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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30화 (30/201)

#30화 - CP 계약이 어렵다고?

늦은 저녁, 인천 차이나타운의 한 중국집.

무협지 속의 객잔을 연상시키는 고풍스러운 외관의 중국집 3층 VIP룸은 묘한 긴장감이 멤돌았다.

빙그르르 도는 원형 테이블 한 쪽엔 칼자국이 가득한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앉아 있었고, 그 맞은편엔 자연인을 연상케 할 법한 도인풍의 중년인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협, 다시 한번 재고 바랍니다. 한낱 회빙환만 가득한 요즘 무협계에 대협의 글로 광명을 비춰주시지요.”

“어허……. 소협, 내 말하지 않았소. 나는 더 이상 붓을 잡을 생각이 없소.”

‘아오지에 보내고 싶구만 기래.’

속내와 달리 이무진은 무던히 밝은 미소를 천명 작가에게 건넸다. 그는 3시간째 중국집에서 천명 작가를 설득 중이었다.

얼핏 보면 백발 노인처럼 보이는 천명 작가는 지독한 컨셉충. 외관과 달리 그의 나이는 고작 마흔하나였다.

하지만 무협뽕을 세게 맞은 그는 머리카락과 눈썹 그리고 수염까지 모두 흰색으로 물들였기에 그의 비위를 맞추는 이무진은 점점 버거움을 느꼈다.

LGA의 대표인 박정우가 작가들 중엔 특이한 사람이 많을 거라고 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거늘.

의와 협만 존재하는 전통무협만 쓰게 생긴 사람이 현실은 무협을 빙자한 라노벨 아카데미물 작가라니. 천명 작가가 이리도 지독한 혼종일 줄은 그를 만나기 전까지 이무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박정우의 말대로 이무진은 종이책 시절 유명했던 작품들 중에서 웹툰화하기 좋을 만한 작품들을 추리고 추렸다.

거기서 아직 웹소설로 진출하지 않은 작가들에게 연락을 돌렸고 천명 작가와 미팅을 하게 된 상황이었다.

‘부끄러워하지 말자. 이건 일이다.’

이무진 자신도 한 얼굴 했기에, 단지 외모로 상대를 평가하진 않았다. 하지만 천명 작가는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시벌, 미팅 자리에 장삼을 입고…… 쯧.’

여기가 차이나타운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대협, 대협께 다시 붓을 잡기를 청하는 게 아닙니다. 낙양지귀였던 대협의 ‘아미파 무림학관의 1타강사’를 웹툰화하기를 바랄 뿐이옵니다.”

천명 작가의 비위를 맞추느라 가득 화를 억누른 이무진이 다시 한번 살벌한 웃음을 건네며 물었지만, 이번에도 천명 작가는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옅은 웃음을 내지을 뿐이었다.

“허허, 나는 이미 속세와 연을 끊은 지 오래요. 내 비록 붓을 꺾고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 하나 요즘의 웹소설 그리고 웹툰의 트렌드가 어떠한지는 알고 있소. 하나 내 글과 비슷한 운치의 글이나 그림은 본 적이 없네만.”

패고 싶은 말투와 달리 천명은 정확했다.

아직 아카데미물이 웹소설에 범람하기 전의 시기, 특히 천명 작가가 썼던 것처럼 무협 아카데미물은 자취를 감춘 시절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때려치고 나오고 싶은 생각이 올라왔지만, 이무진은 박정우의 말 때문이라도 이 계약을 꼭 성사시키고 싶었다.

“삼촌, 천명 작가가 가능하다면 꼭 하는 게 좋아. 천명이 고작 한 작품만 써서 히트 친 작가긴 하지만 작가들 사이에서 인맥이 장난이 아니거든. 만약 천명 작가의 글이 성공적으로 웹툰화가 된다면 다른 작가들도 데리고 올 수 있을지도 몰라.”

밥도 술도 먹일 만큼 먹인 상황.

뭐가 되든 이제 마무리를 해야 되는 상황이다.

‘이걸로도 설득이 안 된다면, 방법이 없다.’

이무진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들었다.

갑작스럽게 미팅이 잡혔기에 시간이 상당히 촉박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임에도 이지연이 그려준 ‘아미파 무림학관의 1타강사’의 메인 히로인 스케치를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다시 설득을 해보려는 그 순간.

천명 작가의 전화가 울렸다.

“어, 여보? 응, 우유만 사가면 돼? 계란이랑 손질대파? 응응 금방 갈게요.”

“…….”

“실례했소 소협. 폰을 왜? 오오오오옷? 이, 이건 무림학관 메인 히로인인 미령 낭자!”

“대협, 아직 러프 스케치지만 채색이 진행되면 느낌이—”

“이야아~ 선생님, 진작 보여주시지! 바로 계약 하시죠?”

“……네, 선생님.”

천명 작가가 후다닥 계약서에 사인 하는 걸 지켜보며 이무진은 다음 작가 미팅부턴 그림부터 보여 주기로 다짐했다.

* * *

“……네? 연재 주기를 주 5일에서 주 3일로 변경하신다고요?”

“예, 그렇긴 하죠. 하지만 제가 공휴일엔 확인이 어려우니 매출 문의는 평일에 주시면…… 아, 네에 궁금하셨군요. 네, 지금 전달 드리겠습니다. 토요일 매출은 1,300원 일요일 매출은 800원 월요일은…… 아, 네. 괜찮다고요? 예에, 들어가세요.”

“광철마도가 아니라 강철마도요?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어느 회사나 그렇겠지만 판무팀의 월요일은 더 지옥 같다. 주말 동안 쌓인 원고와 작가들의 온갖 문의가 쏟아져 나오고 한 주의 시작을 알리는 주간 회의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 죽여버리고 싶네. 작가 새끼들.”

“연휴 끝나니까 진짜 지옥이네요.”

“자자, 그런 얘기는 회의실 가서 하자고. 주간 회의 하러 갑시다.”

평소의 월요일이 지옥이라면 오늘은 불지옥.

바로 전 주가 토, 일, 월, 화, 수로 이어지는 황금 연휴였기 때문이다. 담당 작가와 불꽃 같던 통화를 마친 판무 2팀 매니저들은 좀비 같은 얼굴로 대회의실을 향해 이동했다.

“아니 씨발. 일매출 라면값도 안 나오는 새끼가 매출은 존나게 물어봐. 아니 매출 며칠 늦게 알면 뭐? 지구 부서져?”

BS북은 연차 사용을 장려한다.

물론 직원 복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은 연차를 돈으로 주기 싫어서라는 게 다른 점이지만.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아요. 전 연휴 동안 집에서도 교정했어요.”

여하튼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인해 김동현 팀장과 조팟 그리고 이창윤 매니저는 추석 연휴에 반 강제로 연차를 쓰게 된 상황.

추석 연휴가 낀 한 주를 통으로 쉬었기에 다들 돌아버리겠다는 표정이었다.

“하아…….”

“다들 그러려니 합시다. 우리가 돈 벌려고 편집자 일 시작했어? 낭만 갖고 일하는 거지.”

진득한 혈향만 감도는 지옥도 속에서 홀로 푸릇한 피톤치드를 뿜는 김동현 팀장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팀장님.”

“왜?”

“로또라도 됐어요?”

“뭔 소리야?”

“바이브가 왜 좋은거죠? 명절만 지나면 이혼각이라고 하시던 분이?”

“긍정의 힘을 믿읍시다 여러분. 정우 매니저도 인상 좀 피고. 자 그럼 회의 시작하자고.”

‘긍정의 힘이 아니라 승진의 힘이겠지.’

강경진이 판무 1, 2팀 총괄 팀장을 시켜주겠다는 말이 있은 뒤로 김동현 팀장의 얼굴엔 그늘 한 점이 없이 푸르르다.

반면 나 역시 조팟이나 이창윤 매니저 못지않게 구겨진 얼굴이다. 소설피아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젠장……. 신청만 하면 다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아직 웹소설 시장 규모가 커지기 전이기도 하고 LGA컴퍼니는 코즈일의 작품을 웹툰화로 성공시킨 상황. 그렇기에 소설피아와의 CP 계약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줄로만 알았다.

—회사여서 전화 받기는

좀 어려운데요

—무슨 일 있어요?

—권미현 본부장: 대표님…… 소설피아에서

전속 작가가 한 명밖에 없는 신생 출판사는

CP 계약이 어렵다는데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권미현 본부장: 대표님이 새로운 필명으로

쓰시는 글 성적이 좋긴 한데……

아직 전작도, 유료화 경험도 없는

작가 한 명으로는 어렵다고 하네요……

—권미현 본부장: 대표님 원래 필명이

노원지귀가 아니라 코즈일인 걸 소설피아 쪽에선

모르고 있어서 그런 거 같아요……

—그게 무슨……?

—권미현 본부장: ……우선 웹월드나 테일랜드 CP 계약부터 진행해 볼까요?

권미현이 보냈던 카톡을 수도 없이 다시 확인하는데, 머리에 알콜을 들이부은 듯 어지럽다. 소설피아와 CP 계약을 맺어야지만 LGA컴퍼니에서 계약한 글을 유통할 수 있는데 그게 거절 되어버렸으니까.

‘젠장……. CP 거절은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당황스럽다. 그건 권미현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러니 웹월드나 테일랜드 CP 계약을 말하는 거겠지.

‘안 돼……. 소설피아 CP 계약이 최우선이 돼야 하는데.’

메인 플랫폼 중에선 소설피아가 아직 압도적인 규모이지만, 있는 놈이 더 하다고, 소설피아는 관대하지 않았다.

특히 신생 출판사가 웹월드나 테일랜드와 먼저 CP 계약을 맺는다면 좀처럼 소설피아와의 계약을 진행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다름 아닌 괘씸죄 때문.

다른 플랫폼에서 먼저 CP 계약을 진행했다는 건 소설피아의 입장에선 다른 플랫폼의 배를 먼저 불려준 거나 마찬가지니까.

운영팀 출신인 권미현 매니저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LGA컴퍼니는 소설피아와만 CP 계약을 진행한 건데 이게 단칼에 거절된 거다.

게다가 소설피아의 CP 계약을 먼저 체결하려 했던 건 단지 이 이유 때문만이 아니다.

소설피아와 달리 웹월드와 테일랜드는 작품 심사 기간이 따로 있다. 미래엔 더 당겨지긴 하겠지만, 아직까진 웹월드는 평균 3달, 테일랜드는 3주 정도를 기다려야 심사 결과를 받을 수 있다.

거기다 유료화를 진행하려면 소설피아처럼 원하는 일정에 유료화를 진행할 수 없기에 웹월드와 테일랜드가 제안하는 일정에 맞춰야 한다.

이뿐만이 아니라 최소 비축분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표지 일러스트 또한 완성이 되어 있어야지만 런칭이 가능하다.

즉, 소설피아처럼 연재 후 내가 원하는 시점에 바로 유료화를 진행하기가 어렵고.

이 말은 LGA컴퍼니에서 바로 수익 창출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면 나가린데……. 젠장, 연참이라도 좀 더 많이 할걸.’

내가 너무 안일했다.

LGA컴퍼니의 전속 작가로, 노원지귀라는 필명으로 소설피아에서 지난 주말부터 신작 연재를 시작했다. 고작 3일 만에 오늘의 베스트 1 페이지에 들고 관심작 수도 상당히 많아진 상황.

하지만 소설피아 입장에서 노원지귀란 필명은 단지 초반 지표가 좋은 수많은 신작 중의 하나일 뿐이었으니, 신생 출판사와 신인 작가의 이름만 가지고는 CP 계약이 어렵다는 거였다.

물론 늦어도 몇 주에서 한 달 정도만 더 지나면 노원지귀는 제2의 코즈일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내가 코즈일이고 내가 노원지귀니까.

‘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BS북이 투자금을 받고 웹툰 법인을 설립하는 기간까지 고려한다면, LGA가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간은 고작 3개월 남짓.

BS북이 직원 채용 후 본격적으로 웹툰 시장에 뛰어드는 시간까지 고려해도 최대 4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짧은 기간이다.

아무래도 리스크를 감수해야 할 것 같다.

—미현 본부장님

—타플 CP 계약은

우선 보류하고

소설피아 측에

다시 제안해 보죠

—권미현 본부장: 저도 그러고 싶긴 한데……

지금 저희 계약 작가가 대표님 말곤 없어서…….

—노원지귀가 코즈일이란

거 알려주세요

—LGA 전속이란

것도 전해주시고요

—권미현 본부장: 어…… 그래도 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리고 3년 내에

코즈일 필명도

LGA 전속으로

계약할 거라는

것도요

권미현에게 추가로 코즈일과 노원지귀가 동일인이란 것에 관한 비밀 보장 특약 사항을 추가하라고 요청했다.

BS북이 수년간 출판 업계 탑이었던 만큼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BS북 출신 매니저들이 소설피아에 있을지 모른다.

특약 사항이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내가 코즈일이고 노원지귀인 걸 밝혀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권미현 본부장: 대표님! 소설피아에서 CP 계약 승인했어요!

퇴근 시간이 다 되어갈 무렵, 결국 CP 승인이 났다. 다행이다. 이제 노원지귀의 이름값을 올릴 수 있도록 신작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때. 다시 카톡이 울렸다.

—단풍 삼촌: 정우야

—단풍 삼촌: 천명 작가가 계약하자는데?

—무슨 말이야 삼촌?

천명 작가 이미 계약한

거 아니었어?

—웹툰 심사용 원고

이미 각색도

들어갔는데?

—단풍 삼촌: 아니 그거 말고

—단풍 삼촌: 붓 드시겠단다

—단풍 삼촌: 웹소설 쓰시겠대

찌르르한 전율이 몸을 뒤덮었다.

천명 작가는 미래에도 신작을 낸 적이 없었으니까.

무협의 전설.

무협 하렘의 원조.

그가 돌아왔다.

드래곤 레이블의 소속 작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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