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53화 (53/201)

#53화 -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오늘은 황금 연휴의 시작인 2월 18일.

설 전날이다.

타다다닥— 타닥— 타다닥—

벽 한쪽 면에 붙은 시계가 오후 1시를 가리킬 때가 돼서야 오전부터 시작된 원고의 마무리가 끝났다.

“끄으흡. 비축은 이 정도 하고. 나머지는 밥 먹고 와서 마무리할…… 음? 누가 왔나?”

의자에 기댄 허리를 뒤로 젖히며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는데, 아무도 없어야 할 옆방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다.

‘누구지? 작가님들은 아닌 것 같은데?’

수요일인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이어지는 황금 연휴. 설을 맞아 천명 작가와 사평 작가는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니 작가들이 글을 쓰러 온 건 아닐 터.

슬리퍼에 대충 발을 구겨 넣고, 나는 구 LGA컴퍼니로 쓰였던 옆집으로 갔다.

틱틱틱틱틱틱— 띠리링~

“어? 미현 본부장—”

“그럼요 작가님. 물론이죠. 저희는 총매출이 아닌 플랫폼 수수료를 제외한 순매출의 8 대 2 정산으로 계약을 제안드리는 겁니다.”

통화 중이던 권미현 본부장은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검지를 펼쳐 입술에 가져다 댔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통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물론이죠. 보내드린 계약서 샘플 확인해보시고요 추가로 수정 필요하거나 궁금하신 부분 있으시면 편하게 연락 주세요. 네, 들어가세요.”

“미현 본부장님, 여긴 어쩐 일이에요?”

권미현 본부장의 통화가 끝나자마자 나는 그녀에게 곧장 물어봤다. 그녀는 날 바라보며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쳇, 딱 걸렸네요. 대표님은 가족들 안 보러 가세요?”

“저 고안데?”

“아, 정말! 무슨 말인지 다 알면서 그렇게 말하기 있어요?”

“아하하, 장난이에요. 보육원 식구들은 명절 때마다 여행 다니느라 정신없거든요. 오늘도 다들 에버랜드 갔어요. 할 일도 많은데 집에 따로 있는 게 편하죠. 그런데 미현 본부장님은 어쩐 일이에요?”

“저도 이게 쉬는 거예요. 명절 때마다 싸우고 난리 나서 여기로 슬쩍 도망친 거니까 일한다고 잔소리할 생각 말아요. 명절이라 가뜩이나 예민하니까.”

슬쩍 도망쳤다는 말과 달리 권미현 본부장의 책상은 상당히 본격적이다.

‘……따로 보너스나 챙겨줘야겠는데?’

설 연휴 동안만큼은 다들 푹 쉬게 만들 생각에 미리 공지를 해 뒀다. 휴일에 LGA컴퍼니 사무실에 들어가려면 내게 알림이 뜨기에 권미현 본부장는 여기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 안 드셨으면 같이 먹죠. 저는 아직 식사 전이라.”

“그럼 비싼 걸로 사주세요. 지금 통화한 카리오스 작가도 계약하기로 했거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 그 전에.”

피식 웃은 권미현 본부장가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작가들 이름에 동그라미가 가득 처진 표였다.

“카리오스 작가들. 포섭 완료했습니다.”

그 동그라미들은 카리오스 소속 작가들이었다.

“밥 먹으면서 얘기해요.”

점심은 정말 비싼 걸로 사줘야겠다.

* * *

아직 추운 날씨인데 하필이면 비까지 내려서인지 더 으슬으슬하게 느껴진다.

후루루룩— 후룩—

“아침 안 먹었어요?”

“……민망하니까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진 말아 주실래요?”

“아니, 잘 드시길래……. 부족하면 더 시켜요.”

“그럴 거예요.”

물론 이런 날씨의 장점도 있다.

이런 날씨에 먹는 샤브샤브 같은 국물 요리는 평소보다 2배는 더 맛있게 느껴지니까.

권미현 본부장은 고기 사리를 2번 더 추가하고 칼국수와 만두까지 넣어 야무지게 그릇을 비웠다.

“사장니임! 여기 죽 해주세요!”

“……다 먹을 수 있겠어요?”

“샤브샤브 먹으러 와서 죽 안 먹는 사람이 어딨어요? 맛알못이네”

“…….”

저렇게 잘 먹는데도 군살 하나 없는 걸 보면 자기 관리가 정말 대단한 사람 같다.

“아, 맞다. 카리오스 작가들 컨택 말씀드려야죠? BS북에서 제안한 정산비, 선인세보다 다 올려서 보냈어요. 컨택한 분들은 거의 다 계약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지난 월요일 회의 때 강경진 팀장에게서 건네받은 대외비 자료들을 정리해 바로 권미현 본부장에게 넘겼다.

작품명과 정산비도 모두 칼 같이 정리되어 있었기에 권미현 본부장은 작가 컨택을 하는 데 무척 유용한 자료라고 했다.

“좋네요. 그분들 모두 카리오스 측에 계약 해지 내용 전달한 작가님들이죠?”

“네, 아까 통화한 분이랑 몇몇 분은 아직 인데 차주 월요일에 카리오스에 모두 연락 하고 알려달라고 했어요. 카리오스 측이랑 계약 해지가 완료돼야 저희가 계약할 수 있으니까요.”

“잘됐네요. 고생 많았어요.”

고생했다는 말에도 권미현은 살짝 콧등을 찌푸렸다. 권미현이 고민에 잠길 때 보이는 모습이다.

“무슨 이슈 사항 있었어요?”

“음, 그게……. 좀 애매한 작가들이 있어서요.”

“애매한 작가들이요?”

“지금 작가 명단 카톡으로 보내드렸는데 한번 봐주실래요? 세모 표시한 작가들이요.”

카톡에 도착한 사진을 보니 작가들의 필명 앞에 순서대로 번호가 쓰여 있었고 동그라미, X, 세모로 구분되어 있었다.

X표시 작가들은 내가 권미현 본부장에게 미리 말해 아예 컨택에서 제외하라고 전달한 작가들이다.

그들은 대부분 S급이나 A급 작가.

내가 회귀하기 전, 카리오스가 계약 사기로 논란이 생겼을 때도 이들은 최소 3~5년 이상 카리오스와 계약을 유지해 나갔었다.

‘S급이나 A급 작가들 계약서엔 장난질을 안 해뒀겠지. 차별 대우를 받은 건 B급부터였으니까.’

그렇기에 리스트에 적힌 S급이나 A급 작가들이라면 굳이 우리 회사에서 컨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다. 이들은 이미 카리오스에서 충분히 괜찮은 조건을 제안받았을 테니까.

‘이 사람들까지 데려오겠다고 굳이 출혈 경쟁을 할 필요는 없어. 우리 타깃은 늘 신인 작가니까.’

S급, A급 작가들이라면 이미 충분히 자리를 잡은 작가들일 터. 만약 이들이 카리오스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출판사로 옮기겠다고 해도 이들은 알아서 좋은 조건을 찾아 떠날 터다.

“세모 표시 작가는 글 실력은 있는데 싸가지, 아니 인성이 부족한 작가들이요. 계약하면 확실히 돈이 될 작가들이긴 해서 따로 정리해 뒀어요.”

“……?”

“말하는 태도부터가 글러먹었더라고요.”

“어떤 식으로요?”

“그런 작가들 있잖아요. 자기가 완전히 갑이라는 인식이 박힌 작가들.”

“아…….”

간혹 작가들 중엔 예술 뽕에 가득 찬 사람들이 있다. 작가들의 싸가지란 그들의 실력이나 성적에 비례하지 않고 철저히 그 사람의 인성에 따른다.

‘하긴. BS북 다니면서 인성 빻은 작가들 여럿 봤지.’

피자헛둘 작가처럼 의도적으로 매니저의 연락을 씹는 작가들.

새벽, 밤, 휴일 할 것 없이 지들 꼴리는 시간에 연락하는 작가들.

매니저를 마치 부하 직원 다루는 작가들.

혹은 매니저에게 막말과 폭언을 쏟아내며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작가들까지.

꿈꾸는돌 작가나 천명 작가처럼 프로 의식이 가득한 작가들도 많다. 하지만 작가라는 타이틀이 지닌 예술 뽕에 취한 양아치 작가들 역시 적지 않다는 게 출판계의 슬픈 현실이다.

자기는 자유로운 영혼이며 언제든지 꼴릴 때 연락하고, 원고도 주고 싶을 때 줄 수 있다는 괴상한 특권 의식을 지닌 머저리들이 바로 그들이다.

“글만 봐서는 확실히 돈 될 작가들이긴 해서 바로 탈락은 못 시키겠더라고요. 어떻게 할까요?”

월급 받으면서 일하는 권미현 본부장 입장에선 고민할 만한 문제다. 뻔히 돈이 될 걸 알면서 인성 때문에 계약하지 않는 건 회사 수익 입장으로 따지자면 득보다 실이니까.

하지만.

“뭘 이런 걸 물어봐요?”

“……?”

“세모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탈락 시키세요. 우리가 돈 벌려고 이 일 시작한 것도 아니잖아요?”

작가와 맺는 계약서에는 작가가 갑, 출판사가 을로 표시된다. 하지만 이 관계는 평등하고 수평적이어야 하며 서로를 향한 존중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억만금을 벌어 주는 작가라 해도 인성이 빻았다면 우리 회사에 발붙이게 할 생각이 없다.

LGA컴퍼니를 설립하고 그동안 여러 번 언급한 것 같은데, 아직도 내 진심이 전달이 안 된 거였나? 그럼 다시 말해 줘야지.

두 번 다시 이런 고민할 필요 없도록.

“개인주의랑 이기주의는 다른 거예요. 아무리 스타 작가여도 인성 문제 있으면 저한테 따로 보고 하실 것 없이 바로 탈락시키면 돼요.”

“알겠어요 대표님.”

아니다. 오늘은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평소보다 더 단호하게 내 입장을 전달해야겠다.

그래야 판무팀을 담당하는 권미현 본부장이 내 의도를 부하 직원들에게 더욱 명확히 전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인성 이슈로 컨택 보류하는 작가님들껜 눈치 볼 것 없이 당당하게 말해주세요. LGA는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매니지를 지향하는 거지 실력만 보는 게 아니라고.”

“어……. 작가님들께 대놓고 말하라고요?”

“네, 매니저들에게 함부로 반말 찍찍 뱉으면서 종 부리듯 하대하는 작가, 욕설하는 작가, 성희롱적 발언 하는 작가, 다른 매니지에서 습관성 선인세 먹튀 했던 작가 등. 그런 작가에겐 대놓고 해당 이유로 LGA컴퍼니와 계약이 불가능하다고 말해주세요.”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했다가 언플이라도 당하면…….”

“하라고 해요. 우리가 떳떳한데 뭐가 문제에요? 정산 비율도, 정산 지급일도, 작가 케어도 우리 회사가 전국에서 다른 매니지보다 부족한 게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경영 본부장님한테도 따로 말해 둘 테니 우리가 원하는 작가, LGA와 함께 할 수 있는 작가는 이런 작가다. 이 내용 정리해서 아예 홈페이지 메인에 큼지막하게 띄워 주세요.”

내 태도가 상상 이상으로 단호했는지 권미현 본부장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뜻을 굽힐 생각은 없다.

음주운전 전과의 개그맨, 사기 전과의 가수, 성범죄자 전과 배우의 영화 등. 작품이 좋으면 뭐해? 그걸 만들어 내는 이가 쓰레기인데.

이걸 알면서도 온전히 해당 가수의 배우의 작품을 감상하는 게 과연 즐거울까?

직원을 착취하고 폭언을 일삼는 음식점 사장.

그런 쓰레기 사장은 자신의 가게에서 소비하는 손님을 맛만 있으면 신나서 처먹는 개돼지로 여긴다.

내가 모든 출판계를 단번에 뒤엎을 수는 없다. 하지만 최소 LGA컴퍼니에서 출간되는 책을 소비하는 독자들만큼은 개돼지 취급받게 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럼……. 말씀하신 사유로 한번 거절한 작가님은 신작을 써도 저희와 계약을 못 하는 건가요?”

“아뇨, 아예 블랙리스트에 올리듯 낙인을 찍으려는 게 아니에요. 멋대로 행동하는 작가들 중에선 사회 경험이 부족한 작가들, 특히 20대 작가들의 수도 상당수잖아요. 신작으로 연락이 왔을 때 이전과 바뀐 모습이라면 얼마든지 계약이 가능하죠. 처음엔 몰랐다고 해도 작가 생활을 하면서 그들도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요.”

솔직히 말해 나는 사람이 바뀐다는 건 믿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기회는 줄 생각이다.

개인주의는 이기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이기적인 양아치 새끼들이 출판계에 발붙이게 할 생각이 없다.

‘그런 놈들이 사회를 좀먹는, 결국엔 출판계를 좀 먹는 벌레 새끼들이 될 테니까.’

개인주의란 모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할 때 자신이 도덕적 주체가 되는 모습이다.

반면 이기주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도덕적인 태도.

즉, 남에 대한 배려, 고려가 없고 사회에 책임도 없는 개망나니 같은 태도다.

그리고 우리 매니저들 역시 작가들이 그런 태도를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미현 본부장님. 앞으로 작가님한테 아무때나 연락해도 된다는 말은 자제해 주시고요.”

“그게…….”

“알아요 작가님들께 어려울 것 없이 편하게 연락 달라는 의미로 하는 말이란 걸. 하지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처음부터 그런 상황이 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이건 중요한 문제입니다.”

양아치 같은 매니저들이 많지만 BS북 같은 무간지옥 속에서도 순수하고 착한 마음을 지닌 매니저들은 존재한다.

‘그건 다른 출판사도 마찬가지겠지.’

단언할 순 없지만, 이창윤 매니저나 김동현 팀장 같은 사람들도 처음 매니저 일을 시작했을 땐 지금처럼 흑화하지 않았을 거로 생각한다.

자기가 일어나서 글 쓰는 시간이 새벽이라 그때만 연락할 수 있다고 새벽에 연락하는 작가. 매니저들이 오은영 박사로 보이는지 시도 때도 없이 개인적인 넋두리를 하며 나데나데를 요구하는 작가.

이런 또라이들에게 걸려 영혼이 갈리고 또 갈리다 보면 결국엔 조팟처럼 작가는 적이다 라는 단계까지 흑화해 버리기 일쑤다.

물론 조팟놈은 처음부터 그랬을 것 같지만.

“미현 본부장님이 쉬는 날에도 회사를 위해 노력해주는 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하지만 작가님들께 확실히 알려 드려야 해요. 단지 우리 회사뿐만이 아니라 출판계의 문화를 위해서도요.”

“…….”

“우리 드래곤 매니저들은 정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 최선은 업무 시간에만 적용된다는 걸 밑에 직원분들도 그리고 작가님들도 꼭 알게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바뀌어야 하는 건 편집자와 출판사뿐만이 아니다. 작가들의 인식 역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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