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 그걸 또 왜 저희가 해요?
발리에서의 남은 일정은 여유롭게 그리고 순조롭게 흘러갔다.
“우아잌! 워, 원숭이! 얘네들 깡패예요!”
“반짝이는 거! 반짝이는 거 숨기래요!”
토요일 오전에 들른 원숭이 사원.
삼촌들이 연상되는 원숭이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그곳에서 힐링 아닌 힐링을 했고.
“헐……. 무진 본부장님 몸 봤어요? 장난 아니다…….”
“저, 저거…… 총 자국 아니에요? 실제로 처음 봐요.”
“저도요. 쪼금 무섭네요, 하하.”
“에이, 무섭기는 노원지귀 작가님이 제일 무섭죠.”
“엥, 왜요?”
“저기 봐요. 파라솔 아래서 글 쓰시는데요?”
“와……. 진짜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 우린 물놀이나 하러 가요 매니저님들. 1시간 뒤에는 서핑 강습 시작한대요.”
“좋아요!”
그리고 오후엔 물놀이를 했고, 저녁엔 노을로 물든 풍경을 바라보며 해안가 모래사장에 차려진 해산물 파티를 즐겼다.
‘몰래 핸드폰 들고 온 사람은 없는 거 같네.’
이번 워크샵에서 핸드폰이 사용 가능한 건 오직 나와 경영 본부장인 단풍 삼촌 둘뿐이다.
직원들에겐 워크샵 기간 동안 만큼은 SNS와 업무에서 해방돼 직원 간의 소통에 중점을 맞추자고 했는데. 다행히 불평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사진을 찍지 못해 아쉬워할 직원들을 위해 단풍 삼촌은 DSLR 카메라로 연신 사진 촬영을 요청하는 직원들의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상대는 강경진이니까.’
내가 해외 여행 온 장소가 LGA컴퍼니의 워크샵 장소와 동일하다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놈은 소라게처럼 몸을 숨길 터.
과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강경진이 나와 LGA컴퍼니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한다.
“거북이! 이쪽에 거북이 보여요!”
“소담 매니저님은 상어 봤데요!”
발리에서의 셋째 날 시작은 스노쿨링 그리고 오후엔 명상을 위한 요가 강의와 아로마 마사지. 그리고 마지막 저녁 식사는 해안가 절벽 위에 지어진 레스토랑에서 오션 뷰를 보며 만끽했다.
“음? 저건 또?”
식사 도중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남자 둘이 우리 자리 주위에 얼쩡거리는 게 보인다.
그런데 점점 다가갈수록 우리 직원들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쌍간나들이 겁도 없네 기래. 어이. 니들 한국애들 맞지. 니들 어디 사니?”
“으허어…… 조, 조폭!”
“죄, 죄송합니드아!”
이지연과 권미현에게 찝쩍댔던 한국인 남자 둘은 단풍 삼촌이 시야에 들어온 즉시 폴더 인사를 박고 도망쳤다.
‘새끼들아. 해외에 나와서까지 그러고 싶냐?’
따지고 보면 굳이 한국인들뿐만이 아니다.
단풍 삼촌이 자리만 비울 때면 다국적 하이에나들이 이지연과 권미현을 향해 집적거렸으니까.
하지만 어느 국적의 하이에나라도 단풍 삼촌의 등장과 함께 도망치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단풍 삼촌은 외모 그 자체 만으로도 상당한 위압감을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자자! 오늘은 마지막 밤이니까 다들 많이 드시고! 마시고! 푹 쉽시다!”
발리에서의 마지막 밤의 마무리는 숙소에서 바비큐 파티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다들 저녁을 든든히 먹어서 배부르다고 했지만, 단풍 삼촌이 고기와 해산물을 굽는 족족 사라지는 걸 보니 여러모로 놀라웠다.
“아니, 작가님……. 일부러 그러시는 거죠?”
“……?”
수영장 언저리에 삼삼오오 모인 직원들이 발을 담그고 바비큐를 안주 삼아 술을 마시거나 수다를 떠는 그때, 남자 직원 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뭐가요?”
“다른 팀은 몰라도 저흰 작가님 때문에 불안해서 쉴 수가 없어요.”
“저 때문에요?”
“네! 워크샵 오셔서 정말 워크만 하시는데! 쉬지도 않고 글만 쓰시니까 무서워서 못 쉬겠어요.”
“마지막 날인데 같이 놀아요 작가님.”
빛나는 눈빛으로 내게 놀자고 하는 이들은 권미현의 후임으로 들어온 판무팀 신입 매니저 황성현과 장준일. 말은 저렇게 해도 모두가 쉬는데 나만 일을 해서 걱정하는 눈치다.
‘나는…… 좋아서 쓰는 건데?’
굳이 해외까지는 아니더라도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 글을 쓰는 것. 전생에서부터 제대로 글먹을 하게 되는 날이 오면 꼭 이루고 싶은 일이었다.
나는 글 쓰는 것 자체가 늘 즐겁고 좋으니까.
하지만 이 사실을 말하면 괜히 꼰대 같이 보이겠지. 조팟같아 보일 수는 없다.
“그럴까요? 그럼 맥주나 같이 한잔하죠?”
“흐흐, 안주는 종류별로 이미 준비해뒀습니다요 작가님.”
“맥주도 이미 가져왔습죠.”
서글서글한 웃음으로 안주와 맥주를 들이미는 그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황성현, 장준일 매니저는 신입임에도 불구하고 판무팀 매니저에게 꼭 필요한 능력 중 하나인 친화력이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교정 능력도 상당했고.
판무 매니저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교정 능력은 맞춤법 검사기 수준에 다른 업무 능력도 상당한 이런 인재들을 BS북에선 왜 뽑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뭐, 고민할 게 있나? 연봉이랑 복지가 쓰레기니까 그렇지.’
LGA에서는 BS북 팀장급 이상의 월급과 복지를 제공한다. 그러니 이런 인재를 데려올 수 있었겠지. 전국의 매니지들아, 사람 귀한 줄 알고 제발 돈 좀 써라 새끼들아. 주머니에만 두둑이 챙길 생각 말고.
LGA의 판무 레이블 드래곤엔 아직 노원지귀와 천명 작가만 계약된 상황이다.
하지만 옆에서 맥주를 기울이는 황성현, 장준일 매니저들 같은 사람들이 드래곤에 더 모이게 된다면, 웹툰뿐만이 아니라 웹소설 업계에서도 BS북을 예상보다 더 빠른 시일 내에 꺾을 수 있지 않을까?
웃음소리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발리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다.
* * *
한국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날.
오전 비행기였기에 아침 일찍 공항으로 이동한 LGA컴퍼니 임직원들은 공항에서 식사 후 각자 쇼핑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7시간의 비행 후, 드디어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다들 고생 많았습니다. 피곤하겠지만 얼른 집 들어가서 푹들 쉬시고 내일 회사에서 뵙죠. 작가님도 고생하셨고요.”
“고생하셨습니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모두와 헤어진 후.
나는 홀로 인천 공항 주차장에 세워둔 내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어디……. 한번 볼까?”
누가 보는 것도 아니었지만, 차 안에 올라탄 나는 괜스레 은밀한 손짓으로 폰 전원을 켰다.
띠링— 띠링— 띠링—
사정없이 밀려드는 문자와 카톡을 뒤로한 채 나는 곧장 소설피아에 로그인했다. 그리고.
“푸흐흡…… 푸하하핫!”
입틀막 사이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아낼 수가 없었다. 사평 작가와 천명 작가가 보냈다는 쪽지는 소설피아 쪽지함 구석구석을 눈을 까뒤집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으니까.
“자승자박의 말로가 이렇지. 잘 있어라 BS북.”
내 쪽지를 삭제한 게 강경진인지 경영지원팀인지 대표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BS북이 관리하는 상황에서 쪽지가 삭제된 건 이제 명백해졌다.
BS북을 향해 미리 이별의 인사를 보낸다.
이제 내 작품들을 BS북에 옭맬 방법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이제는 BS북의 추격을 따돌릴 때까지 최대한 LGA컴퍼니를 키울 뿐이다. 뿌듯한 마음으로 허공에 중지를 날려본다.
* * *
워크샵에 다녀오고 한 주를 보내니 벌써 확연히 추위가 느껴지는 11월 3일 월요일이다.
바로 전 주까지만 해도 찌는 듯한 더위에 있어서인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기분.
“판무 1팀에 함께하게 된 정진우라고 합니다.”
“임서진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판무 1팀에…….”
그리고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건 바뀐 날씨뿐만이 아니었다. 강경진이 올댓스토리에 대비하려는지 1팀에 신입 직원을 무더기로 뽑았고, 그로 인해 바로 옆 팀인 우리 2팀의 분위기 역시 어수선했으니까.
“시간 차~암 빠르다. 벌써 연말이 다 되가네.”
“팀장님. 우린 신입 안 뽑아요? 1팀에서 새로 뽑은 직원 수만 해도 우리 2팀보다 많은 것 같은데?”
그리고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주간 회의 시간.
동네 영감 같은 김동현 팀장의 말에 조팟이 툴툴대기 시작했다.
“어허이. 우리 2팀은 소수 정예잖아.”
“언제부터요?”
“어허, 우린 일당백이잖아? 뭘 굳이 더 뽑아? 매출도 아직 1팀보다 높게 유지하고 있으니까, 괜히 어수선하게 연말에 뽑지 말고 내년 초쯤에 인원 충원하자고.”
“뭐, 그러던가요. 연말이라 바빠 죽겠는데 괜히 신입 교육하기도 귀찮고.”
조팟놈이 재미난 소릴 한다.
내가 신입일 때 업무 교육을 담당했던 건 이창윤 매니저였는데? 누가 들으면 지가 뭐라도 한 줄 알겠네?
그런데 지금 나를 웃기는 건 조팟놈보다 더 재미난 말을 하는 우리 김동현 팀장이다.
팀 분위기를 우려해 신입 충원을 미룬다고?
‘아유…… 인간아. 정을 줄 수가 없네 그냥.’
김동현 팀장이 인력 충원을 꺼려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몇 달 후 강경진이 웹툰 법인 설립을 공식화하면 판무 1, 2팀의 총괄 자리가 그의 것이 될 테니까.
그러니 굳이 지금 팀을 키워 관리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기 싫은 거겠지. 뚜껑을 열어 보지 않아도 김동현 팀장의 머릿속이 얼마나 꽃밭일지 훤히 들여다 보인다.
“자, 그럼 주간 회의 시작합시다. 조팟은 우선…….”
주간 회의는 각 매니저들의 담당 작가 연재 일정과 프로모션 관련 이야기로 시작됐다.
별다른 이슈 사항은 없었기에 평소처럼 빠르게 회의가 마무리 되는 듯 했는데.
“아, 맞다. 여러분, 1팀에서 요청이 들어왔는데.”
“엥? 뭔 요청이요?”
“투고작 이번 달이랑 다음 달만 우리가 처리해줄 수 있냐고 업무 협조 요청이 들어왔어. 다들 어떻게 생각해?”
팀장급의 언어는 사원의 언어와 다르다.
어떻게 생각하고 묻는 건 닥치고 하라는 뜻이지. 하지만 반골 기질 다분한 우리 조팟은 그걸 듣고만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
“그게 뭔 개소리에요?”
“조팟?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아뇨. 팀장님 말고 1팀 새끼들이요. 너무 하잖아요? 투고작 분기별로 돌아가면서 담당하는 건데. 그걸 또 왜 저희가 해요?”
BS북의 판무팀은 김동현 팀장의 2팀과 강경진의 1팀으로 나뉘어져 있다.
하지만 이건 회사 내의 구분일 뿐, 독자나 작가들이 이런 내부 사정까지 알고 있진 않지.
그렇기에 메일로 받는 투고작들은 판무 레이블 파이톤의 통합 메일로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걸 1팀과 2팀이 분기별로 번갈아가면서 관리를 하는 식이고.
우리 2팀이 마지막으로 투고작 관리를 했던 건 지난 3분기였던 7~9월. 그리고 조팟이 이렇게 열을 내는 건 조팟놈이 투고작 담당자이기 때문이다.
“지금 1팀 신입만 6명 들어왔잖아. 거기다 파트도 1 파트, 2 파트로 나누고 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하더라고.”
“어쩔? 정신없으면 정신없는 거지. 그게 우리랑 뭔 상관이에요? 쌩판 남인데?”
“에헤이, 말을 또 왜 그렇게 하나? 팀은 달라도 같은 출판 본분데. 다 같은 회사 식구지. 안 그래?”
이미 김동현 팀장의 눈엔 1팀과 2팀이 모두 자기 것으로 보이는 모양. 사정을 모르는 이가 들었다면 아주 배려심 많고 이타심 있는 리더의 모습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아……. 팀장님 진짜 다른 회사 이직 확정됐어요? 근래 들어 진짜 왜 이러세요?”
“어허이! 그런 말 말고, 서로 돕고 삽시다. 투고작 받으면 매출에도 도움 되잖아. 조팟 매출, 말 안 해도 알지?”
“하아…….”
매출을 언급하는 김동현 팀장의 말에 조팟이 미간을 구겼다. 파트장인 그의 매출 실적은 우리 2팀 내에서 최하위권이었으니까.
조팟은 매번 대문호를 계약했다고 입을 털었다.
하지만 막상 유료화만 가면 조팟놈의 담당 작품들은 나락행 직행 열차를 타고 곤두박질쳤기에 김동현 팀장의 매출 언급에 난감할 수밖에 없을 터다.
‘그러니 투고작을 더욱 받고 싶지 않겠지.’
매출이 없으니 투고작을 계약한다면 쉽게 매출을 올릴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신입 매니저들은 할 수 있을 테다. 하지만 투고가 활발한 로맨스와 달리 판무 투고작엔 숨어있는 폭탄의 수가 더 많지.
로맨스와 달리 판무는 최소 200화를 넘는 장편을 써야 하기에 신인 작가들의 경우 절반인 100화도 도달하기 전에 멘탈이 탈탈 털리다 못해 아작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작가 멘탈이 박살 나면 담당 매니저 멘탈도 같이 세트 상품으로 나락 가는 건 다반사고.’
출간하는 작품마다 족족 말아먹고 있는 조팟이 투고작까지 손에 댄다면 그의 실적은 더 박살이 날 게 자명한 사실이다.
“이번 투고작 관리는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렇다고 무능한 놈이 원석을 망치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보여 줄게 조팟아.
투고작은 이렇게 관리하는 거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