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제가 확인해드리겠습니다.
“안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되십니다.”
“감사합니다.”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간 방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곳엔 무협 코스프레를 한 중년 할저씨와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아저씨가 보였다.
“허허! 만나 뵙게 되어 기쁘기 그지 없……”
“형. 장난 좀 치지 마. 처음 뵙는 자리에서, 쯧. 안녕하세요 작가님. 사랑과평화라고 합니다. 이쪽은 천명 작가님이시고요.”
천명 작가와 독대했던 단풍 삼촌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는지 감이 잡힌다. 사평 작가라는 브레이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노원지귀입니다.”
“반갑습니다. 앉아서 얘기 나누시죠.”
“하하하, 반갑습니다.”
천명 작가와 사평 작가를 이 자리에서 보기로 한 건 다름 아닌 소설피아 쪽지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코즈일 작가님도 오신다고 하셨는데. 조금 늦으시나 봅니다?”
“아 거참! 퇴근하고 오신다니까 좀 늦을 수도 있지.”
“묻지도 못하냐 인마?”
서로 티격대는 모습을 보니 천명 작가와 사평 작가는 온라인상에서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많이 친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리 말씀을 못 드렸네요.”
“아이고, 코즈일 작가님은 못 오시나 보군요?”
내게 묻는 천명 작가의 얼굴에서 살짝 실망한 기색이 어렸다. 사평 작가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걱정 마십쇼 작가님들.
코즈일은 왔으니까.
“아뇨.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제가 코즈일입니다. 노원지귀가 새로 만든 필명이고요.”
“……예?”
“……뭐, 뭐요?”
작가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놀랄 만도 하지. 코즈일과 함께 나오겠다는 말만 했지 코즈일이 나라고 밝히는 건 지금이 처음이니까.
사실 많이 고민됐었다.
내가 코즈일인 걸 밝혀도 될지 아닐지를.
작가방에서 이들과 함께 한 고작 2주 정도의 시간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이 만남을 강행한 건, 회귀 전에도 사평 작가들은 후배 작가들을 돕는 좋은 작가로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사실과 실제 사평 작가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난 2주간 작가방에서 함께 봐온 그는 상당히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었다.
천명 작가 역시 컨셉에 잡아먹혀 말투가 좀 이상하고 오지랖이 좀 많은 걸 빼면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었으니까.
‘회귀 전에도 별다른 이슈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야아하하하! 어쩌언지! 아니 신인 작가라고 하기에 글을 너무 미친 듯이 잘 쓰시더라고!”
“허허, 우리 작가방에 노원지귀, 코즈일 작가를 다 모신 거나 마찬가진데. 정말 영광입니다.”
“진작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작가님들.”
그럼에도 나는 사실상 남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에게 코즈일이 나란 걸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회는 나로서는 최대 3년은 단축시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였으니까.
“아니…… 와……. 그럼 누가 고의적으로 쪽지를 삭제했다는 말이에요? 노원지…… 아니 코즈일 작가님이 삭제를 한 것도 아닌데?”
“네, 누군가 고의적으로 쪽지를 삭제한 게 분명합니다.”
소설피아에 코즈일 아이디로 로그인한 후 나는 그들이 모두 보는 자리에서 쪽지함을 계속 스크롤 하며 보여줬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사평 작가가 보냈다는 쪽지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오늘 모임은 단순한 친목 도모로만 알고 있던 그들이었고, 나와 같이 BS북 소속인 사평 작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벌써 놀라선 안 되지.
아직 본론은 시작도 안 했으니까.
“작가님께서 알고 계실 진 모르겠지만, 원래 소설피아 계정 공유는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처음 계약 당시부터 다 알려달라고 했었는데?”
사평 작가의 얼굴에서 사랑과 평화는 이제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건 기괴할 정도로 문드러진 얼굴뿐. 전생의 나도 BS북과 첫 계약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이게 잘못된 건지 파악조차 못 했던 일이다.
“소설피아와 CP 계약을 맺은 출판사가 CP 계정으로 유료 신청을 한다면, 월말에 소설피아가 정산 내역을 작품별로 보여줍니다. 즉 소설피아에 연재할 원고를 작가님께서 매니지에 대신 올려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매니지에서 작가 계정을 확인할 필요도, 아니 확인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죠.”
“아…… 아니. 그게 정말입니까? BS북에선 소설피아 정산액이랑 오차가 있을 수 있어서 정산 시 확인이 필요하니 꼭 알려줘야 한다고 했는데?”
‘당황하실 만하지. 시스템이 이따위로 굴러가는 게 나도 어처구니없다고 느꼈으니까.’
BS북 입사 초기 내 글을 BS북에 계약하면서 김동현 팀장에게 들었던 말이다. 과거로 회귀한 나는 작가 계정을 따로 받아야 한다는 말이 개소리인 걸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김동현 팀장은 소설피아 유료화 시 그렇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교육을 담당했던 이창윤 매니저도 그렇게 알고 있고. 윗물이 썩으니 아랫물도 구려지는 게 당연한 거겠지.’
마이크로 익스프레션으로 읽었던 이창윤 매니저의 표정에 거짓이 없는 것으로 보아 윗선인 김동현 팀장, 아니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시스템 구축을 요청한 경영지원팀 팀장이나 오성민 대표로부터 하달된 일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경영지원 팀장이나 대표가 쪽지를 삭제했을 리는 없어.’
엑셀 만능주의 신봉자 경영지원팀 팀장은, 없는 일을 만들어서 하는 식이다. 매일 같이 쓰잘데기없는 페이퍼 워크에 깔려 있는 그가 한가하게 쪽지를 뒤질 리는 없다.
그리고 그건 주 3회 이상을 미팅 핑계로 필드를 도는 오성민 대표 역시 마찬가지고. 정황상 범인은 강경진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물론 BS북 매니저들이 작가님들의 소설피아 계정을 안다고 해서 그걸 뒤지거나 작가님들의 비공개된 작품이 있는 내서재까지 뒤져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럴 시간적 여유도, 이유도 없으니까요.”
“참나……. 어이가 없어서 원. 이걸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지…….”
대부분의 매니저들은 다들 할 일도 많고 관리할 작품도 많기에 작가들의 쪽지함이나 작가들의 비공개된 작품을 볼 수 있는 내서재까지 뒤져보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이 역시도 장담은 못 하지.
조팟놈이 담당 작가가 다른 출판사와 계약한 작품을 고작 100원 쓰는 게 아깝다고 소설피아 작가 계정으로 들어가 몰래 읽는 경우도 있었다.
‘조팟놈이 그런 새끼지.’
하지만 지금은 이걸 저격할 때가 아니다.
오로지 내 저격의 타겟은 강경진에게 맞춰져야 하니까.
“게다가 매니지에서 작가 계정을 아무나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고요. 매니지마다 다르겠지만 BS북에서 작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아는 건 단 셋뿐입니다. 작가의 담당 매니저, 운영 본부 매니저들, 경영지원팀이 되겠네요.”
설명을 듣던 사평 작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작가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쪽지를 삭제했다는 게 충격적이긴 한데……. 그렇다면 누가 삭제했는지 모른다는 말 아닙니까? 코즈일 작가의 담당 매니저가 했을지 아니면 운영 쪽 매니저나 경영지원팀에서 했을지도?”
“담당 매니저는 절대 아닙니다. 운영 쪽이나 경영지원팀도 아니고요.”
확신에 찬 내 말에 사평 작가는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무슨……? 아이디를 아는 사람이 그 셋 말고는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 그런데……. 작가님은 그걸 다 어떻게 아십니까? 내가 알기로 BS북에서 나보다 오랜 기간 계약한 사람은 딱히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평 작가의 눈에서 나를 향한 의심의 눈초리가 쏘아졌다. 그럴 만도 하지. BS북의 터줏대감인 그도 내부 사정을 이토록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 추가 설명이 필요하겠네.
“제가 담당 매니저니까요.”
“……매, 매니저?”
“제 본명이 박정우입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들에게 설명 대신 명함을 건넸다. BS북 판무 2팀 매니저 박정우라고 또박또박 쓰여져 있는 내 명함을.
“우와아아아아니! 와? 오늘 진짜 여러 번 놀라네?”
“허허, 우리 작가방에 코즈일, 노원지귀 작가님하고 편집자님도 계시다니. 이거 정말 영광—”
“형은 쫌! 아까부터 뭔 영광을 그리 찾아! 아니 작가님. 아니…… 뭐라 불러야 합니까?”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죠.”
“예, 그럼 노원 작가님. 원래 편집자신 거세요?”
훅 들어온 질문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가 고민이 된다. 회귀까지 따지자면 작가가 먼저였던 거고. 현생 기준으로 하자면…….
‘그래도 작가가 먼저 아닐까?’
취업 전에도 글 쓰긴 했으니까.
지금 상황에선 모양도 그게 더 좋아 보이고.
“아뇨, 원래 본업이 작가입니다. 매니저로는 작가 생활하면서 시작하게 된 거고요.”
사평 작가가 아직 놀란 게 진정이 안 됐는지 얼빠진 표정을 지었고, 천명 작가는 왜인지 모르게 가자미 눈으로 나를 흘겼다.
“흠……. 근데 작가님께선 매니지에 왜 입사하신 겁니까?”
나를 향한 불신이 가득 담긴 질문이다.
비록 형색은 괴상망측했지만, 역시 연륜에서 나오는 짬밥은 무시 못 하는 법이지.
그의 눈빛은 내가 출판사에 음습한 욕망을 가지고 산업 스파이처럼 일부로 입사한 게 아니냐고 따지는 듯한 눈빛이다.
‘정확히 봤네. 그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대답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다 까놓고 말하자면 회귀 전에 강경진 그 씹새끼한테 뒤통수 후두려 맞아 개 호구같이 1:9 계약에 표지 일러도 내가 제작하고 위약금은 총 매출의 2배나 물리는 지옥 같은 계약을 한 호구라 위장 취업을 한 거긴 한데.
‘내가 회귀했다고 밝힐 수는 없잖아?’
그러면 피해자 코스프레하는 수밖에 없지.
그게 간단하니까. 나는 혀를 강하게 깨물며 눈물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작가님……. 작가님들도 아실 겁니다. 작가로 자리 잡기가 정말 쉽지 않다는 걸요.”
갑자기 웬 신세한탄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라고 묻는 듯한 작가들의 눈빛이 나를 향해 쏘아졌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흐린 눈을 유지한 채 말을 이어나갔다.
“코즈일이란 필명으로 제가 첫 작품부터 잘됐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신인연재, 보통연재 코너에서 제가 수도 없이 연중을 했다는 걸 아시는 독자님들은 없을 겁니다. 아마 작가님들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아…….”
둘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연달아 흘러나오는 걸 보니 대충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감을 잡은 모양이다.
“제가 코즈일로 첫 유료화를 성공한 남작가 성형 천재가 되었다를 쓸 때만 해도 저는 확신이 없었죠. 제가 글로 먹고사는 글먹 인생을 살 수 있을지를요. 그래도 글이 너무 좋아서! 글이 없는 활자의 세계에서는 도무지 살 자신이 없어서! 사랑해서! ……그래서 작가의 꿈을 포기하자는 생각으로 편집자 면접을 보게 된 거였습니다.”
“아앗…….”
“이런, 쯧…….”
천명 작가는 감수성이 많은 할저씨.
그리고 사평 작가는 신인 작가 시절 많은 고생을…… 그리고 지금도 노가다를 뛰면서 고생 중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어느새 그들의 눈가는 촉촉해졌다.
이제 예열은 끝난 모양이다.
그럼 본론에 들어가야지.
“인풋하면서 읽은 글은 많았기에 운 좋게 BS북에 입사할 수 있었죠. 그리고 정말 더 큰 운이 따랐는지 남작가 성형 천재가 되었다가 좋은 성적을 거둬 제가 직접 계약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아우, 정말 잘됐네. 정말 다행—”
“하지만!”
갱년기에 진입한 아저씨들답게 쓰잘데기 없는 공감 능력을 발휘하려 했지만, 나는 단칼에 끊어냈다. 맞장구 따윈 내게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편집자 생활을 하면서 저는 큰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죠. BS북의 편집자들이 작가 계약서에 장난을 치거나 작가들에게 의도적으로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거나 하는 식으로요. 하지만 두 분 다 아시다시피 사회 초년생인 제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 고졸에 고아원 출신인 집도 백도 아무것도 없는 스무 살 사회 초년생이요.”
“아니……. 아…….”
“아이고야…….”
‘미안해 아버지, 삼촌들.’
삼촌들과 아버지의 극진한 보살핌에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남부러울 거 하나 없이 풍족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삼촌들과 아버지에겐 미안하지만 감정 호소를 놓칠 순 없는 노릇이니까.
“정글북이라는 카페도 그런 이유로 제가 만든 거였습니다. BS북이라는 거대한 공룡 앞에선 제 힘이 너무도 미약했기에, 제가 담당하는 작가님들은 몰라도 다른 매니저님들 특히 직급이 저보다 높은 분들의 잘못된 계약을 제가 아무리 목소리를 내도 어찌할 수가 없었기에, 크흡…….”
미간을 찌푸리며 잠시 눈에서 즙을 짜주고.
이슬이 찔끔 맺힌 것을 느끼며 나는 촉촉해진 눈가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정글북에서 출판사와 관련해 아는 정보를 공유하면서 피해자가 없기를 바랬죠. 그런데……. 제가 다른 작가님들을 챙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와중에도 강경진 팀장, 아니 BS북은 제 쪽지를 함부로 삭제하더군요.”
“허우……. 참, 기성 작가가 되어서 미안합니다. 신인 작가님들이 이런 고생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몰랐으면 됐습니다.
도움은 이제부터 주시면 될 일이니까.
“아니 잠시만요. 노원 작가님 좀 전에 분명 강경진이라고……. 쪽지를 삭제한 게 강경진 편집자님이란 말입니까? 제 담당인 강경진 판무 팀장님이요.”
“아……. 제가 말실수를…….”
“아니, 이렇게 된 거 편히 말해 봐요. 우리가 어디 가서 말할 사람들도 아니고. 강경진 편집자 그 사람이 내 담당자이긴 한데, 잘못된 거는 잘못된 거니까.”
너무 물 흐르듯 말해서 알아채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네.
예열은 끝난 거 같고.
방 안에 후끈한 김이 서리는 게 느껴진다.
이제야 진솔한 대화가 가능한 시간이 됐다.
내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후…….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까요.”
우리 셋이 있는 곳은 단독 방임이 분명했음에도 나는 PTSD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마치 강경진이 주위에 있다는 듯이, 겁먹은 모습으로 두리번거렸다.
“판무 1팀의 강경진 팀장님은……. 아마 사평 작가님의 계약서에도 해선 안 될 짓을 했을 겁니다.”
“뭐, 뭐요? 내 계약에?”
이미 출발하기 전에 계약서를 확인하고 왔지.
무슨 장난질을 쳤는지. 사평 작가가 그걸 알면 기겁할 거다. 공략은 원래 약한 부분부터 파고드는 거니까.
“작가님 전자 계약서 메일로 수령한 거 있으시죠? 저와 함께 봐보시죠. 제가 확인해드리겠습니다.”
기다리라고 강경진.
통수에는 통수로 보답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