르잖냐. 소설피아는 아마추어 작가들의 등용문으로 시작된 플랫폼이라 작가들이 작품 등록을 직접 할 수 있으니까.
“아! 그 말은!”
비릿한 음성을 흘리는 단풍 삼촌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제야 감이 잡힌다.
—그래, 작가 중 일부는 한글이나 다른 프로그램이 아니라 소설피아 사이트 내에서 직접 글 등록을 하기도 한다 이 말이지. 그걸 핑계로 플랫폼 제작 시에 소설피아처럼 플랫폼 내에서 작가들이 자체로 글을 올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겸 해서 프로그램을 하나 더 빼버리면 되는 거고.
“좋네, 별도 예산을 마련할 필요 없이 플랫폼 제작 시에 껴 넣으면 된다는 거네.
그걸 기반으로 해서 별도 프로그램을 만들면 되는 거니까?”
내 말이 정답이었는지 전화기 너머로 다시 살벌하고 비릿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흐흐흐. 그렇디. 플랫폼 제작 시에 슬쩍 껴 넣고 그걸 기반으로 별도 프로그램을 제작하면 될 테니까. 별도로 따로 빼서 만들 때엔 네가 말한 것처럼 스크리브너랑 한글에서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을 모두 보안한 프로그램을 만들면 될 테고. 나랏돈은 이렇게 쓰는 거디! 미쳤다고 프로그램 만드는 데 얼마가 들지도 모르는데 그걸 우리 돈으로 만들어? 그아하하하!
원래 그런 용도로 써선 안 되는 것 같지만……. 확실히 이렇게 진행이 가능하다면 내 돈은 1원 한 푼 안 들이고 스크리브너와 한글의 대항마를 만들 수 있다는 거다.
‘역시 도준이 형이랑 있으면 아이디어가 넘친다니까.’
—그럼 그 글 짓는 프로그램 이름은 뭘로 할 생각이냐?
프로그램 이름이라.
이건 생각해 보지 않은 부분이다.
하지만 어려울 거는 없지. 이 프로그램에 딱 맞는 이름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헤르메스 어때?”
—헤르메스? 그리스 신 헤르메스?
“어, 제우스와 아틀라스의 딸 마이아에게서 난 헤르메스.”
—왜 하필이면 그 이름이냐? 우리나라랑도 브루나이랑도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데? 거기다 헤르메스는 도둑의 신으로 유명한 놈 아냐?
일반적으론 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지만, 헤르메스는 단지 그렇게 치부되어야 할 신이 아니다.
“맞아 도둑의 신, 전령의 신, 상인의 신 등으로도 흔히 알려져 있지만 헤르메스는 전 세계에 유일한 글쓰기의 신이야.”
—글 쓰기의 신? 별의별 신이 다 있구만.
“거기다 과학, 예술, 연설, 웅변의 신이기도 하지. 여하튼 프로그램 이름 뜻이 글 쓰기의 신인데 이게 마음에 안 드는 작가가 있을까? 나라도 일단 구미가 당길 것 같은데?”
—흐음……. 그렇긴 하네. 그럼 약간 변형해서 그리스 본토 발음으로 하는 건? 지금 찾아보니 그리스 원어 발음으로는 에르미스에 더 가깝다는데. 명품스러운 느낌도 있고.
명품 느낌이 나는 글쓰기의 신이라.
훌륭하다. 글을 쓰면 절로 돈이 벌릴 거란 기분이랄까?.
“좋네. 그럼 에르미스로 가자.”
—오케이! 글 쓰기의 신을 만들어주마! 그아하하하!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는 나 역시 알 수 없다.
하지만 글 쓰기의 신이 하루빨리 완성된다면 더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숨겨진 기량을 더욱 뽐낼 수 있을 테다.
‘가격은 스크리브너보다 좀 더 싸게 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