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41화 (41/201)

#41화 - 한 달이 더 당겨졌어?

“……아아 예. 또 휴재요? 아……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작가님. 그런데 큰아버지가 세 분이세요?”

“……여동생분이 위독하셔서 병원비 때문에…… 예, 그렇죠. 그래서 인세를 미리…….”

큰아버지만 세 번째 돌아가신 작가.

외동인데 여동생의 병원비를 위해 선인세를 달라는 작가 등.

작가의 탈을 쓴 양아치들의 전화가 요동치는 BS북 판무 매니저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판무 1팀의 팀장 강경진은 홀로 이 전쟁터 속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최소 다른 매니저들에겐 이렇게 보였을 터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자신의 팀이 아닌 바로 옆 팀. 미팅으로 자리를 비운 2팀 박정우 매니저의 빈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진혁 파트장님, 영진 파트장님. 잠시 통화 좀 하고 올게요.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 급한 일 있으면 톡 보내 주세요.”

“다녀오세요 팀장님.”

“다녀오십쇼!”

“알겠습니다.”

꼰대와 젊꼰들이 가득한 BS북.

그런 꼰대 파티 속에서 누구보다 매너 있다는 평의 강경진 팀장은 파트장들에게 생긋 미소 지은 후 소회의실로 이동했다.

“우리 팀장님 너무 젠틀하지 않아요? 한우석 팀장님 계실 때랑 비교하면 지금이 천국 같다니까요?”

“당연한 소릴. 강경진 팀장님처럼 우릴 믿어주는 상사는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팀장님 자리 비우셔도 뺑끼칠 생각 말고 다들 집중 합시다. 업무 시간에 트위터 기웃거릴 생각 말고.”

“예, 파트장님…….”

몇 달 전.

강경진의 구원으로 로맨스팀으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판무 1팀으로 복귀한 최진혁 파트장은 강경진 팀장의 은혜를 갚겠다는 듯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하지만 강경진 팀장은 이들의 행동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자리를 비워도 그의 책상에 놓인 펜 타입 녹음기가 언제든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티디딕— 티디디딕— 티디디딕—

소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잠근 강경진 팀장은 신경질적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머저리 같은 새끼. 작가 관리를 그따위로밖에 못 해? 이래서 고졸 새끼들이란, 쯧.’

그의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강경진 팀장의 속은 용암처럼 들끓었다.

바로 한 주 전.

1팀 팀장을 통해 박정우 매니저가 관리하는 BS북의 스타 작가 코즈일이 웹툰 계약을 LGA컴퍼니와 하겠다는 말을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늦어도 한 달 뒤면 투자금을 유치 받고 내년 1월이면 웹툰 법인도 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작 한 달 경만 더 잡아두면 되는 걸 머저리 같은 고졸 매니저는 하지 못했다.

—강 팀장님, 오랜만입니다? 어쩐 일로?

“안녕하세요 부장님? 잘 지내셨죠? 예, 저야 물론 잘 지냅니다, 하하하. 다름이 아니라…….”

그래서 강경진 팀장은 전화를 할 수밖에 없었다. 투자금 수령 일정을 계획보다 더 앞당기기 위해서.

* * *

“어머, 자기도 긴장하는 타입이었구나?”

“아…… 예. 드라마화 제안은 처음이라 긴장이 되네요. 아! 그보다 자리 마련해주신 거 감사합니다. 빈자리도 제가 계산하고 갈게요.”

오늘은 11월 14일 금요일.

‘인턴사원 회장님’의 판권 계약을 요청한 ‘스튜디오 해츨링’과의 미팅 날이다.

“됐네요. 나 같은 신인 작가한테도 정산 비율이랑 계약 조건도 좋게 맞춰줬으면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코즈일 작가가 직접 내 글을 담당해 주기로 했는데, 나도 이 정도는 해주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그리고 나 윤선미예요. 이 정도 능력은 되는 사람이니까, 괜한 소리 말라고.”

“하하, 네.”

윤선미는 내 글을 눈여겨 봤다는 제작사 대표와 친분 있는 사이였다. 그리고 윤선미의 호의로 그녀의 루프탑 바에서 따로 제작사 사람들과 미팅을 진행하게 되었다.

‘미팅 때문에 한 층을 다 비워주다니. 고맙네.’

스타작가 라는 필명으로 LGA컴퍼니와 계약을 맺은 윤선미는, 천명 작가와 사랑과평화 작가를 제외하곤 내 실체를 아는 유일한 작가다.

그녀는 내가 BS북의 편집자이자 코즈일이고 노원지귀이기도 하며 거기서 더 나아가 LGA컴퍼니의 대표라는 사실도 알게 됐으니까.

윤선미는 연예인 특유의 서글서글한 성격이 있었기에 날 향한 호칭은 편하게 하기로 했다.

물론 나도 그게 더 편했고.

“근데 정우 씨, 나 조금 서운하려고 하네?”

“뭐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 내가 아무리 요즘 광고만 찍고 티비에 자주 안 나온다고 해도, 나랑 처음 만날 땐 조금도 안 떨려 했으면서.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긴장을 하네? 질투나게?”

“에이, 무슨 소리세요. 당연히 그때가 더 떨렸죠.”

확실히 배우는 배우다.

내가 너무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자 우스갯소리로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는 것 같다.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다.

“브라운관의 요정님! 오랜만입니다, 하하.”

“대표님 오셨어요? 어머? 작가님도 같이 왔네?”

“아하하! 오랜만입니다, 여신님.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열일 하시는군요.”

“아니에요. 오늘은 딱히 일 없는데?”

“외모가 열일 하신다구요, 아하하핫!”

“으유, 진짜. 아재 개그 좀 그만해요.”

윤선미의 태도를 보니 제작사 대표 그리고 작가라는 사람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드라마 작가겠지.

“저보다 이쪽에 먼저 인사드려야죠. 코즈일 작가님이세요.”

짧은 해후를 마친 윤선미가 그들의 시선을 내게 건넸다.

“인턴사원 회장님의 작가 코즈일이라고 합니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스튜디오 해츨링의 대표 고영호라고 합니다. 여긴 임준기 작가님이시고요.”

“임준기입니다. 제가 인턴사원 회장님 극본을 맡게 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지만, 하하. 워낙 욕심나는 작품이라 고영호 대표님께 떼를 좀 썼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잘 부탁드려요, 하하하.”

단풍 삼촌이 따로 알아본 결과, 판권 계약 전에도 그리고 후에도 원작자와 만나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했다.

판권 계약 후에 드라마 작가, 감독, 조연출, 배우와 스태프 등을 구하고 조언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그때 되어서야 미팅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신기하네. 판권 계약도 전에 드라마 작가까지 함께 와서 미팅하자는 걸 보니.’

이들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 윤선미가 눈을 찡긋거리는 걸 보니 아마도 이들이 오게 바람을 넣은 게 그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 임준기 작가의 이름은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다. 서글서글한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과 달리 ‘안방 극장 시간 도둑’이란 별칭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다들 그럼 앉아서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따로 일 좀 보고 올게요.”

“하하하. 고마워요, 요정님. 미팅 끝나고 그때 다시 이야기 나누시죠.”

우리를 배려한 윤선미가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이제 본격적인 대화의 시간이다.

“BS북 측에 메일로 연락드렸던 것처럼 코즈일 작가님을 따로 뵙자고 요청드린 건, 원작자이신 작가님의 의견을 조금 더 들어보고자 해서입니다.”

내 의견을 듣는다고?

회사로 온 메일에도 그렇게 써 있긴 했지.

듣기 좋은 말이긴 한데, 선뜻 이해 가는 말은 아니다.

판권 계약이란, 말 그대로 내가 쓴 ‘인턴사원 회장님’의 드라마 출판권을 넘긴다는 의미였으니까.

즉, 판권 계약 후에 원 저작자인 나는 제작사가 원작과 드라마를 아무리 다르게 바꾼다고 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판권 계약에 앞서 다른 딜을 넣겠다는 걸까?’

“아하하, 제가 의욕만 앞서 너무 두루뭉술하게 말씀드렸군요. 우선 저희 스튜디오 해츨링 측에선 판권 계약은 반드시 진행하고 싶습니다. 물론 작가님께서 원하신다는 가정하에서요.”

“예, 그렇군요. 실례지만 대화에 앞서 저도 하나 여쭐 수 있을까요?”

“말씀하시지요.”

제작사 대표 고영호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왜 인턴사원 회장님을 컨택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현실적인 이유를 들자면 배경이 한정적이어서죠.”

소설과 달리 드라마화의 경우엔 많은 제작 비용이 든다. 그리고 인턴사원 회장님은 배경 대부분이 사무실이나 회의실, 혹은 주인공의 집이나 단골 식당 등이 될 테지.

‘확실히 제작 비용 절감에 도움이 되겠네. CG가 들어갈 부분도 많지 않을 테고.’

“물론 제작 비용 부분을 고려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 깊이 있는 내용에 반해서 제안을 드린 거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내용 부분에 관해서 작가님께 설명을 들었으면 하고자 연락을 드린 겁니다. 저희 스튜디오 해츨링은 최대한 원작자의 의견을 반영하자는 입장이어서요.”

대표의 태도에서 왜 스튜디오 해츨링이 웰메이드 드라마 제작사로 유명한 곳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느껴진다.

“인턴사원 회장님은 한 대그룹 회장이었던 주인공이 장기말로밖에 여기지 않던 인턴의 몸에 빙의하면서 겪는 좌충우돌 드라마. 이게 기본적인 골조로 보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계약직 직원 그리고 신입 사원의 고충을 주인공이 몸소 겪으며 성장하는 매력적인 휴먼 드라마 소재였죠.”

고영호 대표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다만, 독자들이 여러 시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연출해주신 부분이 종종 있었기에 이 부분에 관한 의견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결말 역시 열린 결말이어서요. 작가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바를 저희가 안다면 작품의 이해도 또한 더 높아질 것 같아서 말이죠.”

칭찬만 가득 담긴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 다행이다. 고영호 대표의 진솔한 태도가 더욱 그를 신뢰할 수 있게 했다.

“드라마 판권 계약은 처음이라 준비를 좀 해왔습니다. 보시면서 설명드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오호호! 좋군요.”

나는 미리 준비해 온 인턴사원 회장님의 시놉과 기획 의도, 줄거리 그리고 캐릭터별 특성이 정리된 파일을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고영호 대표는 아직 모를 터다.

내가 준비 해온 것, 그리고 요청하고자 하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 * *

“정우 매니저. 드라마 제작사랑 코즈일 작가가 미팅한 지 좀 된 거 같은데…… 아직 별말 없었어요?”

“네, 아직 별다른 소식을 듣진 못했네요.”

오늘은 11월 24일 월요일.

스튜디오 해츨링과의 미팅이 있은 지 열흘이 지난 후다.

“판권 계약이 쉬운 게 아니라니까? 코즈일 작가한테 괜히 바람 넣지 말고 글이나 열심히 쓰라고 해요.”

이 세계가 무협 세계관이었다면 조팟새낀 말로 여럿을 주화입마에 빠트렸을 거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긴 현실 세계.

나도 조팟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있진 않았다. 실적도 없이 뻗대는 놈에겐 개쌍마이웨이가 정답이었으니까.

“작가님이 어련히 잘하겠죠.”

“……뭐, 그래요 그럼.”

“네에~ 그럴 겁니다.”

좋은 소식도 있었다.

소설피아에서 이제 막 연재를 시작한 스타작가 윤선미의 판드 신작이 좋은 반응을 내는 중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뿐만이 아니라 내 모든 담당 작품들은 모두 괄목할 성적을 내는 중이다.

“아하하, 근데 팀장님들이랑 본부장님들 무슨 일 있나봐요? 다들 대표실로 가던데?”

나와 조팟놈의 사이에 스파크가 튀는 걸 감지했는지, 이창윤 매니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불쑥 끼어들어 주제를 돌리려 했다.

“30억 받았대요. 아마 그거 땜에 다 모이는 듯?”

“올댓스토리 투자금이요? 연말에 받을 것 갔다더니 한 달 당겨졌네요?”

“응, 강경진 팀장님이 쇼부 치신 것 같던데. 생긴 거 준수해, 능력 좋아, 인성 좋아. 하…… 저런 분이 우리 2팀 팀장이어야 하는데.”

“파트장님 설마……? 라인 갈아 타려고요?”

“라인은 염병? 이 좆만한 회사에 뭔 라인이 있어요? 강 팀장님 미만 잡이지.”

“그래서 1팀으로 가신다구요? 멀리 안 나갑니다.”

조팟과 이창윤 매니저가 말장난을 하며 낄낄거렸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젠장……. 한 달이 더 당겨졌어?’

강경진과 지난 미팅 때 분명 12월 중에 투자금을 수령할 것 같다고 했는데.

11월 말인 오늘 벌써 투자금을 수령한 상황이라면 12월 중엔 BS북 법인 출범이 시작될 게 분명하다.

적의 공격이 빨라졌다면, 우리도 그에 맞춰야 한다. 어서 LGA 임원진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겠다.

‘드라마 판권 계약은 LGA와 하기로 했고. 이제 사업 확장에 박차만 가하면 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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