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54. 이실직고
* * *
“..정말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그럼 이 상황을 극복할 다른 타개책이라도 있나?”
“...”
미카엘은 다양한 감정과 고뇌 속에 파묻힌 천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합당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지금 제기해라.”
“...”
“...”
그 뒤에 이어진 긴 정적은, 누군가가 내뱉은 탄식이 나오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피할 수 없는 혼돈이 도래하겠구나...”
***
[제 1계층 무작위 소환 시작]
[모든 초대자는 무작위로 계층 지대 어딘가로 이동한다.]
[초대자들에게 축복과 행운이 함께하길.]
[5]
[4]
[3]
[2]
[1]
[소환.]
지지지지지지직!!!
노이즈가 끼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1계층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마치 하나의 계층 전체가 점멸이라도 하듯이 깜빡이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속을 다 뒤집어놓을 것 같은 이질적인 감각이 느껴졌다. 그 감각은 발 끝에서부터 시작해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올라왔다. 그 직후 시야가 암전되는 동시에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그렇게 암흑 속을 떠다니는 듯한 상태에서 있기를 잠시,
“허어어억!”
무언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면서 모든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막혔던 숨을 뱉어낸 나는 핑핑 도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뒤죽박죽인 몸의 감각을 바로잡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러자 천천히 눈에 초점이 돌아오며 귀에서 들리던 이명도 잦아들었다.
몸을 어느 정도 진정시키고 나니 옆을 살펴볼 여유가 생겼다. 고개를 돌려보니 내 주변에는 나와 칭호로 연결된 4명이 나처럼 숨을 고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혼란스러운 감각을 바로잡느라 힘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끄으으... 소환을 할거면 좀 젠틀하게 해줄 수는 없는건가..”
그나마 빨리 정신을 차린 벨이 죽는 소리를 내었다. 다들 이번만큼은 벨의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듯 했다. 이해나는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게워내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다들 소환 후유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모두가 정신을 차린 듯하자 유지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이제 괜찮은거지? 아직 상태가 안 좋더라도 일단 주변 상황파악부터 해보자.”
그러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대형을 갖추었다. 어디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원거리 포지션인 린펠과 이해나를 나머지 세 명이 둘러싸는 형태였다.
그렇게 다들 자리를 잡고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일단 떨어진 장소는 당연하게도 숲속 어딘가였다. 높디높은 나무들이 붉은 빛 하늘을 가리는 숲 한복판. 1계층에서는 너무나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다행이도 주변에 당장 달려드는 악마들은 보이지 않았다. 최하급 악마의 군락지 근처나 하급 악마의 둥지 옆으로 떨어진 최악의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그저 스산한 바람 소리가 잎사귀들 사이에서 들릴 뿐이었다.
랜덤으로 소환된 장소가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다들 약간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소환에 대비한 교육에서 소환 장소가 위험할 경우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최악의 경우에는 소환되자 마자 습격당해 죽는 일도 있다고 했으니.
그렇게 최소한의 안전을 확보한 일행은 경계의 정도를 조금 내렸다. 그래도 여전히 대형은 풀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 태도도 유지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걷다보니 유지윤이 슬쩍 말을 꺼냈다.
“그러고보니 다들.. 괜찮은거야? 어제 거점이 완전 난장판이 되었잖아.”
그러자 다들 물꼬가 트인 듯이 어젯밤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대뜸 상급 악마인가 뭔가가 나와서 깽판을 치길래 내가 꿈을 꾸나 싶었어. 게다가 계약자로 보이는 사람들끼리 싸워대기도 했고.”
“그렇다. 이유도 모르고 도시 전체가 다 뒤집혀버렸지. 그나마 초대자들이 빠르게 나서서 망정이지, 도시 전체가 패닉에 빠질 뻔 했다.”
“통제하는 초대자들도 엄청 당황스러워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다들 혼란스러웠던 지난밤에 대해 한 마디씩 말을 내놓았다. 나도 자연스레 그 흐름에 합류해서 말을 하고 있자니 한창 이야기를 하던 벨이 모두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나저나, 다들 그 난장판에서 어디에 있었던 거야? 나랑 이해나는 뛰쳐나오던 중에 만나서 같이 다녔거든. 그러다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피난했어.”
그러자 한명씩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누구와 만나서 어디로 몸을 피했다는 식이었다.
그렇게 다른 팀원들이 말하고 있을 때 나는 홀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게 어젯밤 있던 일을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 떄문이었다. 사실 그 상급 악마는 내가 가진 카마엘의 조각을 노린 것이고, 그 틈을 타 찾아온 루시퍼의 계약자와 드잡이질을 했다? 그대로 설명할 수도, 한다 해도 받아들일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하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팀원들에게 이 사실들을 숨길 수 있을까?
칭호로 연결된 이상, 그리고 처음부터 연을 맺어 함께해온 이상 이들은 나와 앞으로 많은 일을 함께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불가피하게 내 진실과 관련된 여러 사건을 마주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들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할 것 역시 틀림없었다.
그럼 그 모든 순간순간마다 회피하듯이 진실을 숨길 것인가? 숨기려 한다고 해서 숨겨지기는 할 것인가? 감추려고만 하면서 계속 찾아오는 각종 위협에 무방비로 동료들을 내몰 것인가?
이 진실들이 가지는 무게와 크기를 고려해봤을 때, 이것들을 영원히 동료들에게서 숨길 수 있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언젠간 알려질 일이고 단지 언제 어떻게 알려지는지만이 다를 것이었다. 또한 내가 마주해야하는 위험을 동료들에게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겪게 만드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짓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밝히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지금 모두 밝히고 대책을 구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이 진실들을 듣고 나와 함께하지 않으려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밝히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때였다. 갑작스런 유지윤의 말이 내 상념을 끊었다.
“진운,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다들 이야기를 나누고 내 말을 기다리다 내가 생각에 잠긴 듯 하자 말을 건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다들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아.. 어, 아니...”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팀원들은 그런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늘 담담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지라 더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래? 아까부터 그냥 넋이 나가있던데.”
벨이 툭 던지듯이 물어왔다. 아마도 벨을 포함한 다른 팀원들은 내가 무언가 지독한 일을 겪어서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말에 무심코 고개를 들어 팀원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나에 대한 걱정과 그런 나를 놔두고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 등이 느껴졌다.
그 표정들을 보자 뭔가 맥이 탁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고민들이 우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나를 괴롭히던 문제에 대해 순간적으로 답을 내려버렸다.
그렇게 나는 반쯤 충동적으로, 그리고 적어도 후회가 없게 하자는 생각으로, 현 상황에 대한 모든 진실들을 말해버렸다.
“그게 말이지...”
***
“...이렇게 된거야.”
전부 말해주었다. 왜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무엇이 시작이었는지, 지금 내가 진정으로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갑작스럽게 시작된 나의 이실직고에 처음엔 다들 당황했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엔 각자 무언가에 대해 고민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모든 말을 끝낸 나는 한결 후련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실을 알고 팀원들이 할 반응에 대해 걱정된다기 보다는 그냥 그들을 믿고 맡기자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설령 정말 팀원들이 다 떠나간다고 해도 어떻게든 해쳐나갈 수 있지 않을까? 카마엘도 내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나도 어찌어찌 내 앞가림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들이 없으면 있을 때보다 훨씬 힘들어지긴 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전부 팀원들의 선택에 맡기고 그에 맞추어 게획을 바꾸어 가기로 결심했다. 이 험난하기 짝이 없는 여정을 함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각자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대답을 기다리던 때였다. 가장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벨이었다.
“이야.. 개쩌는데?”
“...?”
그리고 상당히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을 들어보면, 너는 지금 우연히든 뭐든 엄청난 힘을 손에 쥐고 있다는 거잖아? 그게 천계와 지옥의 세력균형을 뒤흔들 수 있을 정도이고? 그래서 지금 다들 너를 포섭하거나 없애지 못해 안달이고?”
“그, 렇지..”
“진짜 미쳤네? 알고 보니 바로 옆에서 역사가 쓰여지고 있었구만? 이야.. 내가 이런 엄청난 일을 보고 함께하는 중이라는 게 진짜 안 믿길 정도야.”
“..내 말을 전부 믿는거야?”
“그럼. 너가 이런 걸로 거짓말 할 이유도 없고, 또 내가 본게 있잖냐. 번쩍거리는 빛을 쏟으면서 천사로 변하고, 하약색 성화로 악마들을 지지는 걸 보고도 누가 네 말을 못 믿겠어.”
그러자 옆에서 린펠도 끼어들며 말을 보탰다.
“그렇다, 진운. 네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데다 네가 지금깢 보여준 것들을 본다면 믿지 않을 수 없겠지. 게다가 네가 말해준 것들이 사실인 것이 그렇지 않은 상황보다 말이 되지 않나. 네 말이 사실이어야 지금 네가 가진 힘, 그리고 어젯밤에 발생한 사건들이 전부 설명이 된다.”
“맞아. 적어도 너와 지금껏 동고동락한 우리라면 네말이 사실인 걸 인정 할 수 밖에 없어. 우리도 그렇게 바보는 아니라고.”
유지윤도 한마디 하며 동의를 표했다.
“근데...”
그렇게 다들 이야기 하던 중, 이해나가 입을 열었다.
이해나가 말을 꺼내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다들 할 말이 있더라도 일단 입을 닫아 버렸다. 그동안 정말 말 수가 적었던 이해나가 먼저 말을 꺼내는 상황인 만큼 다들 내색은 하지 않더라도 상당히 놀라워하며 반기고 있었다.
그 묘한 정적과 기대에 잠시 부담스러워하던 이해나가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엄청 위험한 상황인 거 아니야?”