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60. 강림
* * *
신들이 형체가 없다니. 그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의 신들은 내가 지구에서 알던 종교의 신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신들에 대한 지식을 조금 알아가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어떤 공동같은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돔같은 지붕으로 덮인 텅 빈 장소였다.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색깔의 빛을 뿌려대는 원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저 원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르가리타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원을 향해 발을 옮겼다.
***
넓은 공동 한가운데에는 매 순간마다 다른 색의 빛을 뿜는 원이 그려져 있었다. 무언가 영롱하면서도 지독하게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원에 발을 들여놓으면 불규칙한 저 빛에 휩싸여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들어가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를 악물고 원을 향해 걸어가는데 뒤에서 마르가리타가 말했다.
“스스로를 잃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저곳에서 자신을 잃으면 육체와 정신, 혼까지 전부 혼돈에 잡아먹혀 사라집니다. 신들을 공손히 맞이하고 받아들이되, 자신의 주권까지 상실하시면 안됩니다.”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는 충고이자 경고였다. 지키지 못하면 나의 몸과 정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저 원에 들어가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길래 저런 경고까지 하는 것일까?
뒤를 돌아보자 조용히 눈을 감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마르가리타가 보였다.
“행운을 빕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르가리타는 입을 다물었다. 아마 뭔가를 더 묻는다 해도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원에서 한 발자국 떨어진 곳까지 와있었다. 혼란스럽게 이리저리 뒤엉키는 빛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그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에 홀린듯이 발을 딛으려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발을 뺐다.
이래선 안된다. 이런 상태로는 들어가자 마자 먹힐 것이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신기한 것은 정신을 바로잡으려 하자 몽롱해지던 정신이 바로 또렷해졌다는 것이었다. 붕 떠오르던 감정이 빠르게 식으며 냉정을 되찾았다. 어쩌면 내 고유특성 중 하나인 절대이성 덕분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정신을 다잡은 나는 마침내 모든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겨낼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그렇게 나는 원 안쪽으로 발을 디뎠다.
후우우우우욱
“흐으으으으읍!!”
발을 딛자 마자 땅이 아래로 꺼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주변의 모습이 일변했다. 갑작스런 부유감이 느껴지며 몸으로 느껴지는 모든 감각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만화경 안으로 들어온 것처럼 수많은 이미지와 색깔들이 서로 뒤엉키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내가 서 있던 신전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공허하고 혼돈으로 가득 찬 우주 공간 한가운데 떠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뒤죽박죽이 된 주변 환경과, 더이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않는 감각도 문제였지만 정말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원을 밟은 순간부터 머리에 강제로 어떠한 정보가 주입되고 있었다. 방대한 양의 고차원적이고 심오한 지식들이었다.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수많은 지식들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것들이 전혀 맥락없이 투입되어 내 머릿속을 점령하는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게 무엇을 전달하려는 건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지식 중 아주 극히 일부만을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세상의 숨겨진 비밀들과 위대한 존재들의 일면이 내 앞에 생생히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세상 순환 병존 명운 태동 분화 입자 차원 외해 진리 시간 생명 혼돈 근본 점지 안배 공허 만연 반복 불안정 회귀 반전 탈육 깨달음 공간
쏟아지는 이 세상의 진리와 고등한 지식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내 주변의 상황들 역시 지극히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휩쓸려 사라져도 아무 상관이 없을만큼...
그 순간, 무언가 거대한 벽 같은 것이 나를 틀어막는 느낌을 받았다. 밀려오는 정보들에 휩쓸리며 나 자신이 사라지려 하는 도중 그 모든 과정이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 두터운 벽이 거대한 파도를 굳건히 막아서며 혼란을 끊어냈다.
순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이 기회를 놓쳐선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흐려지는 정신을 붇잡으며 의식을 일깨웠다. 점점 흐릿해지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 힘을 썼다.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겪어온 경험들을 되짚었다. 나와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의 특징들과 나의 주관, 나의 목표 등을 떠올리며 ‘나’라는 주체를 확실히 지켜내려 했다.
하지만 맘처럼 되지 않았다. 거대한 벽이 정보의 파도를 막아주고 있지만 이미 들어온 정보만으로도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의 일시적임과 부질없음을 알아버린 나는 더이상 이전처럼 나를 인식하고 확정할 수 없었다.
다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경험? 기억? 관계? 그것들은 전부 허상이다. 그저 뇌 속에 기억된 감각정보에 불과하며 일시적으로 남아있다 사라질 감정 쪼가리들일 뿐이다. 아무 짝에 쓸모 없는 환상일 뿐이다.
혹자는 ‘나’라는 것은 허상이라고 말한다.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저 지금 여기 이 상태에 있는 우리가 멋대로 만들어낸 개념이라고.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저 방대한 정보량과 나와 비교할 대상인 ‘타인’이 없다는 것 만으로도 자아의 경계가 이토록 흐려지니 말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이 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고 기억하는 ‘의식’이다.
의식만 남아있다면 필요에 따라 ‘나’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수 있다.
무엇이 실체이고 허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 의식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필요한 개념들을 만들어내는지가 중요하다.
수면 위를 유영하는 것 같던 내 의식이 조용히 깨어난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지식과 진리들을 내려다보듯이 관조한다. 그 모든 것 중 내게 필요한 것만을 골라낸다. 나머지 불필요한 정보들을 걷어내고 ‘나’를 구성할 새로운 재료들을 모아들인다.
선택한 재료들을 끌어모아 하나로 합친다. 정보의 조각들, 진리의 파편들이 하나로 얽히고 섥히며 모여든다.공허한 우주 공간에 수소와 헬륨 원자들이 모여 최초의 항성을 만들어내듯이 새로운 ‘나’라는 존재가 생겨난다.
근본부터 해체되었다가 새롭게 태어난 내가 눈을 뜬다. 더이상 나는 혼란스럽지 않았다. 아무리 많은 정보가 뇌속을 헤집어도, 그저 흘려보낼 따름이었다.
기준과 정의를 새롭게 내린 나는 나만의 눈으로 방대한 세상을 바라보았다. 뒤집히는 환경과 제 기능을 못하는 감각은 내게 아무런 제약을 주지 못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에 모든 진리는 복종했다. 다른 존재에게는 그러지 않을지언정, 내게는 모든 것이 내가 바라보고자 하는 대로 보였다.
무엇에 굴하지 않고 독립적이며 자주적인 존재, 그것이 나였다.
그렇게 확립과 재탄생을 마친 나는 지금까지 나를 주시하고 있던 셀 수 없이 많은, 강렬한 존재감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형체는 인식할 수 없었다. 어디서 어떻게 나를 주시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세상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강하고 격렬한 존재감을 뿜어낸다는 것 밖에 알 수 없었다.
내가 자신들을 인식했음을 알아차린 건지 그들이 보이는 흥미와 관심이 한층 격렬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하는 대화인지 정보의 교류인지 모르겠지만 미지의 정보가 내게로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해석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는
원
한동안 그저 정보를 받아들이기만 하자 극히 일부의 정보가 해석이 되었다. 내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그들이 나를 위해 배려를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나는 내 주변을 감싸던 환경이 점차 무너져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기묘한 상황이 끝나려는 것인지 모든 것이 점점 흐려짐과 동시에 깨어졌다. 부서져가는 세상의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나도 점차 이 공간 바깥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전혀 인식할 수 없는 내 육체가 조금씩 느껴졌다. 비산하는 빛의 조각들 사이로 내가 있었던 신전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쳤다.
그렇게 이 상황이 끝나려는 찰나, 갑작스럽게 훨씬 많은 메세지들이 내게 전달되었다.
했던
인가? 니
리 기
그렇게 내 정신과 육체가 그 공간을 완전히 빠져나가려는 순간 나는 내 머릿속에 분명하게 박히는 한 마디를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드디어 알을 깨고 나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