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60화 (60/61)

〈 60화 〉 59. 강림

* * *

그런 의문의 엘프의 모습에 나는 잠시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그 엘프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그녀가 아까부터 줄곧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요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엘프는 어느새 우리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 마르가리타님..?”

옆에 있던 리아나가 뭐라 말을 꺼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의문의 엘프는 가만히 서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오세요 진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예?”

나는 살짝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운님.”

하지만 그 엘프는 개의치 않고 다시 기다렸다고 말했다. 내가 당황할 것이라 에상이라도 한 듯이 전혀 흔들림 없는 태도였다.

나를 기다렸다고? 저런 신비로운 분위기의 엘프가? 나는 엘프를 이곳에서 처음 제대로 만났으니 접점이 있을리가 없는데.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것일까?

하지만 이 엘프가 나를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 하기에는 너무 확실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내가 오는 타이밍에 맞추어 나타난 것도, 내 이름을 지목하며 나를 기다렸다고 하는 것도 착각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럼 정말 저 엘프는 나를 기다렸다는 뜻이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알고 나를 기다렸는지는 모르지만.

이런 기묘한 상황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리아나였다.

“마르가리타님이라니... 마르가리타님이 밖으로 나오시다니! 거의 근 2백 년간 없던 일인데!”

리아나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일단 이 엘프의 이름이 마르가리타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 엘프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 두 세기만인 것 같고.

상당히.. 엄청난 기간이다. 수련이라도 한 것일까?

“호, 혹시 기다린다는 분이 마르가리타님이셨어요?”

뭔가 아주 신이 난 듯한 리아나가 내게 물어왔다.

“어... 그게..”

당연히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마르가리타라는 엘프가 나를 기다린 것은 맞지만, 내가 만나기로 한 엘프가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어쩔줄 몰라 하는 사이에,

“그랬군요! 그래서 누구인지 제게 말을 못했던 거군요!”

“..예?”

“음.. 하긴, 마르가리타님이면 그럴 만하죠. 함부로 말하고 다닐 수도 없고, 했어도 아무도 안 믿었을 거에요.”

리아나가 혼자 납득을 해버렸다.

“맞아요. 제가 진운님을 기다렸답니다.”

그리고 거기다 마르가리타가 쐐기를 박아버렸다.

“그...”

“정말 대단하세요! 마르가리타님과 연이 있으시다니!”

“후후, 맞아요. 진운님은 대단하시죠.”

“제 눈으로 보고 있는게 믿기지 않아요... 엘프 중 최초이자 마지막인 바깥의 신들의 사제인 마르가리타님을 만나다니, 게다가 그분과 연이 있는 초대자까지 만나다니...”

“저도 이 순간이 매우 감격스럽답니다.”

음, 모르겠다.

내가 어쩔 틈도 없이 리아나는 혼자 감격하고 혼자 놀라워하고 있었다. 마르가리타는 그저 잔잔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이제 보니 알면서 장단을 맞춰주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한참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있는 리아나에게 마르가리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리아나양, 저와 진운님은 이만 신전으로 들어가 신들을 뵈어야 합니다. 아쉽지만 이만 헤어질까요?”

부드럽지만 묘하게 차가운 듯한 목소리였다. 완곡한 축객령에 리아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아, 아! 그, 제가 두 분을 방해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아뇨, 방해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급한 일은 아니거든요.”

“아.. 다행이네요.”

“네. 그럼 리아나양,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네, 네..!”

아직도 흥분을 다 가라앉히지 못하는 리아나를 뒤로하고 마르가리타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가실까요, 진운님?”

“...네.”

아직도 무슨 상황인지 잘은 모르겠다. 하지만 신전에서 200년을 은둔했다는 엘프가 갑자기 은거를 깨고 나와 나를 부른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높은 확률로 신과 관련 있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 이유와 용건이 무엇이든 이미 내겐 신전으로 간다는 선택지 외엔 없었다. 어찌되든 클랜들의 눈을 피해 가야만 하는 곳. 그렇다면 여기서 마르가리타를 따라가는 것이 맞았다.

나는 마르가리타의 약간 뒤에 서서 그녀를 따라갔다. 걸어가는 내내 뭔가 싱그러운 향기가 마르가리타 뒤로 퍼져나갔다. 저 향을 담은 샴푸를 지구에 팔면 대박을 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향기로웠다.

그렇게 커다란 신전의 입구에 점점 가까워질 때 마르가리타가 말을 꺼냈다.

“오시는 길에 사소한 거짓말을 하신 것은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말을 맞춰 드린 것이구요.”

“아... 알고 계셨군요.”

역시 이미 알아채고 나를 위해 어울려준 것이었다. 그래서 다행히 곤란한 상황을 회피했으니 감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진운님께 악의가 있던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 불가피한 상황이었으니까요.”

대답을 들어보니 단순히 눈치 챈 것이 아니라 전후 상황을 다 파악하고 도와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르가리타는 내 이름도, 내가 언제 오는지도, 내가 와서 겪은 상황까지도 전부 알고 있었다. 마치 전부 어디선가 지켜보았다는 듯이.

대체 이 엘프의 정체는 무엇일까? 가면 갈수록 의문이 커져갔다.

“제가 누구인지 궁금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 네.”

마치 내 마음을 읽은 듯한 말에 나는 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여러 가지 의미로 에리한 여자였다.

“이 자리에서 진운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죠.”

아직은 때가 아니다, 라는 말이 뭔가 의미심장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몇 가지 사실은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르가리타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먼저 저는, 진운님께 딱히 중요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저 신들의 명에 따르는 종이라 보셔도 좋습니다. 여러 가지 도움을 드릴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신경 쓰지 말라는 말이었다. 하긴 그녀의 말처럼 그저 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기만 한다면 그녀 자체를 크게 신경 쓸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리고 진운님은 현재 많은 신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계십니다. 그 관심이 어떤 방식으로 진운님께 영향을 끼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현재 진운님의 상황에서는 그분들의 관심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 들려오는 말은 상당히 놀랍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예상한 내용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현 상황에 나는 천국과 지옥을 통틀어서 가장 뜨거운 감자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악마들과 천사들이 나를, 정확히는 카마엘의 깨어난 조각을 얻고자 혈안이 되어있으니 말이다. 이런 나라는 존재에게 신들도 흥미를 가진다고 한들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신들의 관심이 있는 편이 더 낫다는 것 또한 맞는 말이었다. 그들의 관심을 얻어야 천사들과 악마들의 손바닥에서 놀아나지 않고 변수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변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지만.

“잠시 후 꽤나 많은 신들이 진운님과 대면하기 위해 강림하실 것입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르가리타는 다시 돌아서서 신전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강림? 강림을 한다니? 신들이? 잠시 후에?

“잠, 잠시만요! 신들이 강림을 하신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앞서 걸어가는 마르가리타를 향해 뛰며 물었다. 그러자 고개만 살짝 뒤로 돌린 마르가리타가 대답했다.

“들어가보면 아실 것입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서두르도록 하죠.”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신전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나는 반쯤 혼이 빠진 상태로 그 뒤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커다란 신전의 입구를 지나자 거대한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의 양 옆으로는 높고 커다란 비석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알아볼 수 없는 문자로 비석 한가운데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을 알아보려고 집중해서 바라볼 수록 글씨가 흐릿해지며 뒤섞이는 듯 했다.

내가 계속 주변의 비석들을 바라보고 있자 마르가리타가 한 마디 했다.

“비석에 적힌 것은 신들의 이름입니다. 읽을 수도, 발음할 수도 없으니 알아보려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 거대한 비석들은 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비석들인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애초애 읽을 수도, 발음할 수도 없는 이름을 어떻게 적었는지 궁금해졌다. 신들이 직접 새긴 것일까? 아니면 신들의 이름을 옮기는 것을 허락받은 특별한 누군가가 새겼을까?

그렇게 한참을 비석들을 구경하며 걸었다. 복도가 상당히 긴 것인지 목적지에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비석들과 그곳에 적힌 신의 이름들의 존재감 때문에 따분함 따위를 느낄 틈은 없었다. 잠시 후에 있다는 강림 때문에 정신이 없기도 했고.

그런데 신들을 모시는 신전에 신의 모습을 본따 만든 신상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그저 커다란 비석에 신들의 이름을 적어놓기만 할 뿐, 그 어디에도 신들의 형상을 나타내는 신상은 보이지 않았다.

“중앙신전에서는 신상을 만들지 않습니다. 아니, 만들 수 없다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던 의문에 또 다시 마르가리타가 대답했다. 이 정도면 내 생각을 실시간으로 읽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말의 내용 자체가 상당히 흥미로웠다. 신상을 만들 수 없다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일까?

“수많은 신들 중에서 거의 대부분은 정해진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실 때도 타오르는 불기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진하고 질감있는 안개로 나타나시기도 하는 등 부정형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니 신상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죠.”

신들이 형체가 없다니. 그건 또 새로운 정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의 신들은 내가 지구에서 알던 종교의 신들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신들에 대한 지식을 조금 알아가며 걷다 보니 어느새 어떤 공동같은 곳에 도달하게 되었다. 돔같은 지붕으로 덮인 텅빈 장소였다. 한가운데에서 다양한 색깔의 빛을 뿌려대는 원만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저 원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르가리타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원을 향해 발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