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인물, 장소, 배경, 상황 등 모든 소재 및 설정은 현실과는 무관한 허구의 설정에 근거했음을 알려드립니다.>
#1화 ― 프롤로그.
전쟁터.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이곳은 전쟁터다.
“장난해? 작가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잠수를 타? 런칭이 코앞인데 제정신이야? 제정신이냐고 새끼야!”
진득한 혈향을 풍기는 의와 협의 세계.
10서클 대마도사가 펼치는 황홀한 마법.
숨 막히는 회귀자의 복수 활극까지.
쾌락과 울림을 주는 환상의 세계가 5,000자의 짧은 글, 이 한 편에 담겨 있다.
그리고 그 한 편의 글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매니저들의 하루는 전쟁과도 같다.
“작가님! 연재 시간 30분 전인데 아직도 원고를 안 주시면 교정은……자, 작가님? 작가니임! 씨발 전화를 끊어?”
매니저들은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하게 된다.
우리의 적은 누군가?
작가일까? 보험팔이처럼 쪼아대는 상사일까?
아니면 심심풀이로 악플을 다는 독자일까?
이런 지옥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웹소설 출판사 매니저.
그리고 웹소설 작가다.
내 이중생활은 시작은 이렇게 시작됐다.
* * *
어느 보통 날.
누군가는 저녁 약속을 위해 밖을 나서고, 직장인들은 노곤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올라서는 어느 저녁이었다.
“……푸흡, 푸핫하하하!”
부산스러운 강남 도로 한복판에서 폭소를 쏟아내자, 사람들은 병균 대하듯 나를 피해 갔다.
따가운 시선들.
나를 향한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지만,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손에 들린 이 종이 뭉치들 때문에.
“하아…… 실화냐 이거?”
배가 꺼지라 웃고 나니 어이없는 감정만 가득하다. 내가 직접 계약한 계약서들과 그 수에 비례한 고소장들. 그중에서 난 이 모든 일의 원흉인 BS북과의 첫 계약서를 다시 찬찬히 읽어나갔다.
표지 제작 비용은 작가가 부담.
계약 위반 시 위약금은 총 매출의 2배.
교묘하게 꼬아둔 작가 몫 1할의 9 대 1 정산비.
기타 등등이 조화롭게 합쳐진 콤비네이션이 이 종이 쪼가리에 모두 담겨 있다.
나를 나락을 빠트렸던 첫 번째 출판사 BS북. 뭣도 모르던 신인 작가 시절, 놈들은 내 계약서에 재밌는 짓을 했었다.
완결 후 3년 만기인 줄로만 알았던 계약서엔 계약 당시 구두로 설명받은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었으니까.
“하…… 하하하. 특약? 설명도 없이 특약을 넣어?”
계약서에 명시된 기본 계약 기간은 3년.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최소 세 작품 이상을 출간하지 않으면 계약이 자동 연장된다는 특약 사항이 계약서 중간에 슬쩍 들어가 있었다.
분노의 5단계 중 부정이 지나가고 분노의 시간이 찾아왔다. 나를 나락으로 이끈 BS북의 대표 강경진, 그 사기꾼 새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지독한 놈이었다. 작가를 자기의 돈줄, 아니 꼭두각시로 보는 놈이었으니까.
“작가님, 글은 벽보고 혼자 쓰셔야 해요. 대문호들은 다 그렇게 하죠.”
“아이고 작가님, 제가 설마 작가님 손해 보는 짓 하려구요? 작가님의 성공이 저희 회사의 성공인걸요? 하하, 얼른 사인부터 하시고 식사하러 가시죠?”
“작가님, 작가방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요. 커뮤니티도 마찬가지고요. 거짓 정보만 난무하는 데 시간 낭비하지 마시고 저한테만 물어보세요. 궁금하신 거 다 해결해 드릴게요.”
상냥한 어투에 가려진 그의 모든 말들이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걸 깨달았을 땐, 이미 내 손에 이중 계약 위반 고소장이 가득 찬 상태였다.
첫 계약 당시 내 담당 매니저였던 강경진이 야누스 같은 놈이라는 걸 나는 알지 못했다.
두 번째 작품의 연재 때까지도.
비로소 세 번째 작품을 소설피아에 연재할 때, 다른 매니지들의 적극적인 컨택, 작가방 작가들의 조언으로 BS북과의 계약이 불공정 계약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이 흘러 BS북과의 계약이 깨끗이 종료됐다고 생각한 그때, 나는 바로 다른 매니지와 계약, 출판을 진행하게 됐다.
그렇게 BS북과 강경진의 족쇄를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다 순조롭게 끝난 줄만 알았는데…….”
그때를 떠올리니, 입안이 쓰다.
새로운 출판사와 계약한 내가 점점 더 승승장구하기 시작하자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BS북의 법무팀이었다.
그들은 내게 계약 기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고, 운명의 장난처럼 내가 계약 중인 다른 출판사들도 한날한시에 단체로 고소장을 보내왔다. 마치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씨발…… 자동 연장?”
첫 작품 완결 후, 차기작을 BS북과 함께 하자는 강경진의 제안을 일언반구에 거절했고, 그의 집요한 연락에 지쳐 번호를 차단했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강경진은 꾸준하게 내게 연락한 모든 증거를 남겨 둔 거였다.
오늘 방문한 모든 변호사들은 내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며 수임을 맡기도 꺼려 했다.
“단지 글이 쓰고 싶을 뿐이었는데…… 대체 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건지.
매일이 경쟁이고 남의 밥그릇을 뺏어야만 살 수 있던 회사 생활. 그리고 그 생활을 버틸 수 있게 해줬던, 삶의 한 줄기 빛인 웹소설 작가의 삶은 독이 든 성배였다.
접대, 비리, 욕이 난무하는 회사 생활에 갈릴 만큼 갈렸었다. 그렇기에 활자의 세계는 누구와 경쟁도 할 필요 없이 오직 내 글의 작품성만 독자들에게 인정받으면 되는 별세계로 생각했었는데.
“씨발…… 진짜 내 삶을 바꿔놓기는 했네.”
문득 BS북의 신조이자 강경진의 명함에 새겨 있던 그 글귀가 떠오른다.
한 문장의 글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꾼다는 그 개좆같은 말이.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는 법정 스님의 말이 옳았다. 어설픈 인연을 만나게 되면 그들에 의해 삶이 침해되는 고통을 받는다는 그 말이.
“그래, 이제 뒤는 없어. 인터넷에 싹 까발려주마.”
이제 대기업으로 발돋움한 BS북과의 법적 공방에서 내가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BS북과 약속이라도 한 듯 한날한시에 고소장을 보낸 다른 출판사들과의 싸움 역시 마찬가지고.
불 보듯 뻔한 결과라면 여론의 힘이라도 빌릴 생각이다. 그래 해보자고. SNS에 싹 다 올려 제대로 매장시켜 줄 테니까. 이젠 참을 만큼 참았다.
“니들이 어떤 쓰레기 같은 일을 저질렀는지 만천하에 똑똑히…….”
브와아아앙—!
횡단보도는 아직 파란불인데?
아니, 빨간불이었구나.
“하…… 인생 참…….”
피할 수도 없는 속도로 나를 향해 돌진하는 덤프트럭에 내 몸은 산산조각이 났다.
* * *
“……정우 씨. 박정우 씨!”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박정우 면접자님, 안 계십니까?”
눈알만 굴려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기시감이 든다. 여긴 분명 내가 다녔던 무역회사.
그 회사의 면접 장면이다.
꿈이라고 여기기엔 전신의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하다. 죽은 건가? 아니면 꼬집는 볼이 얼얼하게 느껴질 정도의 꿈인 건가?
‘하필…… 뒤지기 직전에 꿈을 꿔도 이딴 곳에?’
내 삶의 마지막 꿈이 이곳이라는 게 유쾌하진 않지만, 소설처럼 과거로 회귀한 게 아닌 이상 덤프트럭에 치인 내가 이렇게 멀쩡할 수는 없다.
“박정우 면접자님! 안 계십니까?”
내 이름을 거듭 호명하는 이지연 주임.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모습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필요 이상으로 착해 빠져서 쓸데없는 일만 도맡아 하던 사람.
“예, 박정우 여기 있습니다.”
“면접 시작합니다. 빨리 들어가세요.”
그럼 도와줘야지.
꿈인데 이 정도 돕는 게 뭐 어때?
면접장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매우 익숙하고 두 번 다시 보기 싫던 얼굴들이 가득하다.
“자기소개부터 해보시죠.”
“네, 알겠습니다.”
보자아, 내가 면접 보러 왔을 당시면 나이가…….
“이름은 박정우, 2014년 올해 나이는 20살입니다.”
“이력서를 보니 보육원 출신이라고 돼 있군요? 그러면—”
“네, 뭐. 근데 자기소개는 됐고. 말이나 좀 하고 갑시다.”
“……뭐? 지금 뭐라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임원진 그리고 팀장 놈의 얼굴을 보니 속이 후련하다.
“귀한 시간 내서 누추한 곳에 왔으니, 잘 들어보세요.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을 해줄라니까.”
“허, 어디서 이런 사람이…….”
“홍성철 차장. 당신은 말이야, 일은 드럽게 못하면서 윗사람 똥꼬 좀 그만 빨아. 그렇게 사는 거 웃기지 않아? 똥독 오른 니 얼굴처럼?”
“……뭐, 뭐 인마! 당신 미쳤어? 이지연! 이지연 주임! 당장 이 사람 끌어내!”
“소리 지르지 마 인마! 내가 니 부하 직원인 줄 알아? 닥치고 들어!”
꿈이긴 해도 하고 싶던 말을 시원하게 내뱉으니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만 같다.
“그리고 장성욱 팀장. 성추행 좀 그만해 이 더러운 새끼야. 고민 상담해준다면서 여직원들 팔뚝 살 만지고 브라 끈 건드는 거 누가 좋아하겠냐? 브라 끈이 요술램프야? 만지면 고민이 해결되게?”
“뭐, 뭐뭣? 어디서 저런 미친놈이!?”
욕해봤자 어쩔 거야? 어차피 꿈인데?
나는 할 말 다 하고 갈 테니, 계속 그런 표정 지어 보라고.
“그리고 석도현 이사. 하아…… 이 무능한 새끼야, 넌 아빠 빽으로 들어 왔으면 일하는 시늉이라도 해 이 새끼야! 밥만 축내지 말고. 생긴 건 누구 닮아서 욕심만 덕지덕지 붙어갔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대표님. 대표님 얘기하는 거 맞으니까.”
“저 새끼 당장 끌어내!”
“죄, 죄송합니다 대표님. 지금 당장—”
“내 발로 나갈 거니까, 닥치고 다들 그대로 있어!”
버럭 소릴 지르니 뛰쳐나오려던 면접관들은 고장 난 기계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다들 미친놈이라도 본 표정을 짓는 게 만족스럽기 그지없다.
“이런 쓰레기 같은 회사는 돈 줘도 안 다니니까 다들 인성 좀 키우십쇼, 예? 월급도 지들 인성만큼 주면서 말이야.”
“……뭐, 뭐 저런 미친 새끼가!”
“누가 저 새끼 면접에 올렸어? 누구야!”
꿈에서도 책임 전가 하는 구질구질한 모습까지 구현하다니, 참 리얼하기 그지없다.
나를 향한 삿대질과 고성을 등으로 받아내며 면접실을 나오니 새하얗게 질린 이지연 주임이 보인다.
“이지연 주임님?”
“……저 아세요?”
잘 알죠.
누구보다 열심히 사시는 분인데.
“이런 회사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지금부터 하시고 싶은 일 하세요. 이지연 주임님은 더 대우받아야 하는 분이니까요. 그럼, 이만.”
벙찐 얼굴의 이지연 주임을 지나치니 대기실에 가득 찬 다른 면접자들이 보인다.
그냥 지나쳐도 되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배가 되는 법이지.
“경기도 그지같아 취업하기도 어렵고 상장도 된 회사니 괜찮겠지 하고 면접 보러 오신 많은 분들. 잘 들어주세요.”
다들 이지연 주임과 같은 표정이었다.
몇몇 덜떨어진 놈들은 경쟁자 하나 제꼈다는 표정이고.
“여기 주가 조작 일삼는 회사에요. 당장 3년 후면 비리로 문제 생길 거고 연봉 협상은 회사 사정이 어쩌구 하면서 2년에 한 번 그것도 잘 올려줘야 2%구요.”
점점 거세지는 면접자들의 웅성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계속해서 진심이 담긴 말을 쏟아냈다.
“다들 취업 준비 힘든 거 알아요. 그래도 이런 구제 불능의 쓰레기 회사는 쳐다보지도 말고. 재활용 정도는 되는 급의 회사를 알아보세요. 태양무역이나 구성그룹 아니면 제이엠이나 엘에스티 같은 중소 무역 회사가 이런 겉만 번지르르한 폐차장보단 나을 겁니다. 거기는 성장 가능성도 높고 최소 사람대우는 받으면서 다닐 수 있으니까. 그럼 다들 수고하세요.”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다 내뱉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아! 근데 하나 빠진 말이 있다.
나는 빠르게 다시 면접실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고 외쳤다.
“너네 회사 5년 후에 상폐된다. 그럼 진짜 갑니다.”
“뭐, 뭐? 이 미친 새끼야? 당장 안 와!”
“응, 안 가! 네가 더 미친 새끼야~”
나를 향한 온갖 저주를 들으며 빠르게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무리 꿈이어도 맞는 건 싫으니까.
“근데 대체 언제 잠에서 깨는 거야?”
그리고 내가 회귀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온전히 이틀이 걸렸다.
“와 씨…… 회귀를 시켜줘도 이런 시점에 시켜?”
내가 되돌아온 연도는 2014년 1월 6일.
내가 죽은 시점으로부터 무려 10년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