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작가방?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잘 들어가고 내일 보……아니, 뭘 저렇게 뛰어?”
“뛰고 싶겠죠. 지옥에서 벗어나는데.”
“그렇긴 하네. 나도 뛰고 싶다. 기운만 있으면.”
“저도요.”
퇴근 카드를 찍자마자 나는 숨도 참아가며 집으로 내달렸다. 헉헉대며 집에 도착한 후 바로 소파에 뛰어들듯이 누워 가장 편안한 자세로 자리를 잡았다.
흥분해서인지 아니면 뜀박질 때문인지 두근대는 마음을 가까스로 잠재운 후, 나는 폰을 꺼내 단풍 삼촌이 보내 준 원고를 켰다.
“미쳤다 진짜! 천명 작가 신작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하렘물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천명 작가의 글은 재밌게 읽었었다.
‘솔직히 천명 작가 문체가 수려한 것도, 내용을 깊이 있게 쓰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남들보다 트렌드를 훨씬 빠르게 앞서가고 클리셰를 박살내는 점에서 그의 글은 읽는 재미가 상당했다. 그게 내 추억 속 천명 작가의 글이었다.
‘제목이…… 호주천마? 천마가 호랑이라도 타고 다니는 건가?’
아직 퇴고 전이라 감안하고 봐 달라며 보내온 5화 분량의 따끈따끈한 신작 원고. 회귀 전에도 천명 작가는 신작을 발표한 적이 없었기에 지금의 두근거림과 설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짧은 날숨을 뱉은 후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신작 원고 파일을 열었다.
#1화 – 서장(序章).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였다.
죽음과 배신이 난무하는 강호.
이곳은 내게 놀이터였다.
우두둑.
“다음.”
구십 도로 꺾어 뜯어낸 목을 팽개치고 다음을 외쳤지만, 더 이상 놈들은 달려들지 않는다.
발길을 내딛는 것처럼, 술잔을 비우는 것처럼.
삶의 온기를 앗아가기란 이리도 쉬운 일이다.
백이 넘는 심장을 뚫고, 천이 넘는 목을 뽑았다.
어느새 만들어진 시체의 산 아래로 흐른 피가 붉은 웅덩이를 만들고 강을 이루었지만, 남은 놈들의 수는 내게 목숨을 잃은 수보다 더 많다.
“괴, 괴…… 괴물!”
앞을 가로막던 마군(魔君)들의 목을 무 뽑듯이 뽑아내자 거마(巨魔)와 마장(魔將)들이 바들거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청강검을 떨구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약자에겐 한없이 무자비하나 강자에겐 무한히 약한 족속. 이게 마인들의 본모습이다.
벽곡단도 아까운 놈들이 넘쳐남에도 천마신교가 천하제일을 논할 수 있는 건, 신교의 하늘이자 만마의 종주, 사람으로 났으나 사람을 벗어난 존재. 작금의 천하제일인이라 불리는 천마. 바로 내가 있기 때문이다.
‘음…… 생각보다 무난한데?’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천명 작가의 이름값에 비해 무난하게 흘러가는 초반부다. 천명이라는 이름이 아무리 레전드라 하지만 트렌드라는 세월의 흐름 앞에선 어쩔 수 없었던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회귀 전엔 천마가 우주에도 가고 기갑도 입고 인방도 찍는 수준. 한 집 건너 천마가 득실거리던 미래를 떠올리니 천명 작가의 비장한 천마는 더욱 밋밋하게 느껴진다.
흔한 무협 클리셰를 보여주듯 마교의 2인자인 적마가 뒤통수를 후려 까고, 주인공인 천마는 무색무취의 극독에 중독된 상황이다.
거기다 주인공은 적마의 모가지를 꺾고 죽기 전 후회? 신세 한탄 비스무리 한 걸 시작하며 비실대기 시작했다.
‘마도천하라……. 안일했구나.’
평생에 가까운 시간을 마교에서 지냈지만 세상에 마교처럼 사악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았다. 정파, 사파, 그 누가 아무리 악독한 짓을 한다 해도 뼛속까지 악으로 물든 마인들의 악행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
이곳이 존재한다면, 마교를 통째로 뿌리 뽑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악인들의 탄생을 맞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고 나서 처음 느껴 보는 감각. 삶의 끝이 다가오는 게 느껴진다.
폐교의 꿈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들지만, 더는 내가 손쓸 수 없는 노릇이다.
그보다 후회라는 감정이 가득 든다.
이곳에서 살아온 것처럼, 그 반의반만이라도 열심히 살았다면. 원래 세계에서도 지금처럼 아득바득 버티고 견뎌냈다면 그 결과는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 말이다.
모두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죽을 때가 돼서야 원래 세계에서의 삶이 문득 떠오른다.
만약 다시 한번.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천마 피터 킴.
천하를 군림하는 자로 잠들다.
“엥? 피터 킴 뭔데?”
천명이란 이름값에 비해 무난하게 흘러가는 양판 무협이란 생각에 아쉬움이 들던 찰나.
마지막 줄 피터 킴 세 글자로 분위기를 뒤엎었다.
확실히 글을 손에 놓으신 지 좀 되셨는지 불필요한 한자 병기와 연출 부분에서 아쉬운 감이 있었다.
하지만 프롤로그 끝부분에 삘한 웃음을 주던 부분을 시작으로 이어진 다음 회차부터 엄청난 몰입감을 자아냈다.
죽음으로서 천마신교에서 추방당한 천마가 원래 세계인 지구로 돌아왔고, 에보리진(호주 원주민)에게 검은 야행복을 입히고 무공을 가르쳐 그들을 살수로 만드는 전개가 신선하다.
캥거루 꼬리를 잘라 먹고 영물 코알라와 쿼카의 배를 갈라 내단을 꺼내 먹는 장면에선 뇌절이란 생각이 들지만, 조금만 다듬는다면 좋은 작품이 될 거란 생각이 물씬 든다. 다만.
“흑형 삼족 무사라……. 글이 좀 맵네…….”
뒷부분으로 갈수록 수위가 점점 강해지는 부분은 필히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천명 작가님이 무협을 쓰던 시절엔 소위 떡협지라 불릴 정도로 과하게 야한 장면들이 많았으니까.
“무협 독자 대부분이 아저씨들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긴 했지.”
하지만 아무리 호주 배경의 무협이라고 해도 에보리진 대물 살수들과 북해빙궁 출신 미녀들의 야스씬은 빼야만 한다.
이대로 가면 이건 빼박 19금 딱지를 달게 될 테고, 웹월드나 테일랜드 같은 다른 채널에선 연재 자체가 불가능할 게 분명하니까.
“내가 맡고 싶긴 한데…….”
편집자로서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는 누구보다 먼저 신작을 읽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다.
신상 백에 환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아쉽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권미현의 실력이 늘어야 하는 게 우선이니까.”
BS북 시절 권미현은 운영팀이었지만 그녀는 원래 편집자를 지원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실제 편집자 생활을 했던 것과 하지 않은 것의 간극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권미현이 LGA컴퍼니에 입사한 후로부터 내 지도 아래 꾸준히 교정교열 교육을 받았다. 다만 문제는 그녀가 실전으로 교정교열을 진행할 기회가 아직 없었다는 점이다.
노원지귀라는 새로운 필명으로, LGA컴퍼니 소속 판무 레이블인 드래곤으로 처음 선보이게 된 내 작품을 권미현이 담당하게 됐다. 하지만 내 글에 교정이나 윤문이 필요한 부분은 딱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현역 편집자인 내가 드래곤에서 첫 출간하게 될 내 글을 꼼꼼하게 살피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억지로 오탈자는 몇 남겨둘까 하는 생각도 들던 찰나 권미현이 편집자로서 할 일이 생긴 거다.
“아, 김칫국을 너무 마셨네. 일단 계약 확정이 되어야 하는 거지.”
천명 작가가 원고를 보내주면서 계약 의사를 밝혔지만, 이건 시작일 뿐이다.
천명 작가가 정산비, 선인세, 계약금 등을 얼마나 요구할지 전혀 알 수 없었으니까.
* * *
“지금 한 말 진짜야? 천명 작가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다니까. 돈은 벌 만큼 벌어서 선인세는 필요 없으시댄다. 대여점 시절에 글 쓰시던 분이라 그런지 8대 2 정산비 들으니 완전 좋아하시던데? 자기가 2가 아니라 8이 맞냐고 몇 번을 더 물어보셨어.
다음 날 아침.
천명 작가와 연락을 주고받은 단풍 삼촌이 내게 전화를 했다.
내가 회사에 있을 시간인 걸 알면서도 전화를 했다는 건 급한 사안이 분명했기에 부리나케 옥상으로 올라가 전화를 받았는데.
‘선인세가 필요 없다고? 최소 억은 받을 사람이?’
천명 작가는 글 실력을 떠나 이름값만으로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작가다. 문제는 LGA컴퍼니의 확장 이전과 신규 직원 채용이 함께 진행되고 있기에 억 단위 선인세를 주는 건 현재 상황으로선 조심스러운 상황이었기에 내심 쫄리긴 했었다.
“선인세야 무이자 대출이나 마찬가지니까, 여유 있는 작가님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긴 하지만……. 계약금이나 다른 조건도 없고?
—계약금도 필요 없대. 자기 웹툰만 잘해주고 전작 웹소설로 재출간하고 싶다고 하신다.
계약금도 필요 없어?
웹툰이야 우리 일이니까 당연히 이지연 이사가 잘해줄 거고, 종이책으로만 출간됐던 ‘아미파 무림학관의 1타강사’도 개정판으로 재출간 한다면 매출을 떠나 드래곤이란 레이블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BS북 역시 천명 작가를 몇 번이나 계약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들었는데, 천명 작가가 이렇게 쉽게 신작 계약과 더불어 구작 계약까지 진행한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
이 계약은 천명 작가에게도 도움이 될 테지만 이번 계약으로 인해 더 많은 이득을 얻는 건 우리 드래곤이 될 테니까.
—대신 좀 특이한 조건이 하나 있는데.
“뭔데?”
혹시나 했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지.
선인세와 계약금도 필요 없다는 천명 작가가 원하는 게 뭔지 듣기도 전에 손에 땀이 맺힌다.
—작가 모임 같은 걸 하신다는데? 거기 정우 네가, 아니 노원지귀 작가가 가입하게 해달라시네?
“작가방?”
천명 작가가 돈 대신 나를 원하는 것.
그것 나의 작가방 가입이었다.
* * *
‘좀 긴장되는데?’
천명 작가의 계약 희망 소식을 전달 받은 후.
나는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회사 근처 핸드폰 대리점으로 가 새로운 폰을 개통했다.
투넘버 서비스 같은 걸 썼다면 폰 값은 굳었겠지만, 아직까진 편집자용, 코즈일용, 노원지귀용을 확실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게 더 확실하게 구분하기 편하기도 하고.
“작가님, 주인공 설정이 망나니 아니었나요? 근데 행동은 왜 부처님이에요? 네? 과거에 사건이 있어서…… 아니, 그건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제가 작가님 담당잔데요.”
“작가님 선인세 일정보다 못 땡겨드려요. 저희 출판사지 은행 아닙니다.”
지금은 오후 2시.
식곤증에서 정신을 차린 판무팀 매니저들은 작가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다. 다들 내게 신경을 쓸 겨를은 없는 상황.
‘좋아 지금이다.’
PC 카톡에서 박정우 매니저로 사용하는 아이디를 로그아웃하고 오늘 새로 개통한 노원지귀 카톡 아이디로 재빨리 로그인을 했다. 그리고 단풍 삼촌에게 전달받은 천명 작가의 아이디를 추가해 그에게 연락을 했다.
띠링— 띠링— 띠링—
‘반응 빠르시네?’
연락을 드린 지 1분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천명 작가에게서 물밀듯이 카톡이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이무진 본부장님께
연락 받았습니다
—노원지귀라고합니다
천명 작가님 맞으실까요?
—천명 작가님: 이야아~ 반갑습니다!
—천명 작가님: 노원지귀 작가님이랑 이야기
나눠보고 싶어서 물어물어 연락하게 됐네요 ㅎㅎㅎ
—천명 작가님: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작가들 소모임을
진행하는데, 노원지귀 작가님이랑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아서 ㅎㅎㅎ
—저도 작가님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면 좋죠
—그런데 하나 여쭐 수 있을까요?
저는 아직 신인 작가인데
이렇게 연락을 주신
이유가 궁금해서요
코즈일이라면 몰라도 노원지귀는 이제 막 연재를 시작한 신인 작가. 코즈일에게 연락을 했다면 모를까, 노원지귀에게 이렇게 적극적으로 작가방 가입을 권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천명 작가님: 에이~ 장난도 ㅋㅋ
—천명 작가님: 작가님 신인 아니시잖아요?
전명 작가의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설마……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