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하나 더 해볼까?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 처넣었던 강경진이 BS북 오성민 대표의 처조카라는 사실에 나는 토요일 오후 3시가 되도록 침대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강경진이 BS북에 언제, 어떻게 입사하게 된 건지 그 부분이 늘 궁금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사실을 알게 되니 생각 이상으로 충격의 여파가 크다. 뇌가 소주에 절여진 기분이다.
“하…… 어떻게 들어온 건가 했더니…… 낙하산이었어?”
강경진이 정말 오성민 대표의 조카라면 그가 BS북에 들어오는 건 시간문제일 터.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분명히 BS북을 노리러 오겠지. 돈 냄새는 귀신같이 맡는 놈이니까.
그렇다면 계획에 수정이 필요하다.
플랜 A는 현재 웹소 출판계의 공룡인 BS북에서 좋은 작가를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는 선례를 꾸준히 남기려던 거였다.
작가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정산비과 기타 계약 조항들을 선한 선례로 만들면 이는 곧 출판사의 경쟁력이 될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다른 출판사들 역시 경쟁력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BS북의 계약 조건과 비슷한, 최소한 사기 계약은 아닌 선에서 각 출판사의 장점을 살린 선의의 경쟁을 할 게 분명하다.
이건 2020년 이후 사기 계약이 줄어들기 시작한 때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강경진이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다면 내가 만드는 선례들은 한 줌 물거품처럼 흩날릴 게 분명하다.
육두품이 난다 긴다 해도 성골이 찍어 누르면 바짝 엎드려야 하는 게 회사라는 조직이니까.
“그렇다면 결국 플랜 B로 가야 한다는 건데…….”
내가 BS북의 불합리한 점을 타파할 수도 없고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집어삼킬 수가 없다면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다. 선례를 담아둘 장소가 없다면 내가 직접 그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는 거지.
‘결국 내가 직접 차려야 한다는 건데. 출판사를…….’
출판사는 작가를 돈으로만 보지 않고 작가 역시 출판사를 사기꾼으로만 여기지 않는, 서로가 상부상조할 수 있는 그런 출판사를 만들어야 한다.
BS북에서 이루고자 했던 선한 선례, 업계 계약의 기본이 될 만한 기준을 하나부터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 그게 바로 플랜 B다.
“하…… 그렇다고 아무나 사람을 뽑을 수도 없는 노릇인데…….”
하지만 직접 회사를 차린다는 건 정말 신중해야 한다. 자금을 떠나 신뢰할 수 있는, 부도덕하지 않으며 능력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일단…… 강경진 그 새끼가 정말 같은 새낀지부터 확인해보자.”
조팟 말처럼 강경진이 정말 내가 아는 그 사기꾼과 동일인이라면, 우선 놈에 관해 알아봐야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니까.
* * *
‘서점 진짜 오랜만에 오네.’
강경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나는 고시원 근처 중고책 서점에 들렀다. 강경진의 글이 정말 똥글이라면 일반 서점보단 중고책 서점에서 찾는 게 더 쉬울 테니까.
“하…… 진짜 그놈이었어?”
저자명이 강경진이라 쓰인 도서 표지를 넘기니 잊을 수 없는 역한 얼굴이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
책 커버 앞쪽에 쓰인 저자 이력을 보니 스펙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고, 팔짱을 낀 채 허연 미소를 내뱉는 사진은 보기만 해도 토가 쏠린다.
‘아이비리그 출신에 MBA 수료. 게다가 골드만 삭스 에서 일했다라…… 소설에 이딴 걸 왜 써?’
‘사랑에 잠 못 드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단편 소설집을 몇 장 넘기고 읽는데, 감정 싹 다 뺀 독자의 시선 그리고 편집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이건 글이 아닌 활자 조합물.
이 개같은 놈이 이딴 똥글에 종이를 낭비했다는 생각에 나무에게 미안하다.
웹소설 하곤 거리가 먼 놈이 세계적인 대기업 골드만 삭스를 때려치우고 BS북 같은 직원 100명도 안 되는 회사에 입사한다는 것 자체가, 강경진의 계획은 처음부터 돈이었다는 걸 방증한다.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약 한 달 넘게 BS북을 다니며 느낀 점은 과거에 내가 겪었던 것과 달리 생각 외로 융통성이 있는 조직이라는 점.
비록 기본 계약 조건을 4 대 6이나 5 대 5로 부르는 양아치임은 변함없지만, 실력이 어느 정도 있는 작가, 상업성이 있는 작가에겐 정산비와 선인세도 나름 융통성 있게 조정해줬으니까.
내가 BS북과 처음 계약했던 건 지금부터 약 2년 후인 2016년. 아마도 원래 역사대로 흘러갔다면 판무 1팀에 실적이 밀린 김동현 팀장이 이번 달에 잘렸을 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바로 강경진이 2팀 팀장으로 오게 되었을 테지. 그러면서 BS북이 본격적으로 양아치 같은 짓을 일삼았을 거고.
‘강경진이 바로 입사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긴 하네.’
내 실적에 힘입어 김동현 팀장이 잘리지 않게 되었으니 강경진이 바로 BS북에 합류할 명분이 사라졌으니까.
그렇다고 BS북의 주력 작가들을 보유하고 있는 판무 1팀 팀장이 그동안 보여준 실적이 있는데 잘릴 이유도 없고.
회식 때를 가만히 떠올려보니 대표가 강경진과 따로 만나 이야기하던 건 아마 그 때문일 터다.
지금 당장 강경진이 입사할 명분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말을 했겠지.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표 백이 있다면 언제든 BS북에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어?”
툭.
옆에서 누가 종이 꾸러미를 떨어트렸고, 나는 반사적으로 떨어진 그걸 주워 들었다.
‘와…… 엄청 잘 그리네. 만화 그리는 사람인가?’
여태 그림이라곤 웹소설 표지나 삽화 일러스트 그리고 웹툰 말고는 본 게 없다. 하지만 다양한 컷으로 분할된 장면 하나하나에 들어간 캐릭터엔 컬러가 들어가 있지 않았음에도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졌다.
“저기 이거 떨어트리셨…….”
옆 사람이 떨어트린 그림 원고들을 모아 건네는데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이지연……주임님?”
“그 미친…….”
“네, 안녕하세요. 그때 그 미친놈입니다.”
“아, 죄……죄송해요!”
우연처럼 이지연 주임을 여기서 마주치게 된 게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뒤늦게 말실수를 인지한 건지 그녀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근데 저기…… 제 이름 어떻게 아세요?”
어떻게 아냐고?
당신이 내 선임이었으니까.
이지연 주임은 모습이나 말투, 행동 이 모든 게 하얀 토끼를 연상시키는 그런 사람이다.
“면접 때 명찰 달고 있었잖아요.”
이지연 주임은 그제야 ‘아~’하는 표정을 짓다가 다시 새초롬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봤다.
“명찰에 제 직위가 써 있진 않았을 텐데요?”
나름 예리한 구석이 있다.
“기억 안 나세요? 그때 면접실 안에서 주임님이라고 다들 부르던데. ‘이지연 주임! 저 새끼 잡아!’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아…… 그랬었죠?”
그때 상황이 떠올랐는지 이지연 주임과 나는 서로 피식 웃었다.
“실례합니다 고객님. 저희 서점 내부에선 정숙 부탁드려요. 이야기 나누실 거면 밖에서 부탁드립니다.”
“아아, 네, 죄송해요.”
이지연 주임은 긴 밤색 머리를 귓가로 쓸어 넘기며 다시 볼을 붉혔다. 여전히 쑥스러움이 많은 사람이다.
“이야기 밖에서 나누라는데, 나가실까요?”
“……네?”
거절 못 하는 그녀의 성격을 알기에 뱉은 말에 이지연은 냉큼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막상 나왔는데 딱히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녀를 알지만 그녀는 날 모르니까.
꼬르륵—
서로 말없이 걷고 있는데 그녀의 배에서 무척 우렁찬 소리가 들렸다.
“저 그만…….”
“잠시만요.”
꼬르륵 소리가 부끄러웠던지 이지연이 빠르게 도망치려 했지만 나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강경진 생각 때문에 온종일 누워 있느라 나도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배고파서 그런데 저녁 같이 드시겠어요? 근처에 생선구이 맛있게 하는 집 아는데.”
“생선……구이요?”
이지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생선구이.
그중에서도 고등어가 그녀의 최애다.
얼핏 보면 가냘파 보일 정도로 말라서 숟가락은 들어 올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지만, 내 사수였던 이지연이 누구보다 먹을 것에 진심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으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생선구이 집으로 안내했다. 아직 입사 한 달 차지만, 회사 근처라 이쪽 동네는 꿰고 있었으니까.
확실히 주말이어서 그런지 가게 안은 한산했다.
“여기 고등어 구이가 맛있더라고요.”
“아, 정말요? 저 고등어 구이 진짜 좋아하는데.”
압니다. 내가 첫 사회 생활을 시작하고 주임님과 함께 지낸 게 몇 년인데.
“그럼 알탕도 하나 시켜서 나눠 드실래요?”
“어? 저 알탕도 진짜 좋아하는데…… 좋아요.”
“사장님, 주문이요. 고등어 구이 2개에 알탕 하나요.”
그녀가 어떤 음식을, 음료를 좋아하는지, 내가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더 많을 테다.
밥 먹을 생각에 생긋 웃는 이지연 주임을 보니 동생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보다 다섯 살 연상이긴 하지만, 회귀 전엔 내가 서른 살이었으니까…… 이제 내가 오빤가?’
늘 내겐 누나 같고, 듬직한 어른 같던 그녀가 지금은 20살 아이처럼 보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식사요~.”
“예, 감사합니다.”
노릇노릇한 고등어 구이와 모락모락 김이 솟아오르는 알탕. 모두 이지연 주임이 즐겨 찾던 것들이다. 이렇게 마주 앉아 밥을 먹으니 같이 회사 생활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그런데 주임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내가 기억하기로 이지연 주임은 노원구 쪽에 살았을 텐데?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는지 의아하다.
“근처에서 학원 다녀서요.”
“학원이요? 영어?”
“아뇨. 웹툰이요.”
이지연 주임의 사생활부터 취미 생활까지 나름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웹툰은 정말 처음 듣는 얘기다. 그럼 아까 그 그림을 그린 게 이지연 주임이었던 건가?
“웹툰……좋아하셨어요?”
“네, 덕분에요.”
“…….”
도톰한 고등어 살을 한 점 입에 넣으며 이지연 주임은 이해 가지 않는 말을 했다.
내 덕분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그때 그쪽이 왔다 가고 회사가 뒤집어졌거든요. 그 소란을 들은 게 저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날부터 다들 이직 준비하고 난리였어요.”
“…….”
“그쪽 행동이 잘한 건 결코 아니었는데…… 막상 듣고 보니 틀린 말이 하나 없더라구요.”
숟가락에 도톰한 알을 담아 입에 넣던 이지연은 맛이 황홀한 듯 몸을 파르르 떨렸다.
저 모습도 참 오랜만이다.
한참을 야무지게 먹던 이지연 주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그리는 게 꿈이었거든요.”
“처음 듣는 얘긴데요?”
회귀 전에도 들어본 적 없던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짓자 이지연 주임이 피식 웃었다.
“누가 들으면 저랑 오래 알고 지낸 사인 줄 알겠어요?”
“음, 그러면 회사는 그만 다니시는 건가요?”
내가 회귀를 한 사실은 그 누구도 모른다.
말한다고 해도 믿을 사람도 없을 테고.
물 흐르듯 슬쩍 대화를 넘어가니 그녀도 꼬투리를 잡진 않았다.
“이미 퇴사했어요. 본격적으로 도전해 보려고요.”
“응원할게요. 아까 그 그림 실력이면, 정말 성공한 작가가 되실 것 같아요.”
진심을 담은 내 말에 이지연 주임은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싱긋 웃었다.
“그쪽은 진짜 특이하네요.”
“뭐가요?”
“왜인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처음 보는데도 낯설지가 않다?”
“처음은 아니죠. 면접 때 봤으니까요.”
보통 이런 능글맞은 말을 하면 어디서 이상한 거 배워 왔냐며 낄낄대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왜인지 쭈뼛거린다. 기억 속의 모습보다 더 낯을 많이 가리는 것 같다.
“그런데 그쪽은 어느 회사 들어갔어요?”
“출판사 취직했어요. 웹소설 출판사요.”
“웹소설이요?”
이 시절은 종이책 대여점 시장에서 웹소설 시장으로 조금씩 이동하던 춘추 전국 시대이자 혼돈기. 일반인들 중에선 웹소설에 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웹툰 작가들도 이쯤부터 돈 좀 만지기 시작한다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었으니까.
“네, 웹툰처럼 온라인에 올리는 소설을 출간하는 회사에요.”
“우와, 그런 게 있었군요?”
“네, 나중에는 웹소설 기반의 웹툰도 많이 생길 거에요.”
잘 팔린 웹소설 하나는 웹툰, 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 게임 등으로 다양하게 뻗어나갈 수 있기에 OSMU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음…… 생각해보니 악을 뿌리 뽑으려면 단순히 웹소설 쪽만 건드려서는 안 되겠는데?’
출판계는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회귀하기 전 시점에는 웹소설 출판사가 자체 웹툰 스튜디오를 만들고, 또 웹툰 제작사 역시 새로운 법인이나 웹소설 레이블을 만들어 웹소설 시장에 진출했으니까.
‘……아니야. 우선은 웹소설 출판계만 집중하자.’
웹소설과 마찬가지로 웹툰 쪽도 온갖 불공정 계약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많지만, 지금의 나는 이제 막 뜨기 시작하는 작가, 딱 그 정도 수준이다.
아직 아무런 힘이 없는 나로서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 하기보단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고.
“다 먹었으면 일어날까요?”
“아, 네. 그러시죠.”
그녀가 옷을 주섬주섬 입는 사이 슬쩍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하려는데.
탁.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지연 주임의 손이 내 카드를 낚아채고 자신의 카드를 사장님께 건넸다. 영문 모를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지만 그녀는 나와 시선도 맞추지 않고 내게 카드를 돌려줄 뿐이다.
“잘……먹었습니다?”
“저도요.”
가게를 나와 꾸벅 건넨 인사에 그녀는 씩 웃으며 명함을 건넸다.
“다음에 밥 사요. 오늘은 내가 샀으니까.”
청순하고 가녀린 외모지만 가끔 이런 당돌한 매력이 있는 여인이다.
이런 모습도 오랜만이네.
“연락드릴게요. 아? 제 이름은—”
“다음엔 누나라고 불러요, 주임 말고. 그럼 잘 가요 정우 씨.”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중순.
허연 김을 내뱉으며 이지연 주임는 그렇게 사라졌다.
“이번에는 더 빨리 친해질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가만?
그녀와 얘기를 하다 보니 갑자기 소설 소재가 떠올랐다.
지난 생엔 구상만 해두고 쓰진 않았던 글.
하지만 OSMU로는 더없이 좋은 소재가.
그리고 내가 직접 경험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것. 바로 회사원물이.
“연재나 하나 더 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