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기분이 중요한 거잖아?
강경진이 입사한 지 얼마 안 지나 사평 작가가 그와 신작 계약을 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아무리 1팀과 2팀이 다르다고 해도 바로 한 팀 건너 있는 팀 이야기가 들리지 않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 팀엔 BS북 공식 토렌트인 조팟놈도 있었으니까.
“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핸드폰을 꺼내 보여 준 사평 작가의 계약서가 얼마나 불공정한 부분이 많은지 요목조목 집어서 설명해줄수록 그의 얼굴에서 실시간으로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분명……. 작품 계약을 했는데?”
“앞서 설명드린 것처럼 계약서상에는 이번 작품 선인세를 못 까면 다음 작품에서 까게 되는 작품계약이네요. 그것도 오 년 전속으로요.”
“오…… 오 년?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내 말에 거짓은 없다.
미리 나스 폴더에서 확인한 내용이었지만, 이를 다시 설명하는 나도 열이 뻗치긴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닙니다. 계약 해지 시 선인세 3배 반환 조건도 걸려 있어서 해지도 쉽지 않을 겁니다. 나머지는 앞서 다 설명드렸고요.”
백지장처럼 새하얗던 그의 얼굴은 어느새 끓는 주전자처럼 붉어졌다. 그럴 만도 하지.
한우석 팀장에서 강경진으로 담당자가 바뀌자마자 대놓고 이런 사기가 자행된 거니까.
사평 작가의 전 담당자였던 한우석 팀장 역시 용호상박의 양아치긴 했지만, 강경진과는 그 결이 달랐다.
한우석 팀장의 경우엔 매출이 잘 나오는 탑급 작가들 외엔 계약을 하든 말든 그러려니 냅두는 방치형 스타일. 반면 강경진은 사자가 토끼 사냥을 하듯 실적이 잘 나오지 않는 작가라 할지라도 최선을 다해 잡아먹는다.
BS북의 터줏대감인 사평 작가의 계약서에도 이런 식으로 장난질을 치는데 강경진이 계약한 신인 작가들은 더 심한 꼴을 당했을 건 불 보듯 뻔한 일.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이 다 있어! 내가 지금 당장—”
“진정하세요 작가님.”
화를 삭이지 못한 채 당장이라도 강경진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려는 사평 작가를 말렸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화내시는 게 당연하지만, 강경진 팀장은 상당히 영악하고 위험한 사람입니다. 작가님께서 증거 자료가 없으시다면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아니고요.”
“내가 몰랐다면 몰라도. 이렇게 다 알게 된 마당에 바보처럼 가만히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사랑과평화라는 그의 필명과 달리 사평 작가의 얼굴에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는 분노만 가득했다.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매출을 잘 내는 작가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건 명백히 사기 아닙니까? 사기를 당했는데 어떻게 계속 계약을 유지해요!”
그 말을 기다렸다고요 작가님.
계약 파기를 하고 싶다는 그 말을.
“맞는 말이죠. 하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작가님 혼자서는 계약 파기를 진행하기가 어려운 상황일 겁니다. BS북으로부터 피해를 본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힘을 합치는 게 아니라면요.”
“세상에……. 다른 피해자가 또 있다는 겁니까?”
“BS북과 오랜 기간 함께해주신 사평 작가님께도 이런 장난을 쳤는데, 다른 작가들 중에 피해자가 없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 아닐까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미 BS북에 사기 계약이 판치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웹소설 출판 업계 1위라는 이름이 우스울 정도로 BS북은 최신 시스템과 거리가 멀게 온갖 자료들이 직원 누구나 접근 가능하도록 관리되고 있다.
KMS(지식관리시스템)도 구축되어 있지 않아 동네 구석에 하나둘 있는 소규모 좋좋소와 별반 차이 없이 느려터진 나스에 모든 내용을 다 공유하기 때문이지.
운영팀, 등록팀, 판무팀 등 각 팀별로 구분된 폴더에 여러 파일이 쓰레기장처럼 들어가 있으니 툭하면 오류가 생기기 일쑤다.
그리고 이 지옥 같은 BS북의 업무 시스템이 되려 나에겐 기회가 됐다.
일본 정부 수준으로 페이퍼 워크를 고집하는 BS북은 대부분의 계약서도 전자 계약서가 아닌 실물 계약서로 진행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단지 대표가 전자 계약서에 익숙하지 않다는 같잖은 이유로 말이야.’
하여간 이런 이유로 인해 출판 본부 매니저들 사이에서 전자 계약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이는 나와 강경진 둘뿐이다.
나는 코즈일이란 S급 작가를 물어와서 꿀릴 게 없고 강경진은 성골이라 말 그대로 언터쳐블인 존재였으니까.
판무 1, 2팀과 로맨스팀 등의 출판 본부 매니저들은 신작 계약을 진행할 경우 계약서 초본을 무조건 나스에 파일을 넣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스 폴더 내의 경영지원팀이 관리하는 계약서 전송 폴더에 작가의 개인 인적 사항이 모두 적인 계약서를 올려 두고 이걸 경영지원팀에서 전자 계약서로 만들어 작가에게 전달하는 식이다.
문제는 일 처리가 유럽 공무원 수준으로 느려터진 경영 지원팀에 있다. 경영 지원팀은 계약서를 매주 금요일에 몰아서 보내기 때문이니까.
‘나스 폴더에 강경진 새끼가 올려둔 신작 계약서는 이미 다 살펴봤다는 거지.’
물론 이런 내부 사정까지 말해선 괜히 논지가 흐려질 수 있는 노릇. 그러니 잡다한 사실은 깔끔히 싹 다 빼고 사평 작가가 이해하기 쉽게 돕기로 했다.
“사실…… 제가 그 다른 피해자입니다.”
“뭐, 뭐라고요? 아니…… 노원 작가님도 사기를 당했다는 겁니까?”
“제 경우엔 사기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피해를 본 건 확실하죠. 제 쪽지함의 메시지를 삭제한 게 강경진 팀장이라는 걸 저는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내 설명에 작가들은 조금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고 사평 작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원 작가님. 아까 BS북에서 쪽지함을 볼 수 있는 건 담당 매니저와 운영팀 그리고 경영지원팀뿐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죠.”
“담당 매니저는 작가님 본인이니 아닐 테지만 그렇다면 결국 범인은 운영팀 아니면 경영지원팀 쪽에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강경진 팀장은 판무 매니저니까요. 그리고 쪽지를 작가 몰래 지운 게 잘못된 거긴 하지만 그걸 계약 위반이라고 하기에는…….”
사평 작가의 말이 맞다.
내 쪽지를 몰래 지운 걸 BS북에 항의한다면 BS북 측에서도 운영팀이나 경영지원팀 탓으로 몰고 갈 게 분명하지. 마치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는 것처럼.
하지만 나는 확신한다.
이런 양아치 짓을 하는 건 강경진이라는 것을.
그리고 강경진이 한 행위는 단순한 양아치 짓이 아니다. 내게는 명백한 계약 위반이지.
“계약 위반 맞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드렸잖아요. 제 글의 담당 매니저. 그게 바로 제 자신이라고요. 제가 코즈일로 계약한 모든 글엔 따로 특약 사항을 넣어 뒀습니다.”
“특약이요?”
내 귀한 글을 BS북에 출간하면서 이 정도의 보험을 안 넣었을 리가 없잖아?
전생에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한데.
나는 BS북과 계약한 내 모든 작품들 그리고 내가 담당하는 작가들의 작품 계약서에도 제13조 비밀유지의무 조항 아래 깨알 같은 글씨로 특약을 넣어 뒀다.
‘BS북’과 ‘작가’가 본 계약이 유지되는 3년의 기간 동안 작가의 동의 없이 소설피아 내서재에 있는 비공개 글을 함부로 확인하거나 유출할 시, 그리고 쪽지함 등에 있는 쪽지함을 열람하는 등 작가의 신뢰를 잃는 행동을 했을 시 계약 기간 만료 전에도 타 출판사로의 작품 이관 및 계약 파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예, 제가 미리 넣어둔 특약 사항 덕분에 계약 위반이 확실시된 상황입니다. 그리고 작가님들께서 도와주신다면 사평 작가님도 BS북과의 불공정 계약을 해지하는 걸 돕도록 하겠습니다.”
“예? 그걸 어떻게……?”
“지금부터 함께 이야기 나눠보시죠.”
* * *
사랑과평화 작가 그리고 천명 작가와 함께했던 불꽃 같은 화요일이 끝나고 벌써 금요일이다.
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
BS북이 아무리 좋좋소여도 법정 공휴일엔 쉬게 해주기에 다른 매니저들은 집에서 쉬고 있을 터. 하지만 나는 꼭두새벽부터 평소보다 더 바쁜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삼촌들! 책상은 창가 가장자리부터 놔 주고 책장은 벽면에.”
“여기?”
“어, 거기. 흑싸리 삼촌 화분 그건 그쪽에 두면 되고. 오동 삼촌! 냉장고는 그쪽 아니야. 좀 더 옆에다 둬죠.”
“아으, 염병할. 귀청 떨어지긋네.”
“도와줄 거면 제대로 해줘야지.”
“우리 정우는 어릴 때부터 참…… 한결같이 싸가지가 없어요, 싸가지가.”
작가님들과 미팅이 있었던 지난 화요일은 9월 30일. 즉 3분기 정산일이었다.
웹월드에서 연재를 시작한 불 지르는 파이어맨은 익익월로 정산일 계약을 수정했다.
하지만 소설피아에서 연재한 두 작품의 매출은 분기별 정산을 받기로 했기에 지난 화요일에 몰아받은 정산금은 상당했다.
‘남성천 단행본 빨리 치기 잘했네. 단행본 수익이 생각보다 쏠쏠하구만?’
코즈일이란 필명으로 가장 처음 출간하고 지난 7월 말 완결을 낸 ‘남작가 성형 천재가 되었다’ 완결이 나자마자 나는 바로 8월 초부터 단행본 일정이 가능하도록 진행했다.
단행본 일정을 이리 빠듯하게 잡은 건 최대한 현금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바로 오늘을 위해서.
“아, 거참. 형님들 날래 좀 움직이라! 인원이 몇인데 일이 끝날 기미가 안 보이나 기래?”
“보채지 말자 단풍아. 감투 하나 썼다고 완장질은, 쯧.”
기존 LGA컴퍼니의 사무실은 내가 사는 오피스텔의 바로 옆집. 하지만 본격적인 사업 확장을 위해선 더 큰 사무실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삼촌들을 동원해 꼭두새벽부터 새로운 사무실 이사를 하는 데 열을 올리는 상황이다.
“얘들아.”
“예, 큰형님!”
“다들 놀러 왔냐?”
“…….”
“우리 정우가 큰일 한다고 개천절, 이 좋은 날에 이사를 하는데. 삼촌이란 새끼들이 입만 털고 있네?”
“……거의 다 끝나 갑니다, 큰형님.”
“……빠르게 끝내겠습니다.
삼촌들과 함께 온 이사 구경을 온 아버지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비록 잔뜩 찌푸린 얼굴이지만 저게 기쁠 때 짓는 표정이라는 걸 난 알고 있지.
“정우는 일로 와보고.”
“왜?”
“말로 할 때 오지?”
“……응.”
아버지의 부름에 아직 정리가 덜 된 사무실 구석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아버지를 마주하면 늘 마른침이 삼켜진다.
다른 삼촌들처럼 얼굴에 칼자국이 난 것도, 귀 한쪽이 잘린 것도 배에 총 자국이 난 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단지 눈만 마주쳐도 압도되는 그런 오라가 뿜어져 나오는 맹수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간만에 보니 더 적응 안 되네.’
마치 언더테이커가 한국인으로 태어나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하는 그런 살벌한 얼굴로 아버지는 회의실 문을 닫고 내게 다가왔다.
‘쫄지 말자. 지금 아버지의 얼굴은 기쁨 그 자체니까.’
마음을 다독이며 마른침을 삼키는 그때, 아버지의 거대한 손이 내 양어깨를 짓눌렀다.
“정우야. 나는 네가 많이 자랑스럽다.”
“……어, 고마워.”
양어깨에 가해지는 감동적으로 아픈 악력을 견디는데, 아버지는 더욱 사악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걱정된다.”
“뭐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랑스럽다며?
“단풍이한테 얘기 들었다. 네가 편집자로 일하는 회사가 바로 코앞이라면서. 나는 그게 걱정이다.”
어깨를 짓누르던 손을 빼 팔짱을 낀 아버지의 모습은 걱정이 가득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럴 만도 하지 아버지의 말대로 LGA컴퍼니가 이사하는 건물은 BS북과 도보로 약 5분 정도 거리. 골목 몇 개만 지나가면 나오는 신축 건물이니까.
“괜찮아 아버지. 원래 출판사들은 대부분 합정이나 파주 쪽에 모여있어. 내가 사는 오피스텔도 바로 옆이라 출퇴근 가까운 곳에서 다니는 게 가장 좋지.”
“정우야. 내가 늘 뭘 가르쳤지?”
“인의를…… 지켜라?”
“그래, 늘 인의를 잊어선 안 된다. 단풍이에게 들어서 대충 그쪽 회사가 어떤 짓을 하는진 알겠지만 늘 인의를 잃지 않고 항쟁의 길로 가면 안 되는…….”
시작됐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한번 시작하면 최소 30분. 길면 2시간도 넘어가는 게 다반사. 하지만 나는 이제 해결책을 알고 있지.
“아버지 여기.”
“이게 뭔…… 이, 이 새끼가 감히!”
고막을 울리는 사자후.
하지만 나는 쫄지 않고 주머니에서 꺼낸 흰 봉투를 아버지의 손에 억지로 구겨 넣었다.
“그동안 잘 키워줘서 고마워 아버지. 앞으로는 효도 많이 할게.”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새끼가…….”
신사임당으로 가득한 두툼한 봉투가 심금을 울렸는지 아버지는 고개를 위로 젖히고 촉촉해진 눈가를 숨기기에 바빴다. 아버지를 조용하게 하는 방법. 그건 돈이다.
‘내년 종소세 때 나갈 세금 미리 주는 거긴 하지만…….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겠지.’
코즈일 필명의 계약은 아직 아버지의 명의로 되어있다. LGA컴퍼니로 나오기 전까지는 한동안 아버지 명의로 나올 수익이 생기는 상황.
내년 5월에 받아야 할 돈을 미리 드린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뭐든 기분이 중요한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