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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편집자의 이중생활-17화 (17/201)

#17화 ― 버트런드의 말이 옳다.

이전 생에 그녀의 후임으로 수년을 함께 지내면서 이지연의 입맛은 에피타이저부터 디저트까지 쫙 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레스토랑?

이지연이 이런 곳을 좋아했다는 건 내 DB에 저장되어 있지 않다.

‘음……. 가격 때문일 수도 있겠네.’

가장 저렴한 메뉴도 1인에 2만 원을 훌쩍 넘기고 시그니쳐 디쉬 라고 써 있는 세트 메뉴는 5만 원을 훌쩍 넘는다.

물론 가격은 문제가 안 된다.

플랜 B의 대업을 이뤄야 할 이지연이라면 한 끼에 5만 원이 아니라 50만 원짜리 식사도 아깝지 않으니까. 단지.

‘분위기가…… 묘한데?’

우리를 제외한 주변 테이블의 사람들이 모두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몹시 부담스럽다. 북한도 아니고 전구 대신 촛불을 켜 은은하게 빛나는 분위기 또한 낯설고.

“오……. 이거 다 드실 수 있겠어요?”

“그럼요! 이거 먹으려고 아까부터 간식도 안 먹었어요. 여기가 진짜 유명한 파스타 맛집이래요!”

“하하, 네. 많이 드세요.”

은은하게 빛나는 조명에 취해 혼자 얼타고 있는 그때, 주문한 요리가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해물이 가득 담긴 파스타와 샐러드 그리고 꿀에 찍어 먹는 피자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와~ 맛있겠당. 정우 씨도 얼른 먹어요. 뜨거울 때 먹어야 더 맛나요.”

“부족하면 더 시킬 테니까, 천천히 먹어요.”

그리고 이지연은 테이블을 가득 체운 음식을 진공 청소기처럼 흡입하기 시작했다.

‘잘 먹으니 보기는 좋네.’

밥을 먹으며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꺼내니 이지연이 호로록 빨아 당기던 파스타 면발을 삼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웹소설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여러 편 쓸 수 있나요? 잘 모르긴 해도 동시에 세 작품 연재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사람마다 다르죠.”

연재 중인 웹소설 작가라면 자의든 타의든 하루에 5천 자는 써야만 한다. 손이 타고나게 빠른 작가들은 동시에 두 개 연재 이상을 하기도 하지만.

‘물론 나처럼 세 작품을 동시에 연재하는 작가들은 흔하진 않지.’

“그래도 정말 대단한 거 같아요. 신작 구상은 아포칼립스물이라고 했는데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려주실 수 있어요?”

“안 되죠. 스포하는 건데.”

“치, 됐어요. 내용 괜찮으면 웹툰 제안해보려 했더니만, 돈 내고 읽을게요.”

이지연은 서운하다는 듯 입을 삐죽였다.

“장난이에요. 기본 베이스는 좀비물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요, 흔한 좀비물 하고는 조금 차별화를 두려구요.”

“와! 저 좀비물 완전 좋아하는데. REC, 좀비랜드, 새벽의 저주 다 엄청 재미있게 봤거든요.”

여리여리한 외모와 달리 좀비물을 좋아한다는 게 놀랍다. 이지연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여러모로 놀라운 기분이다.

“기본 골조는 한 소방관이 가족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인데요 좀비가 살짝 달라요.”

아직은 한국에 좀비 열풍이 불기 전이다. 본격적인 좀비 열풍이 불기 시작한 건 2016년도에 부산행 그리고 넷플렉스에 킹덤이 나오면서부터니까.

‘그때부터 좀비하면 역시 K좀비 라는 말이 나오곤 했었지.’

“어떤 식으로 다른 건데요?

“제 글에 나오는 좀비는 바퀴벌레가 인간화된 거거든요.”

“으…… 바퀴요? 그로테스크한 맛이 좀 있네요. 안 되겠다. 얘기 더 들으려면 술이 있어야겠는데. 와인시켜도 돼요?”

“네, 뭐…….”

아니, 잠깐.

이지연이 술을?

‘안 돼. 이지연은 술을 마시면…….’

“저기요, 여기 오린 스위프트 한 잔 주시겠어요?”

하지만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주문을 마무리했다.

“저……. 괜찮으시겠어요? 지연 씨 술 잘 못 드시지 않으세요?”

“무슨 소리세요. 저 완전 말술이에요.”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지연은 맥주 한 캔만 마셔도 취하는 사람인데 와인을 마셔? 순간 전생에서 술 취한 그녀를 집까지 겨우 데려다주며 고생했던 게 떠오른다.

수년간 함께 일하며 내가 퇴사한다고 했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졌던 술자리였지만, 기억에서 잊기에 그녀의 주사는 워낙 강렬했으니까.

“에이, 설마 저 내일 출근 못 할까봐 그러세요? 회사에서 자고 가면 되죠. 지각할 일 없으니 걱정 마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닙니다.”

주문한 레드 와인이 이지연의 앞자리에 놓여졌고, 잔 안에 담긴 와인이 조금씩 자취를 감춤과 동시에 이지연의 텐션은 극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와! 미쳤다! 정말여? 그럼 좀비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 바퀴처럼 변해서 막 날아다니는 거예요?”

“그렇죠. 대신 처음부터 너무 강하면 이상하니까 제약을 두긴 했어요. 바퀴는 야행성이니만큼 밤에만 움직이고 거기다 바퀴는 다른 곤충들처럼 탈피라는 걸 하거든요. 탈피하는 과정을 거쳐서 점점 강해지는…… 저, 근데 지연 씨 졸리면 이만 일어날까요?”

“흐으응…….”

“…….”

자이로드롭처럼 높게 치솟던 이지연의 텐션은 축 처진 고개와 함께 툭 떨어졌다.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웅얼거리는 걸 보니 옆에 있기 민망할 정도.

“계사안! 계산은 내가 할 꺼야. 돈 내기만 해!”

“……네? 오늘 제가 사드린다고…….”

“그동안 우리 대표님 고생해서 내가 사주고 싶어서 부른 거야아. 이모오! 계산 꼭 제 카드로 해주세요. 꼬옥이요!”

‘부끄러워하지…… 말자. 내 귀한 파트너다.’

맘과는 달리 동서남북에서 쏠리는 시선에 몹시 부끄러웠지만, 나는 꿋꿋이 이지연을 부축해 차로 데리고 갔다.

“저어……… 할 말 있는데에…….”

“속 안 좋으면 말하세요. 갓길에 바로 세워 드릴 테니까.”

다행히 출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라 도로는 막히지 않았다. 다만 나는 냄새에 민감하다. 그녀가 제발 토만 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간절한 염원이 통했는지 이지연은 차 안에서 몇 번 웅얼거리던 걸 제외하고는 조용히 잠에 들었다. 문제는 계속 잔다.

“지연 씨. 정신 차려보세요. 지연 씨!”

난관은 이제 시작이다.

오피스텔 주차장에 도착했는데도 이지연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에 두고 가고 싶다는 생각이 맹렬히 들었지만, 전생의 의리를 벗 삼아 그녀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부축해 오피스텔로 향해 올라갔다.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다.

지금 이지연을 부축하는 팔을 놓는다면 그녀는 실 끊긴 인형처럼 철푸덕 내동댕이쳐질 게 분명하니까.

“……그래서 바퀴화된 인간들이 좀비처럼 다니는 데 그 밸런스를 잡는 데 중점을 뒀어요. 바퀴가 만약 인간 크기라면 100미터를 1초에 주파하는 건데 놀랍지 않나요?”

“으응…… 아라써어…….”

가늘게 들리는 힘겨운 목소리.

다행히 헛구역질을 올리진 않지만 혹여 그녀가 정신을 놓는 순간 그녀의 식도마저 열릴 거 같기에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결단코 그녀가 정신을 놓아선 안 된다.

띠리릭—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제 정말 고지가 눈앞이다.

“아 근데 말이죠. 이게 당장 다다음 주 오픈이라 표지를 제작할 수가 없어서, 그게 문제에요.”

“으음……. 표지 제가 만들어 드릴까요?”

“네?”

“표지 제가 만들어드릴 수 있어어. 그러고 싶어어…… 요오…….”

그녀가 정신을 차리도록 창가 아래 놓인 쇼파에 잠시 뉘어 놨는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아니 가만……. 표지 제작을 해 준다고?’

웹툰 표지용 일러스트와 웹툰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그림 스타일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웹툰 그림이 더 단순화되어 있고 표지의 경우엔 채색과 명암 등의 디테일이 더욱 세밀하게 들어가는 경우가 많으니까.

생각해보니 인턴사원 회장님은 테일랜드 웹툰 심사를 진행 중이고, 바로 다음 주면 이지연을 도울 어시가 둘이나 들어온다.

‘심사 기간이어서 굳이 급하게 그릴 필요는 없잖아? 이지연도 지금 비축을 만드는 상황이니까.’

일정 안에 웹월드에서 연재할 내 신작 표지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지연 씨. 정말 가능하겠어요? BS북에서 지급하는 금액은 빠른 일정 고려해서 세전 80만 원 정도로 협상해볼게요. 그리고 추가 업무니까 별도 인센도 제가 따로 드리고요.”

“우응…… 잘래에.”

“…….”

아쉽게도 그녀는 맛이 갔다.

정상적이 대화는 어려워 보인다.

나는 복층 위로 올라가 이불을 꺼내왔다.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술을 마시지 못하게 해야겠다.

“지연 씨. 그럼 푹 쉬세요. 저는 먼저 가볼게요.”

“자고 싶어…….”

“?”

이불을 덮어주고 이제 내 방으로 돌아가려는 데 이지연이 내 옷 소매를 슬쩍 잡아당긴다.

설마…… 침대에서 자겠다는 뜻인가?

“침대는 복층이라 위험할 것 같은데요……. 올라갈 수 있겠어요?”

“잘래에……. 자고시퍼어.”

“…….”

침대에서 자명 허리가 배기긴 할 테지만 지금 혼자서 올라갈 수가 있나?

“안아줘. 안아줘어.”

“…….”

우리 고상한 사업파트너님께서는 곧 죽어도 매트리스 위에서 주무시고 싶은 게 분명하다. 업어서 자신을 올려놓으란 건가?

상대론적 인식론을 말한 장자(莊子)는 술 취한 사람의 정신은 완전한 상태에 있다고 한 반면,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취한다는 것이 일시적인 자살이라고 말했다.

버트런드의 말이 맞다.

이지연은 지금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무시하고 그냥 갈 길 갈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 이대로 두면 혼자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다 다치기라도 할까봐 두렵다.

안 되지. 그럼 산업 재해니까.

“하아……. 조심히 잡으세요.”

코알라가 된 이지연을 등에 업고 복층으로 기어 올라가 친절히 이불까지 덮어줬다.

“잘래에…… 자고 시퍼어…….”

“…….”

역시 버트런드의 말이 옳다.

* * *

다음 날은 아침부터 무척 분주했다.

일반적으로 웹소설 출판사라면 업무적으로 상당히 디지털화 되어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 테다. 하지만 그 웹소설 출판사의 선두를 달리는 BS북의 실체는 아날로그하기 짝이 없다.

매 작품 계약 때마다 동반되는 수많은 페이퍼 워크, 거기다 외근 보고서까지 작성해야 했기에 아침부터 진을 쭉쭉 빠져 간다.

띠링— 띠링— 띠링—

—이지연: 저… 어제 실수한 거 없나요?

—이지연: 출근 잘 하셨나요?

—이지연: 정말 죄송해요 대표님 ㅠㅜ…

—괜찮아요.

—점심에 할 얘기 있는데

—시간 괜찮으세요?

—이지연: 네… 점심 때 뵙겠습니다…

거기다 이제 정신을 차렸는지 이지연은 괜찮다고 해도 계속해서 무한 석고대죄 카톡을 보내고 있다.

‘고되다……. 고된 하루다.’

오전 내내 바쁜 업무 처리가 계속 이어졌다.

피자헛둘 작가의 신작 초반부 교정을 마무리하고 메일로 파일을 전달하니 어느덧 점심시간이다.

“정우 씨, 김치찌개 콜?”

“오늘은 약속 있어서요.”

점심은 주로 이창윤 매니저랑 먹는데 당분간은 집에 가서 먹을 생각이다. 웹월드 런칭일인 다음 주까진 점심 시간에도 글을 좀 써야 할 것 같으니까. 물론 오늘은 정말 약속이 있어서지만.

“약속? 누구? 여자?”

“에이, 아니에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짧은 인사를 남기고 나는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 장소인 식당에 가니 이지연이 죄인처럼 머리를 풀어헤친 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아직도 숙취 있어요?”

“아…… 오셨어요?”

“왜 그러고 있어요. 주문했어요?”

도리질을 하는 이지연의 모습에 바로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러 세웠다.

“물냉면 2개 주세요.”

“저…… 저는 오이 빼고요.”

“…….”

이지연이 해장을 물냉면으로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해장 광경은 나조차도 처음 보는 거였다. 오늘은 이지연이 오이를 먹지 않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저…… 하실 말씀이란 게…….”

나와의 자리가 좌불안석이었는지, 짧은 침묵을 깨트린 건 이지연이었다.

“아, 네. 어제 하셨던 말 관해서 대답을 확실히 듣고 싶어서요.”

“네? 그…… 그게……. 사실 저는…….”

“혹시 힘드신가요?”

“예? 아, 아뇨! 싫은 건 아닌데…… 다만 마음의 준비가…….”

“그죠…… 아무래도 이주일 안에 완성을 해야 하니 쉽게 결정하긴 어렵겠죠.”

“어…… 예? 이, 이주일 안에……?”

“힘드실 거 같으면 편하게 말해주세요. 이주일 안에 완성하는 게 힘드시면 디자인 표지로 우선 진행하면 되는 거여서요. ……지연 씨? 어디 안 좋으세요?”

“……아뇨.”

이지연은 아직 숙취에서 덜 깬 건지 아니면 어디가 아픈 건지 어제 술을 마셨을 때보다 더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냉면이 나오자마자 이지연은 그걸 그릇째 들이키더니 쾅 소리를 내며 내려놨다.

“하아……. 하고 싶네요. 할 수 있어요.”

“어? 정말 가능하시겠어요? 기간은 이주일—”

“할 수 있다고요. 밥이나 드시죠.”

“……? 네, 감사합니다.”

왜인지 모르게 그녀는 화가 난 것 같다.

연봉 인상 시점을 당기는 걸 고려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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