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36화 (36/201)

#36화 -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발리에서의 첫날.

우붓에 있는 숙소에 도착하자 LGA컴퍼니 신입 사원들 입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 웬만한 호텔 수영장도 비교도 안 될 정도예요!”

“어디 안 나가고 숙소에만 있어도 좋을 것 같은데요?”

직원들 대부분이 20대여서 그런지 반응 또한 풋풋하기 그지없다.

“좋을 때다.”

“어이구 작가님. 누가 들으면 아저씬 줄 알겠어요?”

수영장 수면 위로 넘실대는 불빛을 보며 꺄르륵 대는 직원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누군가 슬쩍 다가와 말을 건넸다.

이지연이었다.

하긴, 단순히 나이로 치자면 나와 권미현이 가장 어리긴 하니 이상해 보일 수도 있겠네.

그러니 말을 돌려야겠다.

“지연 대표님. 여기 요리사분들이 지금부터 식사 준비 시작하실 거거든요? 다들 짐 정리하고 회의실로 이동하는 게 좋겠어요.”

“경영 팀에서 회의실 세팅 중이래요. 확인하고 바로 이동시킬게요.”

잠시 후, 이지연의 통솔하에 모두가 풀빌라 1층의 회의실로 이동했다. 원래 회의실 용도가 아니라 널찍하게 만든 휴식 장소 같은 곳이지만, 한쪽 벽면에 빔 프로젝트를 쏘니 얼추 회의실 각은 나오는 듯하다.

“음음— 아아아. 이번 워크샵에 참여해 주신 LGA컴퍼니의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아울러 이번에 새로 입사하신 신입 직원분들께 환영의 말을 전하며 LGA컴퍼니의 2014년 워크샵을 진행하겠습니다.”

한여름 날씨에도 정장을 쫙 빼입은 단풍 삼촌의 모습에 신입 직원들이 살짝 긴장하는 얼굴이었지만, 단풍 삼촌은 특유의 입담으로 사회를 진행해 나갔다.

발표는 디자인 본부, 경영 본부, 출판 본부 순서로 진행됐다.

“디자인 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지연 대표입니다. 저희 디자인 본부의 금년 실적과 진행 상황 그리고 4분기와 후년 목표에 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포문을 연 이지연은 현재 공식적인 LGA컴퍼니의 대표로서 연설의 포문을 열었다.

이번 신규 채용을 포함해 디자인 본부의 직원은 총 열둘. 사실상 LGA컴퍼니 소속 절반 이상이 디자인 본부 소속이었기에 이지연의 어깨는 무거울 터였다.

“디자인 본부 산하엔 두 파트로 구분된 웹툰 본부 그리고 이번에 신설된 일러스트 본부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일러스트 본부의 경우 처음엔 저희 LGA 소속 작가님들의 작품 위주로 진행을 하겠지만…….”

이번에 신설된 일러스트 본부에서는 일러스트 표지 삽화와 타이포 그리고 각종 플랫폼에 제공하는 배너 제작을 담당하게 됐다.

BS북 양아치 새끼들처럼 불법 크랙 포토샵으로 편집자들한테 포토샵 업무까지 주먹구구로 시키는 일은 없게 할 테다.

그렇다고 일러스트 본부를 신설한 건 단지 업무 분담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만 있는 건 아니었다.

‘표지만 보고 홀린 듯 들어와 읽는 독자들도 많으니까. 무시할 수는 없어.’

사실 나는 글을 읽을 때 표지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다고 해서 다른 독자도 같을 거라고 예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이제 앞으로 몇 년만 지난다면 인기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예약이 1년 정도는 꽉 다 차 있는 경우도 허다하게 될 거다. 본격적인 웹소설의 부흥기가 오는 그때가 되면 일러레들의 몸값이 상당히 귀해질 테니까.

판무와 달리 단행본 위주가 많은 로맨스 작가들의 경우엔 표지가 더욱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원하는 일러레의 일정에 맞춰 런칭일을 뒤로 늦추는 일도 생기게 될 거고.

‘일러스트 본부 덕분에 이제 그런 일은 없겠지.’

물론 드래곤 소속 작가들이 LGA컴퍼니의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아닌 더 실력 좋은 일러스트레이터들에게 표지 제작을 맡게 하고 싶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저런 당찬 눈빛으로 디자인 본부의 포부를 설파하는 이지연을 보면 그림 실력으로 어디서 꿀리는 일은 없게 할 게 분명하다.

‘이지연은 내가 실력으로 온전히 믿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이지연은 내년 사업 계획 발표에서 일러스트 본부는 단순 표지 제작뿐만이 아니라 이모티콘 사업도 함께 진행할 거라는 포부를 직원들에게 밝혔다.

업무상 저작물이라 회사 저작권으로 귀속되지만 성과에 상응하는 인센 지급 발표를 밝히니 직원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아졌다.

돈이 삶의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여러 문제를 해결해주는 거의 만응에 가까운 종합 솔루션이지.

“저희 경영 전략 본부에선 해외 플랫폼 사업 진출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어진 단풍 삼촌의 사업 계획 발표에선 LGA컴퍼니의 플랫폼 사업 진출을 명시했다.

국내도 아닌 해외 플랫폼 사업 진출이라는 말에 직원들은 반신반의하는 표정.

하지만 단풍 삼촌은 보여줄 것이다.

직원들은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단풍 삼촌은 말뿐인 사람이 아닌 성과로서 보여주는 사람이니까.

“모두 알다시피 현재 출판 본부엔 판무 레이블 드래곤만 있는 상황입니다. 출판사에 로맨스 레이블이 따로 없는 게 의아하겠죠. 로맨스 쪽에서 생기는 수익도 결코 적지 않으니까요.”

마지막 연설을 맡은 권미현은 비교적 긴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좋은 작품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좋은 작가님과 공정한 계약을 체결해 상생해 나가며 드래곤과 LGA컴퍼니의 선한 영향력을 펼치는 데 주안점을…….”

이지연이나 단풍 삼촌은 나름 사회 짬이 있었다. 하지만 권미현의 경우 아직 내로라하는 실적도 그리고 지금처럼 여러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었을 테니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많이 떨릴 텐데, 고맙네.’

사실 내가 해야 할 일을 권미현이 대신 하는 거기에 고마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공존한다.

‘원래 강하게 커야지 더 발전하는 거 아니겠어?’

권미현 본부장의 말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주눅 들지 않았고, 그녀가 장을 맡은 출판 본부의 향후 방향성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명확해졌다.

돈 되는 글보다 사람 냄새가 나는 글.

휘발되는 일회성 글이 아닌 울림 있는 글.

비록 계약이 타 출판사보다 신중하기에 늦어질 수도 있지만 LGA의 직원들처럼 모두 활자 속의 세상을 진정으로 즐기는 작가들 위주로 계약하겠다는 권미현의 당찬 포부를 들으니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렇다고 계약이 너무 느려서는 안 되는데.’

사람 마음이 간사한 게, 대표가 되니 저런 아름다운 말이 살짝 무섭게 느껴지긴 한다.

‘괜찮은 작가 못 찾았다고 영원히 작가 계약을 하지 않는 일은 없어야 하는데…….’

믿습니다 미현 본부장.

“작가님도 한 말씀 하실래요?”

“됐어요. 식사 준비도 다 됐는데 얼른 밥이나 먹죠.”

옆자리로 다가온 이지연이 슬쩍 내게 물었지만 바로 거절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소속 작가일 뿐. 이번 첫 워크샵 만큼은 온전히 직원들이 단합하는 순간이 되기를 바라니까.

“자! 출판 본부장님의 후년 사업 계획 발표를 마지막으로 이번 LGA컴퍼니의 공식 첫날 일정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들 조별로 이동해서 식사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첫날 공식 일정이 진행되는 동안 야외에 차려진 음식들. 밝은 조명 아래서 반짝이는 수영장 수면 뒤로 블록처럼 깔끔하게 조경된 논밭의 벼가 여름 바람에 산들거린다.

“그아하하하! 술은 넘쳐나니까 다들 마음껏 마시라고!”

“본부장님, 한잔 더 받겠습니다!”

“가아하하! 마셔잇!”

처음 식사 자리에 앉았을 때만 해도 다들 사회생활 모드로 눈치를 보던 직원들도 단풍 삼촌 특유의 친화력으로 점점 풀어지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LGA컴퍼니의 전체 직원 수는 18명. 임원진들과 사원들 모두 대화를 나누고 웃고 떠들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중소 기업만의 특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운 분위기다.

“저…… 노원지귀 작가님.”

“예?”

“제가 작가님 글 진짜 팬인데…….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옆자리에 앉은 신입 사원이 말을 걸었다.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니 단풍 삼촌 밑에서 업무를 보조하기 위해 뽑은 경영 본부 이준석 매니저다. 살짝 까무잡잡한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과 코가 사내다운 맛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럼요. 마음껏 물어보세요.”

“그게……. 혹시 저희 본부장님이랑 혁작생 주인공이랑 같은 분 아니죠?”

“제 글 제대로 안 읽으신 거 아니에요? 이름 빼고 얼굴 묘사부터 완전히 다른데?”

“캬하하핳! 그렇죠? 어쩐지.”

이준석 매니저가 이렇게 배꼽을 잡고 웃는 건 노원지귀 필명으로 연재 중인 ‘혁명적인 작가 생활’ 주인공 이름이 단풍 삼촌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거 신입 사원이 안 되겠구만 기래. 입사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본부장 뒷말을 하디?”

“죄……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작가님도 옆에 계셔서 궁금한 마음에 여쭤본 거였는데. 제가 실례를—”

“그아하핫! 장난도 못 치겠네.”

“흐흐흐. 장난이실 줄 알았습니다.”

이준석 매니저는 눈치가 상당히 빠른 사람이었는데, 분위기를 맞추는 재주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아니, 노원지귀 작가님. 그래도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이랑 저랑 이름만 같다니 그건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아주 시작 부분부터 똑같구만?”

대체 어디가?

도무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단풍 삼촌을 바라보자, 삼촌은 소설피아에 화면을 띄워 내 글 프롤로그 부분을 소리 내 읽기 시작했다. 것도 북한 현지인 발음으로.

혁명 위업의 계승자.

북조선에선 오직 백두혈통만이 혈통적 우수성이 있다고 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디.

타다닥! 탁!

어둠이 짙게 깔린 강원도 고성의 최전방.

나는 3미터 높이의 이중 철책을 향해 질주했다.

“흡!”

추진력을 반동으로 철책 기둥을 밟아 오른 뒤, 철책 상단의 원형 철조망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아무런 경보도 안 울린다라……. 노크라도 해야겠구만 기래.”

혹한의 추위에 땅도 마음도 얼어붙어 있던 그 날. 나는 북을 탈출했다.

자본주의에 물든 세계, 자유의 땅으로.

“에에이! 말도 안 돼요! 본부장님 키가 190은 되 보이시는데, 철조망을 어떻게 뛰어넘어요?”

“그아하하. 가짜를 진짜같이 만드는 것. 그게 소설의 힘이디.”

당연히 가짜지.

단풍 삼촌은 총상까지 입어가면서 훨씬 더 위험한 루트로 탈북했으니까. 눈을 찡긋거리는 단풍 삼촌을 보니 대충 넘어가라는 눈치인 것 같다.

첫날 밤이 무르익으면서 잘 사람은 자고 단풍 삼촌과 몇몇 이들은 안에서 카드 게임을 하면서 술판을 벌이느라 다들 텐션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다.

그리고 나는 하늘거리는 벼와 잔잔히 살랑이는 수영장 수면 위에 걸린 달빛을 보며 글을 적어나갔다.

타다닥— 타닥—

인적 드문 곳이어서 늦은 밤 같이 느껴질 뿐이지, 아직 시간은 10시도 안 됐으니까.

“세상에……. 누가 작가 아니랄까봐. 여기 와서도 글 쓰세요?”

담배를 피러 나온 권미현이 야외 테이블에서 글을 쓰는 나를 보며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글 써야지 여기 있는 분들 다 먹여 살리죠.”

“치, 그런 고민 안 하도록 더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해요. 그래야 내 주머니도 두둑해지지.”

“어유. 벌써 사장님 다 되셨네 그냥.”

그동안 좀 친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술기운이나 분위기 때문인지 평소보다 권미현의 표정이 다양해진 것 같다.

“그거 아세요? 사실 저도 글 쓰고 싶었어요.”

슬쩍 앉은 권미현이 담뱃불을 붙이며 말이 놀라웠다. 처음 듣는 얘기였으니까.

“글이요? 장르는 뭘로?”

“원래는 판타지 쓰고 싶었어요. 제가 해리포터 덕후거든요. 그러다가 회사 생활 하면서 회사물 써볼까 생각하긴 했죠.”

“회사물이요?”

“BS북 매니저 생활 하면서 겪은 좆같은 새끼들 글에서 다 까버릴 수 있잖아요. 조팟새끼 실명으로 박제해버리고요.”

권미현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그렇긴 하죠. 어느 회사든 병신 불변의 법칙 이란 게 있잖아요. 직장 생활 하면서 피할 수 없는 그런 또라이들 얘기를 어디 가서 풀 수도 없는데 글에는 그런 걸 다 풀 수가 있으니까.”

“역시, 나만 그런 생각 하는 거 아닐 줄 알았어.”

“그런 사람들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캐빨 좋다고 하는 댓글 달리면 그런 생각 들어요. ‘아, 글을 쓰니까 이런 새끼도 내게 도움이 되는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요.”

권미현은 그 말이 공감됐는지 연기를 빠르게 뿜어내며 피식댔다.

“미현 씨, 글 쓰는 거 욕심나면 언제든 말해요. 바로 옆에 전문가가 있는데 다른 사람한테 배울 생각 말고.”

“아니에요. 전 정우 씨처럼 그렇게 못 해요. 해외 나와서도 글 쓰고 그런 거.”

“왜 못 해요? 글 쓰는 건 운동이랑 같은 거예요. 글근육만 붙으면 누구든—”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반짝이는 눈으로 못 쓸 거 같아서 그래요.”

내 눈이 반짝인다라?

이상한 말을 내뱉는 걸 보니 권미현은 왠지 취한 것 같다.

“그리고 정우 씨 같은 작가님들. 그런 사람들이 그 빛을 잃지 않도록 함께 돕는 일을 하는 게 더 좋아요. 옆에서 계속 설레고 싶으니까요.”

평소에는 잘 안 취하더니만.

모닝케어라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카톡이 울렸다.

—사랑과평화/다판: 노원 작가님

—사랑과평화/다판: 쪽지 보냈고 지금 시간 다 나오게 캡쳐도 해뒀어요

—천명 작가님: 나는 내일 보내보겠소 홀홀

사평, 천명 작가님과 셋만 따로 있는 단톡방.

사평 작가가 첫 번째 함정을 던졌다.

발리에 온 첫날.

내 입꼬리가 올라간다.

벌써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

‘기대할게 강경진. 열심히 삭제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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