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 다 형 잘되라고 한 거야.
예고 없이 훅 들어온 말에 순간 ‘아닌데요?’라고 대답을 할 뻔했다. 하지만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은 지금 당혹스러움이 가득 한 상태가 분명할 터. 이럴 땐 무언이 답이다.
“흐음…… 아닌가 보네.”
오진아 매니저의 입에서 나직이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소리에 머리가 얼어버린 것만 같다.
얼어붙은 머리를 빨리 녹여내야 한다.
그리고 잠시 후 내가 내린 대답은.
“예? 그게 무슨…….”
“사두용미 아카데미 강의 듣고 있거든요. 녹화해서도 여러 번 반복해서 봤는데 정우 매니저님하고 전반적으로 비슷해서요.”
“……하하. 가면 쓰고 강의하시니 비슷하게도 보일 수 있겠네요. 얼굴만 가린다고 하면 도준 매니저님하고도 비슷하지 않나요? 창윤 매니저님이랑 조팟님하고도 비슷할 것 같은—”
“아뇨. 분위기도 분위기지만 말하는 태도, 억양, 골격, 피부톤 이런 게 종합적으로 비슷해서요.”
“…….”
대충 비슷한 분위기라는 식으로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했던 계획이 순식간에 자충수가 되어 돌아왔다. 오진아 매니저는 암기력뿐만이 아니라 눈썰미 또한 엄청난 사람이었다.
“헉? 진짜요? 저도 사두용미 강의 다 봤는—”
도준이 형 나이스 타이밍.
“하하, 진짜겠어요? 진아 매니저님이 장난치시는 거죠.”
“아하하, 그, 그렇죠?”
한순간에 도준이 형을 눈치 없는 사람 만든 건 미안하지만, 일단 나부터 살아야 하니까.
“뭐야~ 다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화장실을 갔던 조팟이 이창윤 매니저와 돌아오면서 견제의 눈빛을 보낸다.
‘아주 가지가지…… 아니, 잘 왔다.’
조팟의 가느다란 팔이 이창윤 매니저의 어깨 위에 걸쳐진 묘한 꼴을 보니 오진아 매니저에게 호기로운 남자상을 보이고 싶어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하는 게 훤히 보인다. 이창윤 매니저가 불쌍하다.
“별건 아니고 제가 풍기는 분위기가 노원지귀 작가님이랑 비슷하다고 해서요.”
강한 부정은 긍정의 다른 말.
괜히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얼버무린다면 괜히 의심이 쏠릴 수도 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정면 돌파가 낫다.
가장 파악하기 어려운 거짓말이 진실과 교묘히 섞인 거짓말이니까. 이런 건 이미 강경진 그 쓰레기에게 충분히 맛봐서 잘 알고 있지.
“아이고, 미안합니다. 통화가 길어져서. 자자, 다들 또 짠 하자고.”
와이프와 통화를 마친 김동현 팀장이 돌아오면서 나를 향해 집중되던 시선이 모두 분산됐다.
‘젠장……. 여기선 도준이 형이랑 더 얘기하기가 어려울 것 같네.’
마음 같아선 교육 기간이 끝나기 전에 따로 불러서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와 도준이 형과는 아무런 유대 관계가 없다.
지금 우린 단지 선임과 후임 관계인 삭막하기 그지없는 사이니까.
‘……아무래도 교육 과정이 다 끝나고 따로 자리를 만들어 내는 게 낫겠어.’
지금은 교육 과정이 진행 중이기에 한 명만 잡고 길게 얘기를 하는 게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괜히 도준이 형을 따로 불러 이야기가 길어졌다간 혹시 도준이 형이 실수라도 일으킨 게 아닌가 하는 오해를 김동현 팀장이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예 교육 과정이 끝나고 난 후를 노리는 게 나을 것 같다. 이론 교육이 끝난다고 해도 실무에 투입되게 되면 신입들이 추가적으로 궁금해하는 부분이 많아질 테고.
‘그때는 따로 불러내도 지금보단 훨씬 자연스럽게 보이겠지.’
“우리 신입 매니저님들. 회사 생활은 어때요. 힘들진 않고?”
씩 웃으며 내뱉은 김동현 팀장의 말에 도준이 형과 황건일 매니저는 너무 좋다는 흔해 빠진 신입다운 말을 한 반면 오진아 매니저는.
“글쎄요. 아직 다닌 지 첫 주라 좀 더 다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아하하, 그렇지. 뭐, 본격적인 편집자 삶은 작가를 담당해야 알게 되는 거니까.”
얼핏 듣기엔 당돌하다고 느껴질 만한, 혹은 거만하다고 느껴질 만한 말이었지만 생긋 웃는 그녀의 말투, 표정, 태도에선 조금도 건방짐이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다들 이미 만취 직전의 상태였기에 그녀의 말이 부정적으로 들리진 않는 모양이다.
“우리 정우 매니저도 고생이 많아. 신입 교육이 처음인데 세 명이나 담당해야 하니까.”
“괜찮습니다.”
‘그걸 알았으면 애초에 시키질 말았어야지, 인마.’
물론 내가 처음부터 이들을 제대로 된 편집자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다. 하지만 김동현 팀장의 입에 침도 안 발린 말이 어처구니없긴 하다.
“팀장님, 그런 건 시키시기 전에 말씀하셨어야죠.”
“……?”
놀랍게도 나를 옹호하는 이 발언이 나온 근원지는 조팟놈의 입이다.
“안 그래도 말씀드릴까 했어요. 말 나온 김에 드리는 말씀이긴 한데, 정우 매니저 업무가 너무 많은 것 같지 않나요? 한둘도 아니고 세 명이나 교육을 하는 게요.”
“어……. 좀 그런가?”
“그렇죠! 차라리 신입 분들을 나눠서 교육하는 건 어때요?”
“오, 조팟이?”
조팟놈이 웬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던 찰나.
데구루루 구른 조팟놈의 눈이 음흉하게 휘어졌다.
“네, 정우 매니저가 혼자 세 명 하기 힘들면 진아 매니저는 제가 따로 담당—”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
나는 조팟 같은 놈이 처음부터 교육을 하기보단 내가 초반에 확실히 기본기를 잡아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진아 매니저는 왜?’
오진아 매니저의 갑작스러운 대답에 모두가 놀라 술 취한 눈만 꿈벅이는 그때, 그녀가 똑 부러진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 혼자만 파트장님께 교육을 받게 된다면 도준 매니저님이나 건일 매니저님이 느끼기에 특별 대우받는다는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해서요. 정우 매니저님께서 고생하시는 건 죄송하지만 옆에서 다른 매니저님들과 동등하게 남은 교육 기간 동안 많이 배우겠습니다.”
“오우야, 정우 매니저가 아주 잘 가르치고 있나 보네. 신입들한테서 평이 이렇게 좋은 걸 보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분명히 완곡한 거절의 말이었다.
하지만 술이 절여져서인지 아니면 의도한 건지 나긋나긋하면서도 생긋 웃으며 이어진 오진아 매니저의 말에 조팟놈은 흉한 얼굴로 헤실대고 있다.
“좋아좋아! 내일 주말이라 쉬는데 다들 2차 어때?”
“아하핫! 좋습니다 팀장님! 2차 가시죠!”
“간만에 마시니 좋네요. 가시죠.”
“다들 간다면 뭐, 저도.”
신입이 잔뜩 들어온 후의 첫 회식이어서인지 김동현 팀장은 2차를 부르짖었고, 파이팅 넘치는 황건일 매니저가 호응을 하자 얼떨결에 이창윤 매니저 거기다 조팟놈까지 뿔테 안경을 쓸어올리며 2차를 가겠다는 말을 했다.
‘이건 기회다.’
도준이 형은 이미 만취가 분명한 상황.
이지연 정도는 아니지만 도준이 형 역시 술을 그리 잘 마시는 사람은 아니다.
‘도준이 형과 대화를 할 타이밍이 더 빨리 찾아온 것 같네.’
도준이 형은 첫 신입 환영회였기에 넙죽넙죽 받아 마시면서 이미 무리를 한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도준의 형의 취기를 순식간에 더 오르게 할 방법을 알고 있지.
“저는 너무 많이 마셔서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우 매니저…… 얼굴 말짱한데?”
“맞아요. 정우 매니저님 말술이면서. 같이 가아.”
김동현 팀장과 이창윤 매니저가 조금도 안 믿는다는 얼굴로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술 취한 티라도 낼 걸 그랬나보다.
“제가 원래 취해도 티가 안 나서 그렇지 만취 상태입니다. 도준 매니저님도 그런 거 같은데 제가 도준 매니저님 택시 태워서 잘 돌려보내겠습니다.”
“네넷? 아, 아뇨. 전 괜찮…… 우웁!”
‘역시, 아직도 반응 하는군.’
도준이 형은 취한 상태에서 누가 어깨를 잡고 흔들면 취기가 전신으로 퍼져 구역질이 올라오고 정신을 못 차리는 타입이다.
나는 그 극악의 스킬을 도준이 형에게 연달아 사용했고 그 반응은 즉각 올라왔다.
“화장실 다녀오세요.”
“네넵. 금방 다녀오겠……우우웁!”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때, 내 옆에서 헤롱거리던 도준이 형의 양어깨를 마사지하는 척 살짝 쥔 상태로 앞뒤로 계속 흔들었다.
그리고 반응이 온 도준이 형은 구역질을 하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미안해 형. 다 형 잘되라고 한 거야.’
“으음……. 좀 아쉽긴 하네. 어쩔 수 없지. 그럼 시간 되는 사람끼리만 갑시다!”
“그럼 즐거운 주말 되세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들어가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황건일 매니저의 우렁찬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도준이 형을 챙기러 화장실로 갔다.
“자, 그럼 2차는 우리 진아 매니저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갈까?”
“팀장님, 저도 많이 마셔서 오늘 먼저 들어가봐야겠네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어? 그럼 저도—”
“그아하핫! 무슨 소리야 조팟! 우리 조팟이 2차 간다는 거 처음 들었는데. 조팟은 절대 안 놓치지. 자 그럼 2차는 조팟 좋아하는 이자카야로 가자고!”
* * *
도준이 형과 둘만 남았다는 게 무척 다행이다.
“구웨에엑! 우웨에에엑!”
물론 토 냄새를 맡는 건 달갑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은인이었던 도준이 형의 등을 두드리는 손길을 멈추진 않았다.
“……가, 감사합니다 매니저님. 제가 사실 술을 잘 못 마셔서.”
“알고 있어요.”
“네?”
“이거 드세요.”
“……아, 감사합니다.”
도준이 형은 여전히 동공이 풀린 상태로 내가 건넨 숙취 해소제를 꿀떡꿀떡 받아 삼켰다.
숙취 해소제가 조금도 도움 되지 않을 걸 잘 알지만 술 취한 사람에게 호감도를 높이는 건 이것만 한 게 없지.
“도준 매니저님 택시 불렀으니 타고 가시죠. 저도 사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요.”
“예에? 저희 집 주소 아시나요?”
“기억 안 나세요? 좀 전에 택시 불러달라고 주소 알려 주셨는데?”
“……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많이 마셔서 기억이…….”
“괜찮아요. 택시 다 온 거 같으니까 같이 나가죠.”
물론 도준이 형이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단지 내가 기억하고 있을 뿐이지.
‘많이 피곤했나 보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틈틈이 말을 걸어봤지만 도준이 형은 아예 곯아떨어져 코까지 골고 있다.
‘오히려 잘됐지 뭐.’
택시에서 내린 후 이전 생에 몇 번이나 간 적이 있었던 도준이 형의 집으로 끌다시피 데리고 올라갔다.
“……끄어어. 저, 진짜 죄소옹…….”
“도준 씨.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감사아……합니드아아…….”
‘거참 입 좀 다물고 가면 좋겠는데, 쯧.’
사과의 말과 감사의 인사를 건넬 때마다 도준이 형에게서 흘러나오는 꾸린내가 멀쩡한 내 속마저 매스껍게 한다. 이제 다 왔다. 이제 인터폰만 누르면.
“아, 어머니 안녕하세요.”
“……누구? 도준아!”
인터폰을 누를 것도 없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집 문을 열고 아파트 난간 아래를 뚫어지게 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중년 여성의 모습이 보였다.
내겐 익숙하지만 그녀는 나와 상반된 경계 어린 눈빛을 내게 보냈다. 아무래도 이때는 어머니와 도준이 형의 사이가 좋지 않을 때여서인지 나를 향한 경계심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어머니가 우릴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내 팔에 기댄 도준이 형을 넘겨받았다.
“안녕하세요, 도준 씨와 같은 회사 다니는 박정우라고 합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많이 드셔서…….”
“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과 달리 어머니의 눈빛엔 못마땅한 기색만 가득하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 어머니 눈엔 도준이 형이 이런 중소기업에 다닐 만한 사람이 아닐 테니까.’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차가운 눈빛을 맨몸으로 받아 내니 씁쓸한 감정이 든다. 결코 어머니의 태도가 서운해서가 아니다. 도준이 형이 마음고생 했다는 말로만 들었던 상황을 내가 직접 목격하게 된 게 씁쓸할 뿐이다.
인사불성의 도준이 형과 어머니가 집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그럼 내일 봐 형.”
나도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준이 형은 기억하지 못할 말을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