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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자가 지옥에서 살아남는 법-59화 (59/61)

〈 59화 〉 58. 의문의 엘프

* * *

일순간 시야를 가득 매웠던 초록색은 주변에 무성한 식물들 때문이었다. 작은 잡초들부터 기다란 갈대, 적당한 크기의 관목이나 크고 무성한 나무도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 황무지에 가까운 지옥에서 식물이라니? 지금까지 한 달 간 이곳에 살면서 전혀 본적이 없는데? 환란의 숲을 구성하는 나무들처럼 층의 환경으로서 조성된 나무가 아니면 그림자도 본적이 없는 것이 식물이었다.

그럼 이 장소는 대체 무엇일까?

그런 내 상념은 갑자기 내게 말을 건 누군가에 의해 깨졌다.

“저기요...”

기다란 귀, 색감이 옅은 머리카락, 호리호리한 몸매, 미(美)형의 얼굴.

“괜찮으세요?”

“아...”

그렇다.

나는 엘프들의 거점에 떨어진 것이었다.

***

내게 말을 건 엘프는 밀집모자를 쓰고 야채가 담긴 바구니를 손에 들고 있었다. 옷도 상당히 편해보이는 생활복을 입고 있는 것이 어디서 먹을 것을 사서 돌아가는 중인 듯 했다.

전체적으로 생활감이 강한 느낌인 것으로 보아, 초대자는 아니고 방문자일 확률이 높았다. 거점에 거주하면서 전투 외의 생활이나 경제 분야 전반을 담당하는 방문자들이 보통 저런 분위기를 풍기곤 하니까.

인간 측 클랜 연합이 타종족들에게 나에 대해 언급했을지는 모르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초대자는 안 만나는 것이 좋았다. 그런 점에서 전송되자마자 마주친 것이 방문자인 것은 다행인 일이었다.

“저기.. 괜찮으신 거 맞나요?”

내가 잠시 생각에 잠겨있으니 엘프 방문자(아마도)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나는 다시 정신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아, 아.. 네. 괜찮아요.”

대답은 저렇게 했지만 현재 내 꼴은 빈말로도 괜찮다고 할 수준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맹렬한 추격전을 하느라 체력과 마력은 고갈되기 직전이었고, 초대자들의 기술을 쳐내고 피하느라 장비 곳곳이 망가져 있었다.

그런 내 꼴을 본 엘프는 내가 악마들과 드잡이질 하다가 온 줄 알고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세요. 쭉 가다 보면 큰 건물이 하나 나올텐데, 그곳이 엘프 클랜 연합 지부에요. 그곳에 계층 이동 했다고 말하시면 알아서 잘 도와줄거에요.”

“아...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2계층엔 처음 넘어오는 초대자들이 많아서 누구든 기본적인 도움은 주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거든요. 안 지키는 엘프들도 많지만요.”

하긴 2계층으로 오는 사람 중 1계층에서 막 넘어온 초짜의 비중이 높긴 할 것이다. 그런 초대자들의 보호 목적으로 암묵적인 룰을 정해놓은 모양이었다. 그런 룰을 따라 내게 약간의 도움을 주는 이 엘프는 그래도 엘프 치고 외부인을 그리 경계하지 않는 편인 것 같고 말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내겐 전혀 도움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인간 측 외에 모든 클랜 연합이 나를 찾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엘프 측 클랜 연합으로 가봤자 인간 거점으로 돌려 보낼 것이 뻔했다. 여러모로 다음 행선지로서는 전혀 알맞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나는 곧바로 향해야 할 목적지가 있었다.

“저기.. 혹시,”

“네?”

“가장 가까운 중앙 신전이 어느 쪽인지 아시나요?”

“중앙.. 신전이요?”

“네. 그곳에 먼저 가야하는 사정이 있거든요.”

그렇게 중앙신전 위치를 물으니 엘프 방문자가 조금 별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확실히 클랜 연합 지부가 어디있는지 알려주자 마자 중앙 신전 위치를 물어오니 조금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했다. 2계층에 처음 넘어오는 초행자들이 클랜이 아니라 신전을 찾는 경우가 상당히 드물기도 하고.

“음.. 일단 저기 반대쪽 길로 가시다가 오른쪽으로 꺾으시면 돼요. 연합 지부나 신전같은 주요한 시설들은 대체로 이 근처에 다 몰려 있어요. 근데... 2계층엔 처음 오시는 거 아니셨나요?”

“아, 네. 일단 2계층은 초행이긴 합니다.”

“그쵸? 보통 혼자서 급하게 넘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처음이시더라구요. 근데.. 신전으로 먼저 가시게요?”

“네. 거기서 꼭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어서요.”

“신전에는 연합 지부처럼 포탈이 없어서 인간 거점으로 가시긴 힘들텐데요?”

“음..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기서도 충분히 만날 수 있는 분이거든요.”

“그래요? 그럼 혹시 만나기로 한 분이... 엘프신가요?”

“어.. 네, 맞아요.”

신전에 가야하는 이유를 대충이라도 대야 하니 일단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잠깐 보고 말 사람이니 상관 없을 것이었다.

“와아, 정말요?”

하지만 엘프 방문자의 반응은 내 예상과 사뭇 달랐다.

“엘프와 연을 맺은 분이셨다니! 이거 제가 귀한 손님을 몰라봤네요!”

“..네?”

“이종족이, 그것도 인간이 엘프와 연이 있다니! 저 이런 경우는 정말 오랜만에 봐요! 45년 전인가? 스피릿 몇 명이 우리 거점에 방문해서 몇가지 기술을 배우고 간 이후로 이종족이 엘프랑 사적으로 교류한 사례가 없다시피 하거든요.”

“아...”

“물론 알게 모르게 있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아무튼 정말 대단해요! 혹시 어떤 분과 만나기로 한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렇게 나는 내가 치명적인 말실수를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엘프가 타종족과 연을 맺는 다는 것이 이리도 드문 일일 줄이야.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나는 대충 수습을 하고 넘어갈 생각으로 대답했다.

“아 그게, 제가 멋대로 그분에 대해 말하고 다녀도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자신에 대해 알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시는 것 같진 않았거든요.”

“아.. 하긴. 엘프 중엔 유달리 그런 분들이 꽤 계시죠. 제가 괜한 질문을 했네요.”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럼 저는 이만..”

나는 일이 복잡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자리를 뜨려고 했다. 이 엘프와 계속 있다간 뭔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잠시만요. 신전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엘프 방문자가 갑작스레 붙잡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네? 굳이 그러실 것 까진...”

“아뇨, 여기가 이래보여도 생각보다 길이 복잡해요. 식물들 때문에 구불구불한 길이나 갈림길도 많거든요. 얼마 만에 나온 엘프의 초대를 받은 사람인데 혼자 해메게 둘 수는 없죠.”

“그...”

“저한테 믿고 맡기세요. 제가 빠르고 확실하게 안내해 드릴테니까.”

텐션이 묘하게 올라간 방문자 엘프가 길잡이를 자처하며 앞으로 나섰다. 참 난감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뭔가 가볍게 내지른 거짓말 때문에 일이 커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길만 안내받고 바로 해어진다면 될 것 같기도 했다.

“참, 제 이름은 리아나에요.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

“..김진운입니다.”

“그렇군요. 흐음, 진운, 김진운. 기억했어요.”

그냥 기억하지 않으면 안되나. 묘하게 불안해지는 기억한다는 말을 뒤로하고 나는 리아나를 따라 걸었다.

길이 복잡하다는 것은 정말인 모양이었다. 커다란 나무나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란 군락지들이 곳곳에 있어서 길이 전체적으로 구불구불하고 이리저리 뻗어 있었다. 그런 길을 잘만 나아가는 리아나를 따라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그렇게 리아나와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어이, 리아나. 장보고 오는 길이냐?”

“네, 린저. 나이미가 부탁해서요.”

리아나의 지인으로 보이는 엘프 남성이 지나가다 말을 걸어왔다. 맡투를 보니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모양인데, 생김새로 보기엔 한없이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다.

“그래. 그 옆에 분은... 인간이시군?”

“네, 맞아요. 인간이신데도 엘프와 연을 맺고 계시더라구요! 지금 그 엘프 분과 만나러 신전에 가는 중이세요.”

“오, 그래? 이거 귀한 손님이었구만. 엘프의 초대를 받은 손님이라니, 이게 얼마만인지. 좋은 시간 보내다 가시길 바라오.”

“아, 예... 감사합니다.”

나는 점점 일이 커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일단 넘기기로 했다.

그 후로 다섯 번이나 더 다른 엘프와 마주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 모두 나를 환영해주었으며 나는 뻘쭘한 표정으로 감사를 표했다.

도대체 엘프와 연을 맺는다는 것, 혹은 엘프의 초대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와 만난 엘프들은 모두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고 환대를 해주었다.

그것으로 보아 절대 가벼운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 그런 점을 이용해버리고 만 상황이 되었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렇게 걷다 보니 결국 신전에 도착했다. 꽤나 넓은 광장 같은 곳 한가운데에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나는 엘프들이 세운 중앙 신전 건물을 흥미롭게 관찰해 보았다.

전체적으로 목재를 활용하여 만든 건물이었다. 뭐 넘쳐나는 것이 나무일테니 그럴 만도 했다. 다만 신기한 것은 살아있는 나무가 건물의 일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조화와 어울림을 강조한 듯한 건축물이었다.

그러한 신전 건물 앞에 도착하자 리아나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제 도착이에요. 보시다시피 저 커다란 건물이 신전이랍니다.”

“그렇군요. 정말 멋진 건물이네요.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엘프의 초대자이신 만큼 제가 아니었어도 누구라도 도와주었을 테니까요.”

또 다시 그 이야기다. 정말 이렇게 가다가는 엘프 거점에 엘프와 연을 맺은 인간이 있다고 소문이라도 날 판이었다. 나는 신전에서 볼일을 마치면 곧바로 엘프 거점을 떠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리아나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럼 리아나,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이만 저는 가볼..”

“어?”

그렇게 인사를 하던 도중 리아나가 신전 쪽을 바라보며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내 시선도 신전 쪽으로 향했다.

눈을 돌려 바라보니 신전 안쪽에서 한 엘프가 걸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양손을 모으고 사뿐사뿐한 걸음걸이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 엘프는 완전한 순백의 색을 자랑하는 듯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하얀색 천이 몸의 굴곡을 따라 휘감듯이 둘러져 있었다. 단순한 천을 걸치고 있어서 꽤나 노출이 심한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천박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또한 팔찌나 목걸이로서 금색의 링 같은 것들을 여러 개 끼고 있었다. 그 링들은 걸을 때마다 자기들끼리 부딛히며 청아한 소리를 내었다. 무릎 근처까지 내려오는 장발은 부드럽게 휘어지며 웨이브를 타고 있었는데, 약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살랑거리는 것이 아주 부드러운 머릿결을 가진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얼굴은, 정말 말문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 의문의 엘프의 모습에 나는 잠시 넋을 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그 엘프를 바라보던 나는 문득 그녀가 아까부터 줄곧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요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엘프는 어느새 우리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마, 마리아나님..?”

옆에 있던 리아나가 뭐라 말을 꺼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의문의 엘프는 가만히 서서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오세요, 진운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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