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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8화 (18/201)

#18화 ― 오늘 선약이 있었네요?

피자헛둘 작가와의 미팅 후로 열흘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편집자로서의 하루가 끝나면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매일이었다.

퇴근 후엔 웹월드 독점으로 첫 출간하는 나의 신작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런칭 준비가 숨 가쁘게 진행됐으니까.

—정우 씨. 잠시 사무실로 잠시 건너올 수 있어요?

“아니…… 아직도 퇴근 안 했어요? 지금 시간이…….”

—빨리요! 지금 시간이 문제가 아니에요.

“어?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시계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밤 9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다. 이지연이 진작 퇴근했어야 하는 시간이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다급한 목소리에 나는 곧장 슬리퍼를 끌고 LGA컴퍼니가 있는 옆집으로 건너 갔다.

“왔어요?”

사무실 안으로 들어 서니 퀭한 얼굴의 이지연이 상기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무슨 일인데 아직 퇴근도 안 하고…….”

“아, 거참. 우선 와 봐요.”

손목을 잡아 끌다시피 하는 이지연의 손길에 이끌려 사무실 안으로 들어 섰고 이지연이 가리킨 신티크(액정 태블릿) 화면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와!!! 이거 진짜! 이게 진짜, 와아!”

“어때요? 급하다고 하셔서 빠르게 완성해 봤는데. 괜찮아요?”

“아니…….”

말문이 막힌다는 게 이런 기분인 건가?

신티크 화면을 가득 채운 건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완성형 표지였다.

‘아니…….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게 말이 돼?’

이지연의 손이 남다르게 빠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표지 일러를 열흘 만에 완성할 수 있으리라곤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탄성을 내지른 건 단지 이지연의 그림이 빠르게 완성된 것 뿐만이 아니었다.

“아니 무슨……. 대박인데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 기분을 표현하자면 눈이 황홀하다는 게 그나마 내가 느끼는 감정에 가장 비슷할 테다.

이지연에게 말하진 않았지만, ‘불 지르는 파이어맨’은 어두운 배경의 아포칼립스물이다.

그렇기에 평소 밝고 산뜻한 그림 위주로 그리던 이지연이 과연 그 분위기를 잘 살릴까 하는 걱정이 없잖아 있었는데…….

하지만 나의 불안이 괜한 기우였다는 걸 증명하듯 신티크에 비친 일러 속 배경은 빽빽한 밀도와 함께 긴장감이 맴돌았고, 디테일한 배경 앞에서 맹렬한 화염으로 바퀴 인간을 불태우는 소방관의 결연한 눈빛과 표정의 묘사는 그 모든 걸 압도할 정도로 숨 막히게 강렬했다.

“후훗. 그런 반응 마음에 드네요. 잠도 안 자고 그린 보람이 있네.”

“예? 잠을 안 잤다고요? 아니…… 제가 말했잖아요. 아무리 일이 우선이라도 무리한 일은—”

“거참!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예요. 그냥 고맙다는 말 한마디면 돼요.”

쾡한 얼굴로 입술을 샐쭉이는 이지연을 보니 고마움과 미안한 감정이 한데 뒤섞여 올라왔다.

“진짜…… 진심으로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생 많았어요.”

“알아주니 좋네요. 어시 분들하고 함께 진행했어요. 웹툰보다 웹소설 표지는 훨씬 더 밀도를 촘촘히 쌓아야 해서 실력 파악하기에도 더 도움이 되니까요.”

이지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완성된 표지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어시들 실력은 어때요? 일적으로나 또는 사회성으로나 등등요.”

“음……. 이제 출근한 지 일주일밖에 안 돼서 점차 파악해 보긴 해야겠지만, 다들 잘 하시는 것 같아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네, 메인 캐릭터와 선화는 제가 맡고 배경 채색은 어시분들이 진행해주셨는데, 경력이 어느 정도 있는 분들이셔서 다들 잘 하세요.”

이번 웹툰 어시 채용에서 이력서는 이지연과 내가 함께 검토했었다. 하지만 웹툰에 관해서는 내가 아는 지식이 전무했기에 인성 위주로만 면접자들을 골랐는데, 나름 옥석이 잘 가려진 모양이다.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는데, 다행이네.’

서류 심사 통과 후 포트폴리오 면접은 이지연이 홀로 담당했었다.

‘BS북 퇴사 전까지는 최대한 숨겨야 해. 밝히는 건 아직이야.’

이지연의 사람 보는 눈을 믿은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이지연을 제외하곤 내가 LGA컴퍼니의 실질적인 대표라는 걸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정우 씨, 마음에 든다는 말만 하지 말고 자세히 봐 봐요. 더 추가할 부분이라든지 수정할 부분 있으면 지금 알려줘야 해요. 표지 완성 컨펌되면 타이포도 바로 진행 해야 되니까요.”

“음…….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편하게 말해주세요.”

편하게 말해달라는 말과 달리 마른침을 삼키는 이지연의 목울대가 넘실대는 게 보였다.

“더 필요한 건 지연 씨 보너스밖에 없겠네요. 얼른 퇴근하세요. 인센은 금주 중으로 입금 될 거니까.”

고마운 직원에게 보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그건 돈이다.

* * *

“미현 매니저 지금은 좀 어때?”

“1,702만 원이요.”

“와아! 그새 100만 원이 또 늘었어?! 오늘 기록을 계속 갱신하네! 으하하핫!”

“네. 그런데 팀장님. 웹월드 CP(Contents Provider) 사이트 아이디랑 비밀번호 나스 공용 폴더에 있어요. 직접 들어가시면 바로바로 확인 가능하실 텐데요?”

“알지, 알아. 그런데 괜히 CP 잘못 만졌다가 큰일 날 까봐 그러지. 설마 내가 몇 번 물어보러 왔다고 귀찮은 건 아니지?”

“직접 확인하시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하하, 나야 전문가가 봐주는 게 더 좋지. 고마워 미현 씨. 퇴근 전에 한번 더 들를게. 그럼 수고.”

판무 1팀의 절대 악 한우석 팀장에 가려져서 그렇지, 보면 볼수록 우리 2팀의 김동현 팀장 역시 꼰대 중의 상꼰대다.

권미현 매니저는 나보다 1달 빠르게 입사한 운영팀 매니저다. 내가 알기로 권미현 매니저는 회사에서 나와 유일한 동갑으로, 운영팀의 판무 파트 담당자다.

‘권미현 매니저……. 오늘 하루종일 고생이 많네…….’

BS북은 다른 웹소설 출판사와 달리 유통 쪽이 모태가 되기에 다른 대부분의 웹소설 출판사와 달리 운영팀이 별도로 존재한다.

통상적으로 각 매니저들이 도서 유통 까지 병행하는 다른 출판사들과 달리, BS북은 운영팀이 따로 전문적으로 유통 및 프로모션 진행을 담당한다.

다른 출판사 관계자들이 이런 얘기를 들으면 업무 분담이 체계적으로 잘 되어있다며 눈을 반짝일 지 모른다. 하지만 이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

BS북에서 운영팀의 존재는 흡사 코인 체굴기를 연상시키는데, 그 정도로 업무 강도가 빡세다는 뜻이다.

BS북은 판무팀과 로맨스팀이 속한 출판 본부에서 실적이 나지 않더라도 도서 유통으로 안정적인 자금력이 뒷받침 된다. 이 말은 즉 수백이 넘는 웹소설 출판사의 도서를 쌍끌이 어선처럼 긁어와 마이너한 심해 플랫폼에도 모두 뿌려 이벤트 협의를 한다는 거지.

‘생각할수록 미안하네…….’

가뜩이나 업무량이 많은 운영팀에 김동현 팀장이 들락거리며 권미현 매니저를 괴롭히는 건 오늘이 바로 내 담당 작품이자 신작이기도 한 ‘불 지르는 파이어맨’의 웹월드 런칭일이기 때문이다.

이지연과 어시들의 고생 덕분에 ‘불 지르는 파이어맨’은 고작 2 주라는 짧은 시간 안에 표지까지 완성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고작 런칭 첫날인 오늘부터 기대 이상의 수익을 내는 중이다.

그렇기에 김동현 팀장이 온종일 엉덩이를 들썩이며 운영팀을 기웃거리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최소 권미현 매니저에게는 따로 감사 인사를 전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카톡 선물로 커피 기프티콘이라도 보낼까 생각하던 그때, 권미현 매니저가 자리를 일어서 사무실 밖으로 나서는 게 보인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남은 시간 동안 최소 1번 이상은 김동현 팀장이 권미현 매니저를 더 괴롭힐 게 분명하다.

‘아니다. 지금 같이 나가서 사주는 게 낫겠네.’

나는 지갑을 챙겨 들고 빠르게 권미현 매니저를 뒤쫓았다.

“미현 매니저님. 잠시만요.”

“타세요.”

1층으로 내려가 자연스럽게 커피를 사려던 계획과 달리 엘리베이터는 옥상을 향하고 있다.

“담배 태우세요? 옥상에서 못 뵌 거 같은데?”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엉겁결에 옥상으로 따라 올라간 내게 권미현 매니저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물었다.

“아뇨, 옥상은 저도 처음인데…….”

“그럼 왜 왔어요? 바람 쐬러?”

“그게 아니라…….”

판무팀 매니저들의 경우엔 담당 작가와 작품에만 집중하면 된다. 반면 권미현 매니저와 같은 운영팀 매니저들의 경우엔 각 플랫폼과 출판사들을 담당해야 하기에 매일같이 갈려나가는 게 일상이다.

거기다 김동현 팀장이 오늘 아침부터 CP 사이트에서 ‘불 지르는 파이어맨’ 매출을 수도 없이 확인 요청해서 그런지 권미현 매니저의 눈빛과 말에 가시가 돋친 것 같다.

“남자친구 있어요.”

“네?”

예상보다 딱딱한 반응에 잠시 당황하던 그 순간, 더욱 당혹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잠시 눈만 껌벅이던 내 표정을 살핀 권미현 매니저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그건 아닌가 보네. 뭐에요 그럼? 옥상까지 나 따라온 거 같은데. 할 말 있으면 해요. 답답한 거 별로 안 좋아해서요.”

“아…… 감사하다는 말 드리려고요. 피자헛둘 작가님 대신 코즈일 작가님 작품 웹월드에 교체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던 거 같아서.”

“말로만?”

“……?”

요즘애들 당돌한 건 익히 알곤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렇게 당돌한 캐릭터는 처음이다.

“아뇨, 그래서 커피라도 사드리려고 했는데. 혹시 커피—”

“커피는 됐고 술이나 한잔 사요. 전 먼저 들어갈게요. 할 일이 많아서.”

“……네.”

깊게 빨아들인 마지막 한 모금을 뱉어낸 권미현 매니저는 재털이에 꽁초를 툭 던지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졌다.

요즘 애들. 좀 무섭다.

* * *

곧장 따라 내려가기 뻘쭘해 옥상에서 잠시 스트레칭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김동현 팀장이 이번엔 이창윤 매니저 자리 앞에서 서성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정우 매니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또 뭐지?

김동현 팀장의 이번 타겟은 아무래도 나인 것 같다.

“예? 어떤 거 말씀하시는 걸까요?”

“하아……. 정우 매니저, 이거 또 이러네. 아니 이렇게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해?”

‘사고? 사고 날 게 뭐가 있었나?’

코즈일로 쓰는 세 작품 그리고 내가 담당하는 두 작품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걸로 아는데?

“보통 사고가 아니라 대형 사고야! 이세계 힐링포차 지금 오베 19위야, 19위! 이게 말이 되냐고! 으아하하핫! 황금 손이야 황금 손! 런칭 하는 것마다 다 대박이야!”

아…… 나는 또 뭐라고.

청천벽력 같은 사고 소식에 홀로 마른침을 삼켰는데, 다행히 별일이 아니다.

‘아니, 별일인가?’

김동현 팀장의 너털웃음에 1팀 한우석 팀장의 얼굴이 시시각각 찌그러지는 걸 보니 속이 시원하긴 하다.

2주 전만 해도 한우석 팀장은 폭탄 처리를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을 테지. 하지만 그가 폭탄인 줄 알고 내게 내팽개친 피자헛둘 작가는 뻘 묻은 진주, 아니 황금이었다.

오늘의 베스트 순위 19위에 랭크 돼 있는 ‘이세계 힐링포차’는 피자헛둘 작가가 최진혁 파트장과 계약했던 ‘천마님의 현대생활’ 연재를 포기하고 소설피아에서 런칭한 작품이다.

제목에 ‘힐링’이란 단어가 아예 박혀 있는 것처럼 ‘이세계 힐링포차’는 말 그대로 이세계 요리 힐링물.

큰 갈등 구조 없이 잔잔히 흘러가는 내용 특성상 큰 인기를 얻기는 쉽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재 소설피아에 힐링물의 씨가 마른 상황이기도 했고 내 교정과 피드백이 잘 합쳐져서일까? 바로 전 주 월요일부터 연재를 시작한 ‘이세계 힐링포차’는 예상외의 화력과 함께 준수한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뭐, 가장 중요한 피자헛둘 작가가 각성한 게 컸지만.’

계약 해지 협박이 먹히긴 했는지, 아니면 정말 자신이 쓰고 싶은 글을 쓰게 되어서 인지 피자헛둘 작가는 ‘이세계 힐링포차’를 미친듯한 속도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내게 증명하려는 듯, 아니면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는 듯이 몇 주 동안 한 화도 못 쓰던 사람이 하루에 최소 1~2화 씩 쓰는 모습을 보니, 나 역시 그의 담당 편집자로서 뿌듯했다.

“자자, 우리 이번 달에 회식 안 했지? 6월도 된 겸 오늘 다들 한잔 할까? 다들 오늘 시간 어때?”

“전, 좋습니다.”

“저도, 뭐. 고기나 먹죠.”

1팀에게 한방 먹인 게 다들 한 마음 한 뜻으로 기뻤는지 조팟까지 흔쾌히 허락했다.

“저도—”

‘어?’

나를 축하하는 자리나 마찬가지기에 나도 가능하다는 말을 하려던 그 찰나.

카톡이 울렸다.

권미현 매니저님: 오늘 사요. 술 사기로 한 거.

“팀장님, 죄송한데 저는 오늘 선약이 있었네요?”

“그래? 흐음…… 아쉽네. 이번 주 다른 날은 내가 시간이 안 되는데. 그럼 다음 주 중에 다시 날 잡도록 하지. 어차피 지금 기세로 봐선 피자헛둘 작가 성적은 쭉쭉 오를 테니까 말이야. 으하하핫! 어디 퇴근 전에 코즈일 작가 매출이나 한번 더 확인하고 올까?”

역시 권미현 매니저에게 오늘 술을 사는 게 먼저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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